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균의 버치보고서]④여운형 친일행위 조사 최종보고서

박태균 | 역사학자·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2018. 4. 22.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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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여운형 친일·반역 혐의는 ‘상상’…그에 대한 명예훼손” 결론

일본인 총독들로부터도 대통령감이라는 평가를 받아온 여운형은 여러 차례 테러와 살해 위협을 당해오다가 1947년 7월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결국 암살당했다. 여운형이 암살당한 자리에 동그라미 표시가 돼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보고서 “일본에 봉사 증거 없다” 일본 총독부의 숱한 노력에도 독립과 연결 안되면 협력 안 해

여운형의 친일행위에 대한 1947년 1월11일자 최종 조사보고서는 “여운형이 비밀 요원으로서 일본 정부를 위해 봉사했거나 다른 외국 정부의 밀사로서 활동했다는 증거는 없다”는 문장으로 시작하였다. 이하 그의 친일 활동에 대한 최종 보고서에서 일본 정부 또는 총독부와의 협력에 대해 아래와 같은 결론을 내렸다.

‘여운형은 1940년 고노에 내각이 있는 동안 도쿄를 방문했고 중일전쟁을 끝내기 위해 중재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난징에 파견되어 장제스를 만난다면 만족스럽게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바로 도쿄에서 서울로 돌아왔다. 1944년 가을 고이소 내각하에서 우가키가 중국에 파견되었고 그는 여운형과 가까운 친구였다. 거기에 가는 길에 서울에 들렀을 때 여운형을 데리고 가고 싶어 했다. 그러나 여운형을 찾을 수 없었고, 우가키는 여운형 없이 상하이로 떠났다(우가키는 전쟁에 반대했기 때문에 전범재판을 받지 않았고, 1950년대 일본의 중앙 정치무대에 복귀했다).

많은 경우에 일본 총독부는 여운형을 그들과 협력할 수 있도록 만들려고 했다. 1921년 봄 여운형은 도쿄에 초대를 받았지만, 그 회의는 성과가 없었고, 여운형은 상하이로 돌아갔다. 1933년 여운형은 우가키에 의해 귀국했고, 그의 안전과 활동을 보장했다.

한국의 젊은이들을 이끌어줄 것으로 판단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의 협력을 유도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 같다.

여운형이 어떤 방식으로든 한국의 절대적 독립을 위한 그의 노력과 일치하지 않는 방식으로 일본과 협력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는 우가키와 협력을 하기는 했지만 우가키는 일본의 자유주의자로 한국의 자치를 원하고 있었던 일본인이다. 우가키의 기억으로는 여운형은 한국 독립이라는 목적을 잊은 적이 없다. 물론 반(半) 정도는 받아들인 적이 있다. 미나미가 우가키의 자유주의 정책을 이어받아 여운형의 협력을 이끌어내려고 했지만, 여운형이 그렇게 하지 않아 실망했다고 말했다. 모든 일본인 총독이 그를 반일주의자라고 했지만, 그가 폭력을 음모하지 않았고 한국인들로부터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몇몇 사건을 빼고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지 않았다.

여운형은 일본 항복 이후에 질서를 지키기 위해 일본과 협력했다. 항복 전에 엔도 니시하라와 이소자키는 법과 질서를 유지하고 일본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하여 여운형과 논의했다. 여운형은 러시아인들이 서울에 오기 전에 정치범들을 석방할 것을 제안했다. 만약 러시아인들이 들어온 이후에 이들이 집단적으로 석방된다면 여운형은 그들을 통제할 수 없었다. 일본인들은 그가 유혈사태를 막아줄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여운형은 폭력을 삼가고 평화를 지킬 것에 대한 라디오 연설을 몇 차례 했다. 일본인들은 그의 연설이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고 믿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여운형이 올바른 길로 간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운형은 일본 행정부가 생각했던 바를 따르지 않았다. 일본이 원했던 것은 평화유지위원회의 장이었고, 연합군이 올 때까지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운형은 실질적으로 정부로 여겨질 수 있는 정치적 조직을 만들었다. 이렇게 실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운형을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으로 받아들였다. 경찰국장 니시히로는 여운형에게 100만엔을 주었고, 이는 평화 유지를 위해 여운형의 위원회(건국준비위원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이러한 모든 결정이 도쿄의 지시 없이 서울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여운형이 연안이나 러시아와 접촉하는 시도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여운형을 공산주의자나 친러시아파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한국 민족운동을 대표하면서 반일주의자였다고 믿었다.’

그러면 여운형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월간 ‘국제보도’ 1947년 10월호에 게재된 조선체육회 인사들. 맨 윗줄 가운데가 전 조선체육회장 유억겸, 둘째줄 오른쪽이 잡지 발간 세 달 전 암살된 전 조선체육회장 여운형, 아랫줄 왼쪽이 일제강점기 농구선수로 활약했던 이상백 선생이다.

‘여운형은 일본 총독부의 입맛에 맞도록 현명하게 행동해왔다. 그는 스스로 일본의 지도자들과 가까운 개인적 친구로 알려지도록 했다. 그는 실제로 많은 이들과 친구였다. 그의 방법은 미국의 일반적인 보스의 앞잡이와 동일했다. 그가 도쿄에 있을 때에는 일본의 중요한 대중적 인물들과 사회적 관계를 만들었다. 그는 일본의 문화를 존중했으며 일반적으로 정치적인 얘기를 했고, 그들에게 친화적이며 사회적으로 우아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안겼다. 그는 한국에 있는 일본인들에게 전달될 도쿄 권력자들의 개인적 편지를 동원했다. 이러한 편지들은 항상 “나는 이 편지를 당신에게 전달할 나의 친구 여운형을 신뢰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도쿄 권력자들은 종종 총독부를 통해서 여운형과 소통을 유지했다. 모든 총독은 도쿄에 있는 여운형의 친구들에게 탄원과 같은 것을 보냈다. 그러한 전술을 문서화하기는 어렵지만, 그러한 형태는 분명히 부인할 수 없고, 그 효과는 엄청나게 성공적이었다. 우가키 장군이 1944년 서울에 왔을 때 여운형을 찾을 수 없었는데, 그다음 날 여운형은 아베 총독의 사무실에 나타났다. 여운형은 아베보다 20년이 위인 우가키와의 엄청난 우정을 강조했고, 아베는 혼란스러웠지만, 극히 친절할 수밖에 없었다. 여운형은 그러고 나서 경찰국장에게 스스로를 소개했고, 총독으로 하여금 그에게 전화를 해서 그의 가까운 관계임을 알리도록 요청했다. 이것이 한국어로 “감언이설”이다.

그는 일본인과의 관계에 대한 ‘전설’을 만들어냈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그에게 큰 이익을 주었다. 9개월 동안 한국에서 일했던 한 일본인 조사관은 많은 경우에 이러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1933년 한국으로의 귀환 이후 1945년까지 여운형은 일본인들로부터 심각한 탄압을 받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미군정 시대보다 일본 점령 시대에 경찰과 더 좋은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러치 장군보다도 우가키나 고이소와 더 가까웠다.

여운형은 의견이 다른 일본인들을 대하는 데 있어서 평균적인 서양의 정치 전문가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하지 않았다. 그가 1933년 귀국하자마자 우가키 총독은 여운형이 총독부를 위해 일해주기를 원했다. 지루한 토론이 계속되었다. 여운형은 자치를 원한다고 말했고, 어떻게 도울 것인가가 논의의 초점이었다. 우가키의 모든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여운형이 주장하는 지역적 자치는 완전한 독립으로 가는 하나의 단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토론 과정에서 양자는 매우 가까워졌고, 서로를 존경하게 되었다.

여운형은 한국 독립운동의 지도자로서 독립을 실현할 수 있는 합리적인 계획을 갖고 있지 못했고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 조직이 없었다. 우가키에 의하면 그는 자유로운 논객이었다. 일본 경찰은 항상 그를 감시했다. 그러나 여운형은 어떠한 사건도 일으키지 않았다. 그는 독립을 바랐지만, 합리적인 전망을 제시하지 못했다. 일본 경찰은 그가 미래에 혁명을 계획한다고 믿지 않았으며, 그의 추종자들을 ‘수동적 저항자’로 인식했다. 여운형은 단지 ‘일본인을 싫어하라, 그리고 기다려라’ 주의자로 알려졌을 뿐이다.

한국 문제에 관련된 일본인들의 마음에 여운형은 현재 한국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정치지도자이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그 혼자만이 한국을 통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운형은 공산주의를 지지하지 않지만, 공산주의자들의 지원을 받아들일 것이다.’

최종 보고서에 의하면 “조사는 처음에 여운형의 반역과 일본에 대한 협력을 찾는 데 집중”되었지만, “심문을 하면서 증언자들이 여운형의 배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판단했다. 처음에는 “증언자들이 다시 일본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여운형을 보호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고 믿었지만, “모든 이러한 혐의는 상상의 것이었으며 (여운형에 대한) 명예훼손이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조사 과정은 조사관들의 마음마저도 바꾸어 놓았다. “마음으로부터 진정한 찬사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는 “1945년의 시점에서 한국인들에게 논쟁이 될 수 없는 지도자였다”. 우가키나 고이소는 한국의 대통령으로서 여운형의 자질에 대해 20분 동안 얘기했으며, “심지어는 부통령으로서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여운형이 미군과 협조할 것이라고 믿었다. 일본인들은 만약 미국이 진정으로 독립된 한국 정부를 원한다면 여운형과 충분히 협조해야 하며, 그에게 의존해야 한다고 믿었다”.

보고서 말미엔 그의 공백에 대해 “공산주의자들에 더 이득 될 것” ‘미국 성공에 필요한 사람’ 언급

보고자는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가 ‘밑으로부터’ 남과 북에서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만 한다”고 하면서 “공산주의자들이 여운형의 공백으로부터 더 이득을 얻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에 대한 재평가를 통해 ‘미국의 성공을 위해 필요한 사람’이라는 점이 인식되어야 한다고 언급했다. 그래서 그는 ‘잘 도망다니지만 여전히 중요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친일조사 6개월 후 여운형 암살 미군정이 배후로 의심한 이승만 38선 이남 단독정부 대통령 취임 버치 문서엔 축하 내용 전혀 없어

여운형이 암살당한 혜화동 로터리를 직접 그린 버치의 메모. 메모의 밑에 정운영, 원세훈 이름이 적혀 있으나 그들은 여운형 암살 시 여운형과 동승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친일 경력 조사 후 6개월이 지난 시점인 1947년 7월19일 혜화동 로터리에서 암살당했다. 그 직후 모스크바 3상 결정도, 좌우합작위원회도 모두 좌초했다. 그리고 미군정의 요원들이 그 암살의 배후로 의심하고 있었던 사람 중 하나였던 이승만은 1년 후 38선 이남만의 단독정부의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버치 문서군에 보관되어 있는 문서 중 이승만의 대통령 취임을 환영하는 내용은 전혀 발견할 수 없다.

필자 박태균 교수

‘버치 보고서’를 발굴한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한국현대사 전문가다. 1966년생으로 서울대 국사학과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서울대 국제한국학센터 소장을 지냈다. KBS <인물현대사>,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의 자문을 맡고, CBS 라디오 <박태균의 한국사>를 진행했다. 2015년에는 경향신문 ‘광복 70주년 특별기획-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에서 40회에 걸쳐 해방 이후 한국 사회 주요 담론들을 정리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한국전쟁> <우방과 제국, 한·미관계의 두 신화> 등이 있다.

<박태균 | 역사학자·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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