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는 구라다] 커쇼급 예우, 류현진 5분간 단독샷만 10번

조회수 2018. 4. 23. 08:07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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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얘기의 출발은 좀 엉뚱했다. 뜬금없는 헤어 스타일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된다.

경기가 한참 뜨거웠다. 1점 차의 살 떨리는 리드였다. 어디로, 어떻게 튈 지 아무도 모르는 전개가 계속 됐다. 모두의 눈이 공 하나하나에 집중되던 7회 말 홈 팀의 공격이었다. 카메라가 갑자기 대기 타석을 비췄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체이스 어틀리가 빈 스윙을 요란하게 돌리고 있었다.

다저스 중계팀 sportsnet la의 캐스터 조 데이비스가 상황에 대한 팁을 준다. “체이스 어틀리가 류현진을 위해 타석을 준비하고 있네요.” 그렇다. 어틀리가 몸을 푼다는 말은 곧 투수가 바뀐다는 뜻이다.

이 때부터였다. 그들의 극진한 예우가 시작됐다. 이미 교체를 통보받은 선발 투수의 덕아웃 모습이 화면에 가득히 클로즈업 된다. 모자를 벗은 점퍼 차림이다.

조 데이비스 (캐스터) : 저는 그의 헤어 스타일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요. 머리 숱이 정말 많아요. 그렇지 않은가요?

오렐 허샤이저 (해설) : 그래요? 나는 머리카락에 대해서 아무 생각도 없어요. 그냥 있으면, 있나보다. 감사할 뿐이죠. (ㅋㅋㅋ)

아무렴. 그들은 알 리 없다. 머리숱? 풍성하고 우아한 꾸밈에 대해 머리카락 숫자 운운하는 것은 현상의 본질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건 아이돌 그룹이나 한류 연예인들 정도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완성시킬 수 있는 자태였다. 그 정도의 스타일링이 다저 스타디움에서, 그것도 땀에 젖은 스포츠맨에 의해 구현됐다는 게 경이로울 따름이다.

캐스터가 머리숱을 언급한 7회 중계 때 방송 화면.                                           mlb.tv 화면

이벤트의 주인공 “그를 위한 리드”

‘7회까지냐, 8회도 맡기느냐.’ 로버츠 감독은 깊게 고심했다. 결국 교체를 결심했다. 투구수, 타석이 돌아오는 문제에 대한 고려가 결합된 결정이었다. 대타를 준비시켰다(처음에는 체이스 어틀리, 나중에는 키케 에르난데스). 물론 선발 투수에게도 인사가 전해졌다. “여기까지만. 수고 많았다.”

이후 홈 팀 중계방송사인 sportsnet la의 진행은 특별했다. 마치 특집 프로그램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그 뒤로 약 5분여 시간동안이었다. 무려 10번이나 단독 샷을 잡았다. 아무 플레이도 하지 않는, 그냥 덕아웃에서 쉬고 있는 투수 한 명을 말이다. 그것도 1-0의 아슬아슬한 리드 속에서 홈 팀의 공격이 치열하게 진행중인데…

멋진 헤어 스타일이 클로즈업 되자 캐스터 조 데이비스가 말문을 열었다. “오늘밤 7이닝을 셧아웃했죠. 지난 19이닝 동안 2점만 잃은 셈이구요. 첫 등판에서는 별로 좋지 않았는데….”

곁에 있던 해설자는 전설적인 투수 출신이다. 오렐 허샤이저가 덧붙였다. “스프링 트레이닝 때는 모두들 자신 있어하죠. 그런데 시즌이 시작되면 달라지죠. 하지만 류(현진)는 그걸 입증해냈어요. 좋은 오프 스피드 피치와 로케이션을 보여줬어요. 오늘은 체인지업이 훨씬 날카로워졌네요. 커맨드도 훌륭하구요. 건강하고 자신감이 있다면 충분히 경쟁력 있다는 걸 보여준 셈이죠.”

어틀리가 준비했지만, 정작 타석에는 키케 에르난데스가 들어갔다. 카운트 1-1에서 강력한 어퍼컷 한 방이 작렬했다. 좌측 스탠드에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만세 부르는 선발 투수의 모습이 잡혔다. 캐스터가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단 한 번의 스윙으로 류(현진)를 위한 리드가 2배로 늘어났습니다.”

이 멘트에서도 가늠이 된다. 이 게임에서 승리의 주체, 그러니까 이날 이벤트의 주인공이 과연 누구인가 하는 점 말이다. (당연히 Player of the Game도 그의 차지였다.)

7회말 공격 중 카메라는 계속 류현진의 덕아웃 모습들을 클로즈업 했다.          mlb.tv 화면

커쇼의 패배로 인한 상실감 속에 치러진 경기

아시다시피 미국의 로컬 방송은 피아 구분이 뚜렷하다. sportsnet la도 마찬가지다. 다저스가, 정확하게는 다저스의 모기업인 구겐하임 파트너스가 50%의 지분을 가진 방송국이니 더 말할 것도 없다. 중계 방송은 당연히 편파적이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어제(22일)는 특별했다. 빠듯한 게임 중이었다. 와중에 유독 플레이어 개인을 집중 조명했다. 화면 꽉 차도록 클로즈업해서 부각시켰다. 5분간의 짧은 시간 동안 무려 10번이나 반복됐다. 중계진의 멘트도 그와 관련된 것에 집중했다. 물론 찬양 일변도였다. 하다 못해 머리숱까지….

이건 대기록을 작성한 현장에서나 있을 법한 집중도다. 아니면 커쇼급이나 돼야 가능한 일이다. 왜 다저스전에서 흔히 보이는 화면 말이다. 특별한 일 없이도, 커쇼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자체로 하나의 컨텐트가 완성된다. 그만큼 비중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런 방송팀이 이날은 유독 99번에 탐닉했다. 하긴, 눈이 부시긴했다. 7이닝 무실점 아닌가. 그래도 그 의미를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포괄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시간적인 소급/확대 적용이다.

맥락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일단 전날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세기의 매치업이 이뤄졌다. 사이영상 3회 수상자끼리의 맞대결이었다. 클레이튼 커쇼와 맥스 슈어저의 경기였다. 여기서 홈 팀의 에이스가 완패했다. 천사의 도시에게는 깊은 충격이었다. 월드시리즈 패배와 크기는 다르지만, 또다른 느낌의 상실감을 떠안아야 했다.

그리고 이튿날 벌어진 경기는 이런 후유증 속에 출발했다. 해설자 오렐 허샤이저는 워싱턴 내셔널스의 놀라운 적응력을 이렇게 분석했다. “왼손 투수가 상대하기 무척 까다로운 팀이예요. 좌완 상대 스윙률이 41%밖에 되지 않아요. 30개 팀 중 가장 참을성이 강했죠. 그런데 어제 커쇼에게는 달랐어요. 21번의 초구 중에 14개가 공격(스윙) 당했어요. 무려 58%나 되는 수치였죠. 오늘 류현진도 초구를 어떻게 구사하고, 카운트를 잡아나가느냐가 무척 중요할 거예요.”

‘커쇼화’ 하고 있는 5선발의 진전

목표를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 있다. 다저스 팬이라면 누구나 안다. 그 산의 위치를. 결국 가을에 만나야 할 상대는 뻔하다. 내셔널스는 강력한 장애물 중 하나다. 어쩌면 가장 오르기 힘든 곳일 지도 모른다. 리그 최강을 다투는 라인업을 갖췄기 때문이다. 바로 맥스 슈어저-스티븐 스트라스버그의 원투 펀치다.

첫번째 대결은 실패했다. 믿었던 에이스는 깊은 절망만 안겨줬다. 그런데 둘쨋날이었다. 뜻밖의 반전이 일어났다. 별로 기대하지 않던 5선발이 눈부시게 빛났다. 그렇다고 상대편(스트라스버그)이 못했던 게 아니다. 10K를 잡아내며 분전했다. 하지만 신데렐라의 활약은 그 이상이었다. 훨씬 대단했다. 현란한 볼배합과, 예리한 커맨드였다. 상대는 숨 한 번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질식했다. 완벽하게 게임을 지배했다.

7회 말의 5분간은 그랬다. 1-0의 숨가쁜 상황과는 관계 없었다. 마운드의 상대 투수는 여전히 90마일 후반대를 뿌리고 있었다. 10번째 삼진을 잡아내며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그 역시 조연에 불과했다. 정작 무대 위의 모든 스포트 라이트를 받아야 할 주인공은 따로 있었다. 홈 팀 덕아웃에서 담담히 지켜보고 있는 멋진 ‘헤어 스타일’이었다.

무려 10번의 클로즈업을 받을만했다. 과거 신계에서 군림하던 커쇼급의 대우를 받아도 전혀 어색할 게 없었다. 그만큼 찬란했던 무대였다.

백종인 / 칼럼니스트 前 일간스포츠 야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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