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편에서 변호하다 의사에게 붙은 나쁜 변호사

류인하 기자 2018. 4. 22.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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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자신이 수임했던 의료사건 의뢰인이 또 다른 피고를 상대로 제기한 동일한 민사소송에서 피고를 대리한 변호사가 아무런 징계도 받지 않고 버젓이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 변호사는 피고측 대리를 하며 원고를 상대로 승소한 사례를 자신의 블로그에 홍보하기도 했다.

의사 출신 변호사 ㄱ씨는 뇌출혈로 숨진 고 김기석군의 가족이 병원 법인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사건을 수임해 이들을 대리해 왔다(1차 소송). ㄱ씨는 2013년 8월부터 상고심 원고패소 확정판결이 난 2014년 10월까지 2년간 이 사건 대리인으로 법원에 변호사 수임계를 제출했다. 김군의 가족은 이 사건 수임료로 ㄱ씨의 로펌에 총 1100만원을 지급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김군의 가족은 1차 소송 대법원 확정판결이 난 지 2년 만인 2016년 5월 또다시 김군을 처음 담당했던 의사와 김군이 전원(轉院)된 병원 소속 담당의 등 2명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2차 소송). 그런데 전원한 병원 소속 의사를 대리하기 위해 나온 변호사가 바로 ㄱ씨였다. ㄱ씨는 2차 소송 항소심까지 이 사건을 전담으로 맡았다.

김상민 기자

■변호사 윤리장전 22조 2항 정면 위반

변호사 윤리장전 제22조 2항은 ‘변호사는 위임사무가 종료된 경우에도 종전 사건과 실질적으로 동일하거나 본질적으로 관련된 사건에서 대립되는 당사자로부터 사건을 수임하지 아니한다’고 정하고 있다. ㄱ씨는 변호사 윤리장전을 정면으로 위반한 셈이다. 그것도 상고심까지 사건을 맡아오며 김군 가족측이 제시하는 모든 주장과 증거자료를 파악하고 있는 변호사가 의사 편에 선다는 것은 변호사 업계에서도 잘 찾아보기 힘든 ‘질 나쁜’ 수임행태에 해당한다. 김군의 가족은 1심 재판부에 서면을 통해 이 같은 사실을 알렸지만 사건은 그대로 진행됐다. 변호사 ㄱ씨는 과거 1차 소송에서 제기했던 주장을 그대로 뒤집어 2차 소송의 방어논리로 사용했다. 김군 가족은 2차 소송 항소심에서 원고패소 판결을 받고 더 이상 상고하지 않았다. ㄱ씨는 자신의 블로그에 해당 사건을 승소사례로 현재까지 홍보하고 있다.

ㄱ씨와 2차 소송 수임계약을 맺은 ㄴ대학병원 관계자는 “ㄱ변호사가 속해 있던 사무실과 3년간 법률자문 계약을 맺었다가 ㄱ변호사가 현재의 로펌으로 이동하면서 2016년 4월 1일부터 현재까지 ㄱ변호사 소속 로펌과 법률자문 계약을 맺고 있다”며 “때마침 민사소송이 들어오면서 자문 계약을 맺은 로펌 소속 ㄱ변호사에게 변호사 수임계약을 맺은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이어 “ㄱ변호사가 이전에 1차 소송 대리인이었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고 덧붙였다.

의료소송의 가장 큰 문제점은 ‘정보의 비대칭성’에 있다. 병원은 전문 의료지식을 바탕으로 환자가 병원으로 실려오는 시점부터 모든 정보를 독점한다. 그러나 환자나 그 가족은 의료사고가 발생하고 나서야 뒤늦게 정보를 수집하게 된다. 이들이 수집할 수 있는 자료는 지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사망한 환자의 유가족이 법정에 들고나올 수 있는 자료의 양이나 수준은 병원측이 제출하는 방어자료와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때문에 의료소송의 경우 변호사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전문 의료지식이 없는 유가족을 대신해 병원과 다툴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수도권 법원에서 의료전담 재판을 맡고 있는 한 부장판사는 “환자나 그 가족은 접근할 수 있는 정보가 지극히 제한적이고 의료지식이 없어 모든 것을 백지상태에서 시작하는 반면, 병원은 정보를 독점하고 있다”면서 “그런데 원고측 변론을 하며 얼마 되지 않는 정보를 전부 취득한 상황에서 설령 당해 재판이 아니더라도 원고의 반대편에서 변론을 한다는 것은 특히나 괘씸한 일에 해당한다”고 지적했다.

■서울변회 “최소한 과태료 처분 이상”

ㄱ씨는 <주간경향>과의 전화통화에서 “내가 ㄴ병원 담당의를 대리해 2차 소송을 맡을 당시에는 1차 소송을 맡았던 로펌 소속도 아니었고, 이전 로펌이 1차 소송을 맡고 있는 줄도 몰랐다”고 해명했다. 이어 “1차 소송 당시 사무실 변호사가 5명밖에 되지 않아 그냥 마구잡이로 모든 사건에 이름을 넣었던 것에 불과하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해명과 달리 ㄱ씨의 이름은 1차 소송 1심 재판이 한창 진행 중이던 2013년 8월 20일부터 ‘원고들 소송대리인’ 명단에 올라왔다. 이 명단은 심리불속행으로 마무리된 상고심 재판까지 그대로 유지된다. 즉 재판 진행 중 기존 원고측 변호사들이 ㄱ씨의 도움이 필요해 추가로 ㄱ씨의 명단을 추가한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소송대리인 명단은 수임계를 법원에 제출해야만 등재된다.

변호사 징계업무를 해왔던 전 서울지방변호사협회 한 간부는 ”보통 구성원 수가 적은 변호사사무실이 자신들의 세를 과시하기 위해 전체 구성원 명단을 다 제출하는 경우가 몇 년 전까지는 있었다”면서도 “그러나 ‘그 사건을 몰랐다’는 해명 자체는 문제가 있다”고 했다. 그는 “마구잡이로 명단을 넣더라도 적어도 담당 변호사로 이름을 넣었으면 최소한 어떤 사건인지 파악할 의무가 변호사에게 있다”면서 “또 재판이 전자소송으로 진행됐다면 ‘몰랐다’는 설명 자체도 거짓”이라고 덧붙였다.

실제 이 사건은 1·2차 소송 모두 전자소송으로 진행됐다. 전자소송으로 진행될 경우 일반소송과 달리 수임계를 낸 변호사 모두에게 양측이 제출하는 서류가 문자와 e메일로 통지된다. 서초동의 한 중견 변호사는 “전자소송으로 진행하면 문자가 빠짐없이 오기 때문에 사건을 전혀 알지 못했다는 설명은 말이 안 된다”고 말했다. 서울고법의 한 실무관은 “알리미로 문자와 이메일이 가는데 ‘준비서면이 도착했습니다’ 식의 문자가 전송되면 뷰어를 통해 해당 서류를 직접 볼 수 있다”면서 “다수의 변호사가 수임계를 다 냈더라도 ‘송달변호사’를 지정해 그쪽에서만 받도록 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변호사가 자신의 아이디(ID)로 전자소송 페이지에 들어가기만 해도 어떤 사건이 얼마나 진행되고 있는지가 전부 뜨기 때문에 그 사건을 몰랐다는 말은 이쪽 업무를 하는 사람들은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20일 대한변호사협회에 따르면 의료부문 전문분야로 등록해 영업을 하는 변호사는 전국에 57명(구 보건의료법 전문분야 4명, 신 보건의료법 전문분야 47명, 식품의약분야 6명)이다.

대한변협 관계자는 “이 같은 사건은 의뢰인의 신뢰를 배반한 것이기 때문에 굉장히 중하게 징계되고 대부분의 변호사들은 그런 경우 아무리 고액을 제시해도 이렇게까지 사건을 수임하지 않는다”면서 “서울지방변호사협회를 통해 해당 사건 의뢰인이 진정을 넣는다면 관련 사항을 철저히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서울변회 관계자는 “설령 ㄱ변호사가 ‘몰랐다’는 사정을 반영하더라도 최소한 과태료 처분 이상은 나올 것”이라고 설명했다.

<류인하 기자 ach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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