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인의 예(藝)-<58>김득신 '야묘도추']병아리 물어가는 들고양이..스냅사진처럼 생생한 '봄날의 소동'
어수선한 장면을 안정감 있게 마무리
스승처럼 존경한 김홍도의 화풍 좇아
벼타작 등 서민 일상 다룬 그림 그려
정조 "화원 가운데 으뜸" 최고의 평가
기록화 백미 '화성능행도' 제작 참여
햇살 좋고 고요하던 앞마당의 평화가 깨지는 건 순식간이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등 새카만 들고양이가 병아리를 잽싸게 물어 채 갔다. 뒤뜰 살구나무가 연분홍 꽃망울을 막 터뜨릴 즈음 알에서 깬 병아리는 다섯 마리. 이런 느긋함이 영원할 것만 같던 화창한 봄날, 올망졸망 새끼들을 거느린 어미 닭은 한가롭게 모이 쪼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 망할 고양이 녀석에게 새끼 뺏기게 생겼다. 암탉이 푸드덕거리며 쫓아간다. 자식 잃은 어미에게는 고양이 아니라 호랑이도 무섭지 않다. 날지 못하는 날개를 휘저으며 뒤뚱뒤뚱 종종걸음하는 어미 닭 곁에서 형제 병아리들도 혼비백산이다. 물불 안 가리고 오직 병아리만 응시하는 어미 닭 눈에 핏발이 서 새빨갛다. “야, 이 놈! 고양이 좀 보게.” 암탉의 비명에 마루에서 자리 짜던 주인 영감이 쫓아 나와 고양이를 잡겠다며 기다란 담뱃대를 치켜든 것도 한순간이었다. 그 다급함에 자리틀은 마당에 나동그라지고 쓰고 있던 탕건까지 벗겨져 날아간다. 아뿔싸, 고양이 쫓느라 대청마루에서 떨어지는 줄도 모르는 영감님의 두 무릎이 공중에 붕 떠 있다. 베 짜는 중이었는지 맨발의 아내가 부리나케 쫓아 나와 “아이쿠 영감, 이 일을 어째” 하고 외치는데 과연 그녀가 남편을 제대로 붙들었을지는 알 길이 없다. 어미 닭은 병아리 되찾고자 여념 없고, 주인 영감은 고약한 고양이를 혼낼 생각 뿐인데 주인 아낙은 영감 다칠 게 더 걱정이다. 자식 생각 뿐인 어미 마음, 남편 살피는 아내의 지극함. 모정과 부부지정의 이 모든 사랑이 그림을 가득 채운다.
어미 닭은 두 날개를 펼치고 온몸 깃털부터 꼬리깃까지 잔뜩 곤두세우고 땅을 박차건만 도둑고양이는 여유롭다는 듯 뒤돌아보기까지 하니 더욱 얄밉다. 도망가는 고양이를 꼭짓점으로 닭과 병아리가 대각선을 이루고, 주인 영감과 아낙을 향해 또 한 축의 대각선이 이어진다. 어수선한 장면을 생동감있게 표현하면서도 안정감 있는 구도로 마무리한 작가의 기량에 무릎을 친다. 왁자지껄한 그림 속에서 나 홀로 고고한 살구나무까지도 고양이를 쫓는 이 시선의 흐름에 가세한다. 무슨 일인가 궁금해 허리 숙이고 고개 내민 옆집 아주머니 같은 나무다. 화가는 둥치에서 뻗어난 가지를 표현하면서 방향을 거꾸로, 그러니까 바깥에서 안쪽으로 붓을 치며 그렸다. 그 결과 봄눈 터뜨린 꽃가지 끄트머리까지 짙은 먹으로 생명력이 꽉 차올라있다.
난리법석의 순간을 생동감 있게 보여준 긍재(兢齋) 김득신(1754~1822)의 ‘야묘도추(野猫盜雛)’다. 봄날의 고요를 깨뜨린다는 뜻으로 미술사학자 최순우 등은 ‘파적(破寂)’이라고도 불렸던 화가의 대표작이다. 조선의 풍속화로 단원 김홍도(1745~1806 이후)와 혜원 신윤복(1758~생몰년 미상)이 양대산맥을 이루고 있으나 ‘3대 풍속화가’를 꼽으라면 단연 김득신이다. 김홍도가 그린 서민 생활이 구수하고, 신윤복이 주목한 선비문화가 상큼한 반면 김득신이 표현한 해학과 재치는 달콤쌉사래하다. 애타는 장면이건만 미소 짓고 빙긋 웃게 하는 이 ‘야묘도추’가 그렇거니와 길에서 마주친 말 탄 양반 나리를 향해 코가 땅에 닿을 듯 고개 숙여 절하는 상민 부부를 그린 ‘반상도’ 또한 그렇다. 북한의 평양조선미술박물관 소장품으로 알려진 이 그림은 말 탄 양반 나리를 향해 코가 땅바닥에 닿을 정도로 넙죽 허리 숙여 절하는 상민 부부를 담고 있다. 당시 조선의 너무도 당연한 일상 풍경을 잽싸게 그린 것인데 신분 차별의 부당함과 억울함이 패랭이 쓰고 인사하는 사내의 쳐든 엉덩이와 말 볼기짝 치며 따라오는 하인의 넉살 좋은 표정에 그만 웃음으로 무마된다. 그럼에도 돌아서 두고두고 곱씹게 되는 그림이라 긍재를 탁월한 해학미의 대가로 꼽게 한다.
단원은 배경을 과감하게 생략해 주제만 돋보이게 한 것과 달리 긍재는 주변 묘사가 꼼꼼하다. 전전긍긍할 긍(兢)자를 호에 넣은 사람이니 어찌 아니 세심했겠나 싶다. 투전판을 그린 ‘밀희투전’은 노름에 빠져든 사내들의 표정이 적나라하다. 굳이 그려넣은 방구석 개다리소반 위에 놓인 붉은 주병이 감칠맛을 더한다. 붉게 달아오른 술병 색이 투전판 사내들의 타는 마음 같다. 방 안에 요강과 침 뱉는 타구까지 가져다 둔 것을 보면 잠시 자리 뜰 겨를 없이 밤새워 빠진 것 같다. 한 방에 머리 맞대고 모여 앉았으나 네 사람의 속내는 서로 알 길 없다. 심각한 표정 짓는 안경 쓴 사람과 험악하게 힘준 그 옆 사람은 보통내기가 아닌 듯하다.
글 잘 쓰는 사람이 동일한 어휘의 반복 사용을 꺼리듯 김득신은 같은 표현을 쓰지 않으려 애썼다. ‘추수타작’에서는 벼 터는 농부를 그리며 상투머리와 댕기머리, 끈으로 이마 동여매고 흰 천으로 고깔 만들어 쓰는 식으로 모두 개성있게 그렸다. 각각의 인격에 대한 존중이었으려나. 봄 산에 몰고 나갔던 소를 데리고 돌아오는 ‘춘산귀우’에서는 소 두 마리 중 하나는 뿔을 쭉 뻗게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휘어지게 그렸다. 그러면서 소 엉덩이에 거름덩어리 붙은 것까지 그려놓은 것을 보면 김득신이 사람과 사물 하나하나에 애정을 두고 유심히 관찰한 다음 그렸음을 짐작할 수 있다. 터럭까지 정교한 표현이라면 김홍도도 뒤지지 않고 닭과 고양이 그림이라면 화폭을 뚫고 꿈틀거릴 것 같은 변상벽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김득신은 섬세하면서도 재치있는 배경 묘사에 탁월했고 날카로운 필선으로 표현한 옷 주름 등은 긍재만의 고유한 맛과 멋으로 통한다.
그나저나 병아리와 주인 영감은, 고양이는 어찌 되었을까? 무슨 일 날지 모르니 날 좋을 때 한껏 봄을 만끽해야겠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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