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중심 세상 향해 향기를 뿜은 꽃들

김향미 기자 2018. 4. 24.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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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인도 출신 시인 루피 카우르 ‘해와 그녀의 꽃들’ 국내 출간
ㆍ신선한 페미니즘적 시어 주목

루피 카우르가 자기 등에 시집 표지를 그려넣은 모습. 출판사 박하 제공

루피 카우르(26)는 현재 세계적으로 유명한 페미니스트 시인 중 한 명이다. 2014년 무명의 상태에서 자가 출판한 첫 시집 <밀크 앤 허니>는 아마존과 뉴욕타임스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300만부 이상 판매됐고, 30개 언어로 번역·출간됐다. 그의 인스타그램 팔로어 수는 250만명이 넘는다.

2017년 10월에 나온 카우르의 두 번째 시집 <해와 그녀의 꽃들>도 약 6개월 만에 100만부 이상 팔렸다. 이 시집은 최근 출판사 박하를 통해 국내에 번역·출간됐다. 일러스트레이터이기도 한 카우르는 이번 시집에서 다섯 가지 꽃의 여정(시듦·떨어짐·뿌리내림·싹틈·꽃핌)으로 목차를 나누고, 여성으로 태어나 겪는 차별과 폭력의 세계를 시와 그림으로 풀어냈다.

시집을 읽는 것은 카우르의 생존기를 읽는 것과 같다. 그는 인도 펀자브에서 태어났으며 네 살 때 가족이 캐나다로 이민을 가면서 그곳에서 성장했다. 카우르는 여아 낙태가 당연시되는 남아시아 문화권에서 살아남았고, 사춘기 때 남자아이들이 자신의 신체를 희롱해도 그저 조신하게 굴라는 말을 들으며 살아남았다. 그는 또한 데이트 폭력과 성폭력으로 무너진 삶을 글로 풀어냄으로써 살아남았다.

카우르는 어려서부터 여성으로서 침묵과 순종을 강요받았다고 고발한다. “안 돼요는 우리 집에서 나쁜 말이었어/ 안 돼요라 말하면 매를 맞았지/ (중략)/ 그가 나를 덮쳤을 때/ 내 온몸이 거부했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안 돼요라고 말하지 못했어”(‘어릴 때 배우지 못했는데, 커서 어떻게 동의를 말하겠는가’ 본문 중)

여러 편의 시에서 눈에 띄는 것은 자신과의 화해다. 카우르는 여성으로서, 이민자로서 배제돼왔던 자신을, 스스로가 사랑하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네가 자신에 대해 말하는 방식/ 네가 자신을 하찮은 것으로/ 비하하는 방식들은/ 모두 학대야”(‘자해’ 전문)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는 성폭력 피해 사실을 기록한 시 ‘집’에서 “더 이상 나 자신을 비난할 수는 없어/ 너의 죄를 지고 가는 게 너무 무거워ㅡ내려놓을 거야”라고 외친다.

카우르는 이제 “나는 앞서 살았던/ 수백만 여성들의/ 희생을 딛고 서서/ 생각한다/ 내가 어떻게 하면/ 이 산을 더 높게 만들어서/ 나 이후에 살 여성들이/ 더 멀리 보게 할 수 있을까”(‘유산’ 전문)를 고민한다. “마치 자궁과 가슴에서/ 영양분을 받은 적 없는 사람처럼/ 당신은 피와 모유를/ 안 보이게 치워두려 한다”(‘인간’)고 비판하고 “우리가 부숴야 할 유리천장이 있다”(‘이곳의 지붕을 없애버리자’)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는 작품 밖에서도 여성의 문제를 말한다. 2015년 3월 어느 날 카우르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생리혈 자국이 선명한 회색 바지를 입고 침대에 등을 돌린 채 누워 있는 사진을 올렸다. 인스타그램은 가이드라인을 이유로 사진을 삭제했다.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고 벌거벗은 신체를 노출한 사진들은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으면서 여성이라면 당연히 경험하는 생리 사진은 왜 삭제되어야 하는가?” 카우르는 대중에게 물음을 던졌고, 이 사건은 전 세계적으로 공론화됐다. 결국 인스타그램은 일주일 후 사진을 삭제한 것은 실수였다고 사과했다.

카우르는 전 세계적으로 일고 있는 미투 운동의 성공에 대해 이렇게 예견한다. “미래 세대가 지금의 미투 운동을 돌아봤을 때 이전 세대가 도대체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의아해할 만큼 일상적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김향미 기자 sokh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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