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당구계 '오랜 숙원' TV중계 시작되다

2018. 4. 22.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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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호 당구칼럼 '큐따라 바람따라'④당구대부 김문장-1
'SBS한국당구최강전' 92년 첫대회, 장성출 김정규 등 출전

[편집자주]MK빌리어드뉴스는 한국당구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겪었던 숱한 곡절과 앞으로의 숙제 등을 짚어보는 ‘박태호 당구칼럼-큐따라 바람따라’를 마련했다.

필자는 당구선수 출신으로 서울시당구연맹 회장과 대한당구연맹 전무이사를 거쳐 현재 대한당구연맹 수석부회장을 맡고 있다. 또한 각종 언론 칼럼을 통해 당구의 대중화에도 앞장서 왔다.

1990년대 초 삼풍백화점에서 열린 SBS ‘한국당구최강전’ 경기 장면. <사진제공=큐스포츠>

오늘의 한국당구를 있게한 주인공은 김문장이다. 그는 당구행정가와 기획가로 당구의 스포츠화를 위한 큰 그림을 그렸다. 또한 당시 어느누구도 엄두를 못내던 당구사업을 척척 해냈다.

1980년대 들어 한국 당구계는 점차 조직화되는 움직임을 보였다. 첫 번째가 1981년 김용석 박병문 김명석 등이 주축이 되어 서울 강남 반도당구장(대표 변기선)에서 출범한 대한당구경기연맹이다. 이를 계기로 전국대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당구경기도 이제 체육관서 합시다”

잠시 당구계를 떠났던 김문장은 1984년 당구계로 복귀, 대한당구경기연맹에 합류하려 했으나 거부당한다. 이에 그는 1985년 대한당구회란 별도 조직을 만들었다. 당시 뜻을 함께한 당구인이 임영렬 강두석 김한기 김주린 유한상 백상영 김영재 남성우 등 많은 당구인이 합류하였다.

이 무렵 현역선수들의 참여도 이어지며 한국당구의 축이 자연스레 대한당구회로 정리됐다.

김문장을 중심으로 한 대한당구회는 전에 없던 새로운 대회를 준비했다. ‘공식 만점 대회’와 ‘예술구대회’ ‘한일당구대회’ 등 많은 사업들을 추진하였으며 대한당구회를 기반으로 이듬해에 대한빌리어드란 타이틀로 두 차례의 선발전을 거쳐 프로당구대회를 추진했다.

프로당구대회는 제1회 대회가 문화체육관에서 열린 것을 비롯, 2회 대회(여의도백화점) 3회 대회(뉴코아백화점) 4회 대회(대전) 5회 대회(르네상스호텔)로 이어지면서 한국당구계에 새 바람을 일으켰다. 김문장은 5차례의 프로당구를 마무리하고 휴식에 들어갔으며 이 무렵 김영재를 중심으로 대한당구경기인협회가 한국일보 대강당에서 창립한다.

회장에 김영재씨가 추대되었고 1991년 88체육관에서 ’전국당구선수권대회‘를 개최했다. 이는 그 동안 호텔 등지에서 열렸던 당구경기의 ’체육관 시대‘ 시작을 의미한다. 물론 이전에도 체육관 대회가 있었지만, 전국당구선수권대회를 계기로 본격화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당구가 다른 종목과 같이 체육으로 인정받기 위한 첫 걸음인 셈이다 대한당구경기인협회 김영재 회장은 체육관 시합과 서울월드컵당구대회 등 각종 사업을 추진했으나 월드컵당구대회를 마치고 칩거에 들어간다

휴식중에 있던 김문장은 1991년 SBS 서울방송 개국과 함께 당구의 방송시대를 기획, 한국당구의 오랜 숙원이던 TV중계를 성사시킨다. 1991년 당구는 지금처럼 사회적으로 좋은 이미지는 아니었다. 전국체전과 학교체육 종목도 아닌 당구를 TV로 중계방송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 그 일을 김문장은 성공시켰다.

SBS ‘한국당구최강전’입상자들이 대회 관계자들과 함께 기념촬영하고 있다. 가운데 꽃다발을 든 김정규, 김석윤, 장성출의 모습이 보인다. 앞줄 오른쪽 여섯 번째가 김문장 회장. <사진제공=큐스포츠>

◆‘SBS 한국당구최강전’의 탄생

김문장은 당시 정건일 SBS스포츠국장에게 세리기술을 보여주는 등 눈물겹도록 설득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게 ‘SBS 한국당구최강전’이다. ‘한국당구최강전’이 1992년부터 시작되자 당구인들의 관심은 온통 여기에 쏠렸다.

이에 김문장 회장은 ‘한국당구최강전’에 출전할 선수를 선정하기 위해 기존 대한당구경기인협회를 배제하고 선수들과 직접 접촉했다. 이렇게 해서 장성출 김정규 김무순 김효섭 김영화 윤승록 조수형 강석봉 강문수 이상헌 고철수 유재영 조창섭 김용석 한익범 등이 ‘92-93 한국당구최강전’에 참가하게 됐다.

이에 따라 실력이 있음에도 한국당구위원회에 참여하지 못한 선수들의 불만이 쌓여갔다. 그 화살은 대한당구경기인협회로 집중됐다. 제일 고민이 많은 사람은 대한당구경기인협회회장대행을 맡고 있는 고창환 씨였다. 뚜렷한 사업이 없었던 대한당구경기인협회는 ‘SBS 한국당구최강전’이 협회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협회의 존재 자체를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고창환 회장은 고심 끝에 결단을 내린다. 한국당구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박병문 씨를 찾아가 논의했고, 두 사람은 유능한 회장을 영입하기로 의견을 모은다. 명망있는 인사를 회장으로 영입, ‘한국당구최강전’으로 인한 선수들의 동요를 잠재우겠다는 것이다. 결국 박병문씨가 추천한 인사는 박정희 대통령의 절대적 신임을 받고있었던 대령출신 이명화 씨였다. 이명화 씨는 회장 추대를 흔쾌히 수락했고, 난제해결에도 자신감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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