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 인사를 건넨 '가장 아름다운' 지휘관

조남기 2018. 4. 21.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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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 인사를 건넨 '가장 아름다운' 지휘관

(베스트 일레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감독이 우리에게 손을 흔들었다. 때가 되었으니, 이제 떠나겠단다. 그 시기가 머지않았으리라 예상은 했다. 그러나 이토록 빠를 줄은 미처 몰랐다. 떠날 줄 알았음에도 막상 보내려니 씁쓸하다. 아르센 벵거 아스널 감독은 그만큼 특별한 지휘관이다. 아스널 팬에게만 국한될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이야 ‘무관의 제왕’, ‘사스널’ 같은 오명이 벵거 감독과 아스널을 괴롭히지만, 2000년대까지만 해도 아스널의 이미지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최정상에 가까웠다. 실제 정상에 오를 적도 많았다. 아스널에 최정상의 이미지를 색칠한 건 벵거 감독이었다.

이른바 ‘벵거볼’. 벵거 감독은 아름다운 축구를 주창하며 잉글랜드 생활을 꿋꿋이 이겨냈다. 부임 초기에는 질타도 받았다. 상황을 잘 모르는 이방인이 생각 없이 EPL에 덤벼든다는 박한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벵거 감독은 실력과 결과로 세간의 평가를 뒤바꿨다. 잉글랜드에 짧은 패스와 유기적 움직임과 속공을 주입했고, 시쳇말로 ‘뻥 축구’ 일변도의 분위기에서 “이런 것도 할 수 있다”라는 것을 보여줬다. ‘뷰티풀 풋볼’이 잉글랜드에 뿌리내릴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1997-1998시즌, 아스널은 벵거 감독이 부임한 두 시즌 만에 ‘더블’을 기록했다. 1970-1971시즌에 이어 클럽 역사상 두 번째 더블이었다. 벵거 감독과 함께 걷는 아스널의 걸음은 더 빨라졌다. 순풍에 돛을 단 듯, 쭉쭉 뻗어갔다. 2001-2002시즌, 아스널은 네 시즌 만에 또다시 더블을 기록했다. 그러고는 전설로 기억되는 2003-2004시즌이 왔다. 벵거 감독과 청년들은 EPL 한 시즌을 ‘무패’로 마감했다. 지금까지도 유일한 ‘EPL 무패 우승’ 기록이다. 벵거볼은 아름다웠고 강력했다.

EPL 무패 우승을 바탕으로 작성한 아스널의 리그 49경기 무패 행진 기록은 지금도 깨지지 않고 있다. 그때의 아스널 이후로 강한 클럽이 여럿 나타났지만, 이 기록만큼은 누구도 범접하지 못했다. 그 시절의 아스널보다 ‘단단한 팀’은 아직 출현하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그 단단한 팀을 설계했던 이가 벵거 감독이었음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물론 벵거 감독의 축구가 영원하지는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벵거볼의 아름다움에도 금이 갔다. 선수들의 평균 기량이 떨어지는 시기가 찾아왔고, 벵거 감독은 그런 와중에도 철학을 지키려다가 적잖이 애를 먹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벵거 감독은 간간히 업적은 남겼다. EPL 왕좌와는 멀어졌지만, 최근 다섯 시즌 간 벌어진 잉글랜드 FA컵에서 세 번이나 우승컵을 들어 올리며 벵거 감독의 축구는 여전히 저력이 있음을 증명했다. 벵거 감독은 FA컵 트로피를 일곱 개나 모은 사령탑인데, 이는 FA컵에 참여한 감독 중 최고치에 해당한다. 아스널은 벵거 감독 덕분에 잉글랜드 내에서 가장 많은 FA컵 우승 트로피(13개)를 보유한 클럽이 됐다.

벵거 감독의 업적 중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또 있다. 바로 19시즌 연속 UEFA 챔피언스리그(UCL) 진출이다. 이번 시즌은 UEFA 유로파리그(UEL)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지난 시즌까지만 해도 아스널만한 UCL 단골은 찾을 수 없었다. 대부분의 유럽 클럽들은 분명 한 번쯤은 UCL 진출선에서 넘어진다. 매 시즌 자국 리그 상위권에 들어 UCL 티켓을 거머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서다. 그러나 그 어려운 일을 벵거 감독은 19시즌 동안이나 해냈다. 19시즌 동안 UCL 32강에 참여했고, 일곱 시즌 연속으로 16강에 올랐다. 정말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지난 22년 동안 아스널과 함께하며, 벵거 감독에게는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2000년대만 해도 팬들의 찬사를 한 몸에 받던 ‘아름다운 왕’이었지만, 2010년대에는 몇 번의 우승컵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운 왕’ 대접을 받았다. 과거를 그리워하는 아스널 팬들은 어려움을 겪는 2010년대의 아스널을 쉽게 납득하지 못했다. “Wenger Out”은 납득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슬픈 외침’이었다.

사실 가장 슬펐던 이는 벵거 감독이었을 거다. 자신이 이룩한 과거를 그리워하는 팬들을 위해 최선을 결과를 내고 싶었을 테지만, 축구가 마음대로 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벵거 감독은 과거의 영광을 뒤로 하고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스타플레이어가 부족한 아스널을 일으켜보겠다며 아주 오랜 시간 외로운 싸움을 지속했다.

요 몇 년의 벵거 감독은 성공한 사령탑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지난 시즌 막판부터 플랫 3를 도입하며 한계를 넘어서려는 듯했으나, 이번 시즌에 와서 끝내 벽에 부딪혔다. 그러나 벵거 감독을 누구도 비난할 수는 없다. 삭막한 잉글랜드에 아름다움을 뿌려보겠다며 22년 동안 묵묵히 제 할 일을 해온 이 노병은 머리가 새하얘지는 세월 속에서 방향성을 잃지 않고 앞만 보고 걸었다. 어떤 외부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의 축구 스타일 못지않은 또 다른 종류의 아름다움이다. 이 남자만의 멋이다.


아르센 벵거의 시대는 이제 저문다. 2018년 4월 20일(이하 한국 시각) 아스널 팬들에게 안녕을 고했다. 자신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노라고, 그러나 아스널만큼은 언제까지나 응원을 해달라고 간곡한 부탁을 했다. 떠나는 순간에도 벵거 감독은 ‘팀의 가치’를 강조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알렉스 퍼거슨 감독을 떠나보내고 우울함을 겪었던 것처럼, 아스널 역시 오랜 시간 공허함을 느끼게 될 거다. 아스널을 사랑했고, 클럽의 황금기를 이끌었고, 앞으로도 아스널 밖에 모를 그런 남자를 떠나보내야 하니 당연한 일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휘관이 떠나가는 이 순간, 몇 경기 남지 않은 벵거 감독의 임기 속에서 피어날 아름다움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을 듬뿍 느껴 가슴 속에 고이고이 저장해두어야 한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보게 될지 모른다.


▲ 벵거 감독의 아스널 트로피 진열장

EPL(3): 1997-1998, 2001-2002, 2003-2004
FA CUP(7): 1997-1998, 2001-2002, 2002-2003, 2004-2005, 2013-2014, 2014-2015, 2016-2017
FA COMMUNITY SHIELD(7): 1998, 1999, 2002, 2004, 2014, 2015, 2017

글=조남기 기자(jonamu@soccerbest11.co.kr)
사진=ⒸgettyImages/게티이미지코리아(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아스널 홈페이지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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