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뻘 학생의 죽음에도 큰절 문익환 목사, 우리의 보호막이었다"
[오마이뉴스 글:박정훈, 사진:이희훈]
민주화 운동과 통일 운동의 거목인 '늦봄' 문익환 목사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오마이뉴스>는 문익환 목사와 뜻을 함께했던 사람들과 그가 남긴 물건들을 조명하고자 합니다. 민족과 민중을 위해 헌신했던 문익환 목사의 삶을 기리고, '촛불 혁명' 이후 새로운 체제와 다시 시작된 '남북대화 국면'을 맞아 올바른 한국 사회의 변화 방향을 모색해보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편집자말>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인 배은심(78)씨가 자신을 포함한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 회원들에 대해 설명한 말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과거형이다. 그들은 자식과 형제, 배우자의 죽음을 통해서 너무 많은 것을 알아야만 했고, 가장 열렬한 '투사'가 됐다.
"죽음을 각오하고 나섰으니까요. 아들도 죽었는데 나 죽는 게 문제냐는 생각으로."
유가협 회장 장남수(77)씨는 아들 장현구를 잃고 유가협에 들어와서 23년째 활동 중이다. 장현구 열사는 경원대학교에서 학원자주화 추진위원장으로 학생운동을 이끌다가 고문 수사를 받았다. 석방된 이후에도 교수와 직원들에게 구타를 당하는 등 고초를 겪다가, 1995년 12월에 분신해서 사망했다.
심지어 후원회가 만들어진 90년 8월 당시 문 목사는 방북으로 인해 수감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문 목사를 후원회장으로 모신 이유는 그가 열사들의 죽음 소식에 가장 먼저 달려오는 사람이었고, 누구보다도 유가족 편에서 함께 싸웠기 때문일 것이다.
다행히 그해 10월에 문 목사는 병환으로 '형집행정지'를 받고 가석방됐고, 유가협에 직접 '후원회' 간판을 내걸 수 있었다. 박래전 열사의 형이자 당시 유가협 사무장이었던, '인권재단 사람'의 박래군 소장은 유가협의 기록을 담은 책 <너의 사랑 나의 투쟁>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문익환 목사님을 후원회장으로 모시고 유가협 간판 건너편 대문 기둥에 후원회 간판을 걸었던 날도 기억납니다. 목사님이 출소하신 지 며칠 지나지 않아서였지요. 그때 3백 명 가까웠던 후원 회원들이 있었고, 그들이 힘을 모아서 봉고차도 사주었지요. 그런 일들이 모두 그렇게 남아있습니다. 그때의 후원회가 남아 있다면, 그리고 커졌다면 유가협이 지금처럼 힘들지 않을 텐데 하는 마음입니다."
문익환 목사의 존재감
문 목사의 모습 중 인상깊었던 것을 물으니, 배씨는 '젊은이들의 죽음을 대하는 문 목사의 태도'를 언급했다.
"젊은 학생들 분신 많이 할 때, 영안실에서 보면 (영정을 바라보고) 큰절을 두 번 하세요. 처음엔 깜짝 놀라서 '목사님 왜 그러세요' 이랬는데, 목사님이 '오늘은 이 사람들(열사)이 당신네 윗사람입니다' 이러시는 거예요. 손자뻘 되는 사람들에게, 종교를 뛰어넘어 절을 올린 거죠.
우리(유가협 회원)들도 분향소에 가면 목만 숙여서 인사하고 그랬어요. 그런데 목사님이 절하는 모습을 보고 배웠죠. 믿음을 뛰어넘은 모습이 존경스러웠어요."
문 목사는 박종민김세진·이동수·홍기일·박선영·김성애 등의 열사들을 자신의 시를 통해 추모했고, 장례식의 조사를 쓰고 읽기도 했다. 열사들에 대한 존경심과 안타까움이 남다른 이였던만큼, 유가족에 대한 애정도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김 이사장은 문 목사가 교도소에서 영치금을 모아 출소하면서 전달할 만큼 각별하게 유가협을 아꼈다고 강조했다.
"영치금을 모아서 저희에게 주시는데... 죄송스러웠어요. 물질적인 부분을 원해서 후원회장으로 모신 게 아니었는데, 그렇게 물질적인 도움도 주시니까 감동적이고 한편으로는 죄송스러웠습니다. 말할 수 없게 감사하죠."
이어 배씨는 유가협 활동에서 문 목사의 역할이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크다고 강조했다. 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의 유가족들이 오히려 사회적으로 탄압받는 상황에서, 문 목사는 유가협이 인정받고 활동할 수 있는 일종의 '보호막'이 됐다는 것이다.
"정권도 함부로 못하는 분이잖아요. 명망도 있으시고 위엄도 있고. 그분은 후원회장으로서 저희의 보호막이었어요. 당시에 정부는 민주화운동으로 인한 사망자들을 좌경, 용공, 빨갱이로 취급했어요. 유족들도 감시당했고요. 그런데 문 목사님이 우리를 인정하고 이끌어 나가주신 게 고마운 거예요. 다른 분들은 사실 저희를 만나기조차 꺼려하던 시절이었어요. 심지어 유가협 회원의 형제들이 '자식 죽었으면 그만이지, 가족까지 망치려고 하느냐' 그러기도 했다니까요. 그러니 목사님을 존경할 수 밖에요."
그는 목사님의 대담함에 큰 위안을 얻었다고 말했다. 유가협 회원들이 가슴에 담아둔 말들을, 문 목사님이 장소도 가리지 않고 속 시원하게 말하면서, 유가족들의 '통'도 커졌다는 것이다. 배씨는 "정신적 지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래서 문익환 목사가 세상을 떠났을 때 유가협 회원들의 상실감이 굉장히 컸다고 한다. 구술작가 송기역이 기록한 박정기(박종철 열사 아버지)씨의 이야기를 통해 당시 유가족들의 충격을 짐작할 수 있다.
"94년 1월18일 유가협 회원들이 유일하게 의지해 온 어른 문익환 목사가 일흔여섯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급서했다. 소식을 들은 박정기는 유가족들과 함께 한일병원으로 달려갔다. 모두 망연자실 주저앉아 흐느꼈다. 박정기의 입술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는 온몸을 떨다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고 통곡했다. 옆에 있던 박채영이 그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대학로에서 열린 노제엔 1만여 명의 시민이 모여 늦봄을 추모했다. 문익환은 박종철의 가묘가 있는 마석 모란공원에 잠들었다." - 2012년 4월 16일자 <한겨레> 29면 인용
유가협은 이들의 보금자리인 '한울삶'에 문 목사의 영정을 열사들과 함께 모시고 있다. 문 목사에 대한 유가협의 존경심과 신뢰를 알려주는 부분이다. 동시에 문 목사의 아내이자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공동의장이었던 박용길 장로가 유가협 회원이 됐고, 박 장로가 문익환 목사의 역할을 이어간다.
장씨는 박 장로에 대해 "민가협은 의장이었고, 유가협은 회원이셨는데 이곳저곳을 다니시면서 통일에 관한 강연이나 발언을 하시고, 어딜 가든 문 목사님이 해오던 역할을 하셨다"며 "매사 공정하고 자기보다도 민족을 생각하는 애국자였다"고 강조했다.
촛불의 시대, 민주화 운동가들을 기억하는 법
"데모 현장에서도 항상 두루마리를 입고 앞에서 리드를 하시는 목사님을 따라갔어요. 경찰이 최루탄 던지면 골목길로 도망쳤어요. 그땐 염치고 뭐고 일단 숨어야 돼요. 그러다가 잠잠해지고 다시 만나면 '또 만났네'라며 반갑게 맞아주시곤 했어요. 이번 촛불 때도 처음에는 걱정을 좀 했어요. 여기에 최루탄을 터트리면 사람들은 어디로 피할 것인가. 피하다 보면 사고도 날 거고요. 그런데 촛불이 번지면서 승리를 했잖아요. 기뻐서 울었어요. 그때도 최루탄을 안 썼으면 이한열이라도 안 죽었을 거 아니에요. 슬퍼서도 울었고요."
<1987> 이야기가 꺼냈더니 배씨는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보셨냐'고 물었더니 "아직 안 봤다"고 답했다.
"이런 영화를 한번 또 만들고 싶다고 제안이 오면 난 그때는 못 만들게 하려고요. 안 보긴 했지만 자식이 죽어가는 모습을 애미가 눈을 뜨고 보는, 그런 나 자신이 상상이 안 되는 거예요. <1987>이야기만 하면 간이 벌렁벌렁해지고 정신이 없어져요. 부끄러워요. 자식이 죽어갔는데 애미는 밥을 먹고 살까 그렇게 볼 것 같아서.
특히 장씨는 민주화운동 묘역을 제대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재 이천에 만들어진 '민주화운동 기념공원'과 묘역은 민주화운동 명예회복 및 보상 법률 등에 따라서 만든 것이지만, 다수 유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된 것이라 반쪽짜리 묘역이다. 실제로 희생자 136명 중 49명만이 안장됐다. 원래 묘역은 수유리 쪽에 조성될 예정이었으나, 주민들 반대로 무산됐다.
김 이사장도 "하루빨리 열사들을 귀한 자리에 잘 모시고 싶다. 서울권에 묘역을 재조성해주길 바란다"며 정부에 당부했다. 이에 관해 배씨도 "대통령께도 건의하려고 한다"고 밝혔다.
정권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유가협 회원들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배씨는 "이럴 때 한마디 해줄 사람이 필요하다"며 다시 문익환 목사 이야기를 꺼냈다.
"곤경에 처해있을 때 목사님이 계시면 한 말씀 해주실 수 있겠지라는 생각이 든 적이 많아서, 돌아가신 게 원망스러울 때가 많았어요. 어쨌든 이소선 어머님마저 없으니까 정말 그런 말을 해줄 사람이 없는 거예요. 그래도 오늘 이렇게 목사님에 대해 다시 한번 이야기를 하게 되니까 좋네요."
문익환 목사가 민주화운동 희생자 가족들의 가장 든든한 '빽'이었다는 사실이 실감 나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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