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동남아인들이 새로 그리는 대한민국 '과일 지도'

담양/조홍복 기자 입력 2018.04.24. 03:04 수정 2018.04.24.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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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파파야·담양 패션프루트.. 열대 과일 재배면적 5년새 3배 급증
동남아 이주여성·근로자들 주요 소비층 떠올라.. 기온 상승도 한몫

충남 부여군 세도면 청포리의 농장주 김영필(50)씨에게 최근 효자가 생겼다. 집 근처 비닐하우스에 달린 노란 열매다. 하우스에서 기르는 나무 300그루에 주렁주렁 달려있다. 열매의 주인공은 아열대 기후에서 자라는 파파야다. 하우스 내부 온도는 섭씨 29도. '선주문 후출하' 방식으로 파파야 열매는 ㎏당 1만원에 판매하고 있었다.

김씨는 "태국, 필리핀, 베트남 출신 이주 여성과 외국인 근로자가 한 번에 30㎏씩 주문한다"고 했다. 주 고객층은 달콤한 파파야 맛을 어릴 때부터 아는 이주 여성이다. 김씨는 "한 달 넘게 배에 실려 수입되는 파파야보다 훨씬 신선한 우리 파파야가 향수를 제대로 자극한 모양"이라고 말했다.

토마토 농장을 하던 김씨가 처음으로 파파야 나무 300그루를 심은 건 2016년이다. 태국 출신 귀화 아내 박혜연(46)씨가 "날씨도 따뜻하니 파파야를 키워보자"고 했다.

김씨는 수확량의 절반은 주문을 받아 배송하는 직거래 방식으로 파파야를 시장에 내놓는다.

직거래 소비자의 대부분은 동남아시아 출신 국내 거주자다. 취업이나 결혼 등을 이유로 한국에 둥지를 튼 동남아 이주 외국인이 국내산 아열대 과일 판로를 열어준 것이다.

◇부여 파파야·담양 패션프루트의 시대

열대 과일에 익숙한 동남아 이주 외국인이 국내 과일 지도를 새로 그리고 있다. 날로 늘어나는 동남아 출신들이 열대 과일 주력 소비층으로 부상한 것이다. 전통 과일이 떠난 빈자리를 아열대와 열대 과일이 점차 채우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다.

열대 과일 재배지 면적 증가는 기후 변화, 입맛 변화, 기술 변화 등이 원인으로 거론된다. 지구온난화에 따른 기후 변화는 국내 전통 과일 재배지를 갈수록 북쪽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지난 10일 통계청에서 발표한 자료를 보면 기온 상승으로 사과와 복숭아, 포도 등 주요 농작물의 주산지가 남부지방에서 충북, 강원 지역 등으로 이동했다. 과거 수입에 의존하던 바나나, 파파야, 망고, 패션프루트 등과 같은 열대·아열대 과일을 국내에서도 재배한다.

전남 담양군 금성면에서 '꿈에그린농장'을 운영하는 고재규(41)씨는 2016년 패션프루트(백향과) 재배에 나섰다. 젊은 여성 고객과 동남아 이주 외국인을 겨냥했다. 지난달 말 수확한 패션프루트는 날개 돋친 듯 팔렸다.

고씨는 "베트남, 태국 등에서 딸기처럼 즐겨 먹는 과일이 패션프루트"라며 "광주 평동산단의 동남아 출신 외국인 근로자들이 이 과일을 주로 찾아 평동 농협에 따로 납품하는데, 다른 농협에 비해 2배 더 많이 팔린다"고 말했다. 지난해 여름 30대 초반 베트남 출신 이주 여성 3명이 농장을 직접 찾아 "고향 맛이 그리워 왔다"며 각자 패션프루트 5㎏(8만원)씩을 구입했다.

조강현(37)씨는 강원도 양구에서 멜론을 재배한다. 조씨는 "이제 멜론이 수박처럼 친근해 소비가 폭발하면서 물량이 없어 못 팔 지경"이라고 말했다. 경남 하동군에서 3년째 패션프루트를 키우는 이재진(60)씨는 "처음엔 두려움이 있었는데 전국적으로 수요가 꾸준히 늘어 기대감이 크다"고 말했다.

◇기온 상승·동남아 인구 증가에 과일 지도 변화

지난 2월 말 기준 국내 거주 외국인 213만2211명 중 베트남·태국·필리핀 등 동남아권 외국인은 53만8729명(25.3%)이었다. 한국인과 결혼해 국내에 사는 결혼 이민자 15만6249명 중 동남아 출신자는 6만2373명(39.9%)에 달한다. 10명 중 4명은 동남아에서 왔다. 아열대 과일 소비 시장이 이들을 중심으로 형성되면서 재배 농가에 훈풍이 불고 있다. 국내 아열대 과일 재배 면적은 2012년 44.2㏊에서 2017년 111.3㏊로 3배쯤 넓어졌다.

유년 시절부터 열대 과일을 접한 젊은 세대가 열대 과일 소비를 주도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외국 여행과 유학 경험 등으로 국내외에서 다양한 세계 음식을 경험한 청년층과 중·장년층도 열대 과일에 빠져들고 있다.

김성철 농촌진흥청 온난화대응농업연구소 연구관은 "국내 아열대 작물 시장은 이제 시작 단계이지만 기온 상승, 다문화가정 증가, 음식 소비 경향 변화에 따라 계속 확대될 전망"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