politics

65년 전 정전협정문에 미국 이름은 왜 빠졌을까요

입력 2018.04.25. 15:46 수정 2018.04.25. 17:36
[더(THE)친절한기자들]"전쟁 없지만 평화도 없다" 기이한 정전체제를 아시나요

이틀 앞으로 다가온 남북정상회담
문 대통령 "65년 정전 체제 끝내고
종전선언 거쳐 평화협정 체결로"

1953년 7월27일 체결된 정전협정
정작 한국·미국은 당사자 아냐
한반도 정전 체제 관리 '유엔사령부'가
전투만 중지됐을 뿐 전쟁은 '계속'
남북 독재체제의 역사적 근거로 작동

[한겨레]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에 서명하고 있는 북한 인민군 총사령관 김일성. <한겨레> 자료사진

남북정상회담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정부 당국자와 전문가들은 이번 회담의 성과물로 ‘북한 비핵화 의지 확인’과 함께 ‘종전선언’을 미리부터 꼽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남과 북은 아직 ‘전쟁 중’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19일 “65년 동안 끌어온 정전 체제를 끝내고 종전선언을 거쳐 평화협정 체결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한 이유입니다. 이번 회담에서 정전에서 종전으로, 전쟁에서 평화로 나아가는 절호의 기회가 열릴까요? 종전선언이 왜 중요한지, 65년 동안 한반도를 지배해 온 종전 체제를 돌아보며 다시 생각해보려 합니다. 들여다볼수록 기이하고 비정상적인 정전 체제, 이번 회담을 통해 마침내 해소할 수 있기를 고대합니다.

월리엄 해리슨 유엔군사령부 중장(맨 왼쪽)과 남일 북한 인민군 대장(맨 오른쪽)이 1953년 7월27일 오전 회담장으로 쓰던 판문점 목조 건물에서 각각 정전협정에 서명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1. 전쟁 없지만 평화도 없다

1950년 6월25일 이른 새벽, 북한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시작됐습니다.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3년 동안 민간인 100만 명을 포함해 적어도 200만 명이 죽거나 실종됐습니다.

정전협정 체결까지는 꼬박 25개월이 걸렸습니다. 1951년 3월께 38도선 부근에서 전선이 교착되면서 전쟁은 소강상태에 들어갔습니다. 같은 해 7월 초 정전협상이 시작된 배경입니다. 저마다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한 군사적 충돌이 계속되는 가운데 협상은 765차례나 열렸습니다.

5개조 63항에 이르는 정전협정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전쟁의 정지, 평화적 해결이 이뤄질 때까지 한국에서의 적대행위와 모든 무장행동의 완전한 정지’입니다. 지금의 군사분계선과 4㎞ 너비의 비무장지대(DMZ) 설치도 이 협정에 따른 것입니다. 그리고 65년이 흘렀습니다.

남북정상회담을 일주일여 앞둔 4월18일 경기도 파주 판문점에서 한국 경비병 너머로 북측 경비병들이 근무 교대를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전쟁은 없지만 평화도 없었습니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한국전쟁을 “끝났으되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는 “전후 두 세대를 지났음에도 전쟁이 놓은 근본 질서가 엄존할 뿐만 아니라 전쟁재발의 가능성마저 운위되고 있는, 세계사적으로도 지극히 예외적인 기막힌 현실”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이른바 ‘53체제’는 위기와 불안, 안정과 파국의 중간타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박명림 교수는 아래와 같이 설명했습니다.

“근대 이래 세계의 주요전쟁의 종결형태는 승리와 패배가 명확하였고, 책임과 징벌도 뚜렷했다. 전쟁과 종전, 전투와 강화(講和) 역시 분명히 구별되었다. 특별히 세계열강이 참전하는 거대전쟁의 경우 더욱 그러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에서 승자와 패자는 구별되지 않았다. 남한과 북한, 미국과 중국의 대결은 무승부로 귀결되었다. 세계 자본주의 진영과 세계 사회주의 진영의 사상 최초 무력대결은 무승부였던 것이다. 근대 국제질서의 등장 이래, 특히 세계적 규모의 전쟁에선 유례를 찾기 힘든, 승패가 존재하지 않는 ‘비긴 전쟁’이었다. 정전협상 역시 전투행위를 중단하는 데 목적이 있었을 뿐 전쟁의 완전종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 기묘한 무승부가 전후 한국문제와 정전체제가 놓인 ‘위기’와 ‘안정’의 방향·정도·진폭을 좌우한 출발요인이었다. ‘종전의 실패’와 ‘휴전의 성공’이라는 전쟁중단 방식은, 전쟁과 평화의 잠정타협으로서의 정전체제를 정초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불안하였음에도 안정되고, 흔들렸음에도 깨지지 않는 일종의 ‘파국적 균형체제’였다.”

한국정전협정 64주년 기념식이 유엔사 주관으로 2017년 7월27일 판문점 자유의 집에서 열렸다. 한국전 참전 16개국 및 지원 5개국의 국기를 배경으로 유엔사령부 부사령관 토마스 버거슨 중장의 기념사와 연합사 부사령관 임호영장군,중립국 감시위원회 스웨덴 대표의 연설로 행사를 마치고 판문점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마쳤다. 사진공동취재단

2. 한국과 미국은 정전협정 당사자가 아니다

정전협정의 정식명칭은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사령관 및 중공인민지원군 사령관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입니다.

미국과 한국의 이름이 보이지 않습니다. 실제로 1953년 7월27일 판문점에서 협정을 맺은 이들은 마크 클라크 당시 유엔군 총사령관과 김일성 북한군 최고사령관, 펑더화이 중공인민지원군 사령관이었습니다. 협정문은 영문·한글·한문으로 작성됐습니다.

왜 유엔군일까요. 이는 한국전쟁의 성격 규정과 매우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박명림 교수는 한국전쟁이 표면적으로는 ‘내전’ 또는 ‘시민전쟁’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세계적 체제 전쟁’이자 ‘이념전쟁’이며 ‘진영전쟁’이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어서 “당시 자유진영은 유엔의 집단 안전보장행위라는 참전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유엔이 남한 안전을 보장한다는 점을 확인하기 위해 유엔군 사령관 자격으로 (정전협정에) 서명했다”고 설명했습니다. 현재 판문점에 있는 군사정전위원회도 유엔군과 공산군 장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중국과 북한은 협정문에 이름을 올렸지만, 전쟁의 실질적 당사자인 미국과 한국의 이름이 빠져버린 셈입니다.

한국의 이름이 빠진 데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고집’도 한몫했습니다. 이 전 대통령은 정전협정에 참여해 종전이 실현될 경우 미국이 한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할지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또 반공통일 의지에 불타던 그는 자신이 원하는 북진 시도와 정전협정이 충돌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괴뢰’ 북한과 대등하게 정전협정을 체결하는 것도 그에게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의 ‘고집’은 두고두고 짐이 되었습니다. 박명림 교수는 “이승만의 서명 불참과 정전협정 참여거부는 전후 남한의 정전협정-평화협정의 당사자 문제를 계속 야기해 남한에 심각한 불이익을 초래하고 말았다”고 꼬집었습니다.

3. 정전협정 뒤 ‘전쟁의 정치’와 ‘전쟁 같은 삶’이 시작됐다

65년 동안 지속된 정전 체제가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큽니다. 보수가 독점해온 ‘전쟁의 정치’가 부른 폐해입니다. 전쟁과 정치를 동일시하면서, 독재 등과 같은 부당한 권력에 맞서는 국민 저항을 군사력을 비롯한 폭력으로 제압하는 명분으로 정전 체제가 동원됐습니다. 전시 동원 체제가 한국 현대사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핵심 기제가 된 겁니다. 이는 북한도 예외가 없습니다. 다음은 박명림 교수의 설명입니다.

“전쟁 재발의 객관적 가능성은 소멸되었지만 한국전쟁 경험은 전후 남한과 북한에겐 살아있는 현실이었다. 그것은 체제 차원의 정치와 대중차원의 일상 모두에서 동일하였다. 두 한국은 전쟁의 재발위협에 대한 상시 위기동원전략을 통해 전사회를 효과적으로 통제하였다. 남한과 북한은 제2의 남침과 제2의 북침을 계속 경고하며 철저한 통제체제를 구축하였다.”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도 “휴전체제란 곧 일상적인 군사적·정치적 대결 체제이자 국민동원체제이다. (중략) 휴전상황에서 남북한의 ‘임시국가’로서의 성격은 남북한이 영토내의 주민에 대한 책임감보다는 적대하는 정치세력을 무력으로 제거하는 데 일차적인 목적을 두게 만들었다”고 지적했습니다. 4·19 혁명과 5·18광주민주화운동, 무수한 의문사와 공권력의 폭력이 반복된 원인이 휴전·정전체제에 있음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항구적인 비상사태’ 아래에서 국민들의 삶이 정상적일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해 박명림 교수는 “‘전쟁 속의 삶’이 전후의 ‘전쟁 같은 삶’으로 이어졌다”고 말했습니다. 한국 정치와 (국민들의) 삶이 국가 안보에서 멈춘 채 인간 존엄, 인간 안보 및 생명 존중으로 나아가지 못했다는 지적입니다. 가정, 학교, 군대, 기업, 도로 등 삶의 모든 현장에서 사망 지표가 ‘세계 최악’인 이유를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남북정상회담을 일주일여 앞둔 4월18일 경기도 파주 판문점 평화의 집 모습. 청와대사진기자단

4. 남북-북미만 빼놓고 당시 적대 관계 모두 해소됐다

60년이 넘는 남북, 북미 간의 적대 관계는 과거 적대 국가들과의 수교 회복 시기와 견주어봐도 비정상적입니다.

먼저 한국은 식민통치 20년만인 1965년 일본과 수교했고, (구)소련과는 1991년, 중국과는 1992년 수교했습니다. 미국 역시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가인 일본·서독과 한국전쟁 시기 또는 직후에 관계를 정상화했습니다. 미국은 베트남과도 패전 20년만인 1995년 수교했습니다. 유독 북한만 미수교 국가로 남아 있습니다.

정전협정이 유지되는 한, 유엔 가입국인 중국과 북한이 유엔과 대치중인 아이러니도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중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이기도 합니다. 정전협정이 폐지되어야 할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참고문헌>

박명림 연세대 교수 2013년 <한겨레> 연재 ‘한국전쟁 깊이 읽기’

김동춘 <전쟁과 사회>

강만길 외 편저 <한국 현대사 강의>

통일부 <문재인의 한반도 정책>, <2018 통일문제 이해>

이유진 기자 yjlee@hani.co.kr

추천 뉴스 1

연령별 많이 본 뉴스

전체
연령별 많이 본 뉴스더보기

추천 뉴스 2

추천 뉴스 3

추천 뉴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