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혁명 50주년]② "도망쳐라 낡은 세계가 너를 뒤쫓고 있다" 68의 결말

2018. 4. 2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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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파와 주장 다양했던 학생운동진영, 구심점 잃고 두달 만에 '일상으로'
안정 희구 심리로 총선서 우파 압승..드골 1년 뒤 재신임 못받고 대통령 사임
68 인재 영입한 강력한 사회당 등장..사회 곳곳 권위주의 일소, 대학교육 개편
1968년 5월 파리의 학생시위 진압하는 프랑스 경찰 [AFP=연합뉴스 자료사진]

(파리=연합뉴스) 김용래 특파원 = 1968년 4월부터 프랑스 대도시들로 들불처럼 번져나간 변혁의 기운은 그러나 여름철이 다가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 급속도로 식기 시작했다.

5월 24일까지 프랑스의 파업자 수는 900만 명에 달했지만, 추방령이 내려진 학생운동 지도자 다니엘 콘벤디트를 보호하려는 시위에 최대 노조인 노동총동맹(CGT)이 합류를 거부하면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은 분화되기 시작한다.

5월 25일부터는 총리였던 조르주 퐁피두의 주재 아래 그르넬 협상이 시작된다. CGT와 단독협상에 나선 퐁피두는 노동자 임금을 6월 1일까지 7%, 10월까지 7∼10% 인상을 약속하고 주당 노동시간도 1∼2시간 단축한다는데 노조 지도부와 합의했지만, 현장 노동자들의 반대로 협상은 결렬됐다.

노동자들은 임금인상뿐 아니라 안정된 자리 보장, 권위주의 문화 타파, 노동자의 자주 관리를 요구하면서 계속 파업에 나섰다.

하지만 계속되는 사회의 혼란에 여론은 서서히 등을 돌리기 시작한다.

정치권의 좌파진영도 학생운동을 놓고 분열했다. 프랑스 공산당(PCF)은 학생운동을 좌익 모험주의라고 비판했고, 지식인들과 학생들로부터 공산당이 드골 정부와 공모를 한다는 비난에 휩싸였다.

5월 30일 드골은 의회 해산이라는 최후의 카드를 던진다. 우파의 정치적 거인이었던 드골이 의회를 해산하고서 자신에 대한 재신임을 호소하자 앙드레 말로, 레지스 드브레, 프랑수아 모리악 등 우파 지식인들과 드골 지지자 70만 명은 샹젤리제 거리에 운집했다.

애초부터 구심점은 없었던 다양한 분파의 학생조직들이 리더십을 잃자 학생들은 여름철을 맞아 하나둘 바캉스를 떠났다. 노동자들도 임금인상에 만족해 속속 일터로 복귀했다. 두 달간 프랑스를 뒤흔든 68혁명은 그렇게 끝나버렸다.

정치는 드골에게 다시 유리하게 돌아갔다. 좌파가 지도력 부재 속에 분열을 거듭한 가운데 무정부 상태를 두려워한 유권자들이 변혁 대신 안정을 택한 것이다. 6월 말 총선에서 드골의 우파는 전체의석의 70%를 휩쓸어 압승했다.

자신감을 되찾은 드골은 이듬해 자신의 신임과 지방 개혁안을 국민투표에 부쳤지만 부결됐고, 결국 1969년 4월 27일 대통령을 사임했다.

대선에서는 드골 정권의 총리로 68년 5월 당시 노조와 협상을 이끌었던 조르주 퐁피두가 당선됐다.

68년 5월 학생운동 당시에 퐁피두는 무질서를 평화적인 결말로 이끄는 데 큰 공헌을 했지만, 이를 질투한 드골 대통령에 의해 해임된 뒤 때를 노리다가 집권에 결국 성공했다. 드골은 68운동 2년 뒤인 1970년 고향에서 조용히 숨을 거뒀다.

두 달 간 프랑스를 전복 직전까지 내몰았던 68 학생운동은 이렇게 드골 체제의 종식으로 일단락됐다.

1968년 5월 30일 샹젤리제거리에 모인 드골 지지자들 [AFP=연합뉴스 자료사진]

◇권위주의 부정하는 흐름 공고히 자리잡아…강력한 사회당도 탄생

68 이후 프랑스에서는 많은 변화가 태동했다.

가장 큰 현상은 권위주의적인 태도의 약화다. 68을 하나의 이념으로 정의할 수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68은 전후 프랑스 정치·사회를 공고하게 지탱했던 숨 막히는 권위주의들에 저항한 운동으로 요약된다.

나치에 대항해 자유 프랑스를 이끌었던 드골은 종전 후에도 대통령보다 장군님(제네랄)이라는 별칭으로 더 유명한 프랑스의 영웅이었지만, 집권 10년이 차면서 어느덧 가부장적 권위주의의 상징이 되고 말았다.

68년 당시에는 드골로 상징되는 우파는 물론, 소련 공산당의 지도를 받던 프랑스 공산당도 교조적이고 권위주의적 태도로 인해 68 주도세력의 배척을 받았다.

68의 열기가 식고 나서는 드골식의 권위주의 정치 대신 자율과 자치에 기반을 둔 정치가 시작됐고, 의회 민주주의의 한계를 넘어선 새로운 틀을 만들려는 시도도 이어졌다.

미국 참여 민주주의, 프랑스의 자주관리, 독일의 공동결정, 이탈리아의 자치 등의 구호는 68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은 대표적인 정치 표어들이다.

강력한 중앙집권 전통이 유지된 프랑스에서 68 이후 중앙 정치인들은 지방으로 내려가 지역인들의 의견에도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다.

68의 정치적 결과물 중 가장 가시적인 것은 강력한 사회당의 탄생이다.

68년 5월 운동의 주도세력을 대거 영입해 1971년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한 프랑스 사회당은 자신들이 68운동의 정치적 이상을 구현할 정당이라고 선전했다.

사회당은 그동안 좌파가 중시해온 계급 문제에 더해 성차별, 세대갈등, 지역 발전 등을 전면에 내세웠고, 급진좌파들과 연대한 끝에 1981년에는 중도좌파의 거물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을 탄생시키기에 이른다.

1968년 프랑스 학생운동 지도부 [AFP=연합뉴스 자료사진]

◇대학교육 개편되고 여성운동 본격화…사회 각 분야 자율성 확대

68이 대학의 위기에서 출발한 만큼, 대학교육의 변화도 급격히 이뤄졌다.

법 개정으로 교수, 관료, 학생 등을 대표하는 협의체가 대학의 운영을 맡게 됐고 다양한 전공들이 도입됐다. 열악한 도서관과 기숙사 시설이 개선됐고 교수들도 대규모로 충원됐다.

대학들은 평준화됐으며 1970년 3월 개혁을 통해 파리의 국립대는 현재와 같은 13개 대학 체제로 개편된다.

새로운 대학교육의 흐름은 1969년 설립된 파리 8대학(당시 뱅센 실험대학)에서 극명히 드러난다.

정신분석, 여성학, 예술학 등 새로운 분야의 다양한 학과를 설치해 통합적 인문사회교육을 시작한 이 대학에는 미셸 푸코, 질 들뢰즈 등 당대 프랑스의 대표적인 진보 지식인들이 대거 교수로 임용됐다.

68 당시 조직되기 시작한 프랑스 여성들은 2년 뒤 여성해방운동(MLF)이라는 단체를 조직해 양성평등 논의가 본격화됐다. 이외에도 최저 임금이 35% 오르고 근로 시간이 단축됐으며, 세계화와 소비 사회의 문제점들에 눈을 뜨며 사회 각 분야에서 자율성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yonglae@yna.co.kr

※참고자료: 이성재 '68운동'(책세상·2009년), 김복래 '프랑스사'(미래엔·2005년), Henri del Pup 외 'Histoire de la France'(Milan), 일간 르몽드 등 프랑스 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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