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람-소리꾼 장사익] "우리민족 참 대단해..평창서 평화의 발판 만들었으니까요"

우영탁 기자 입력 2018. 4. 20. 17:29 수정 2018. 4. 20.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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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25년차 늦깎이 가수
보험·과일장수 등 전전하다 마흔여섯에 인생 2막 열어
남보다 출발은 늦었지만 인생 담긴 나만의 소리 찾아
■화합의 무대에 서다
우리의 기백·용맹 보여주려 애국가 키 높이고 느린 편곡
2002년 통일축구선 아리랑 열창..노래로 하나될 때 가슴 뭉클
■가장 한국적 목소리
'우리 것' 재밌고 제대로 표현, 저 같은 예술인이 해야 할 일
고향서 소극장공연 가장 기억 나..죽기 직전까지 노래 불렀으면
소리꾼 장사익 인터뷰/권욱기자
[서울경제]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유행가는 시대와 상황을 반영한다. 추운 겨울이 끝나고 따스한 봄바람이 불어올 때가 되면 꽃망울처럼 몽글거리는 가락의 ‘벚꽃 엔딩’이 인기를 얻는 것처럼 같은 노래라도 누가 어떤 상황에서 부르는지에 따라 더 큰 감동을 안긴다.

지난 2월25일 평창동계올림픽 폐막식에서 아이들과 함께 애국가를 부른 소리꾼 장사익(68·사진)은 애국가를 우리 국민 최고의 유행가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긴 애국가를 모르는 대한민국 사람은 없을 테니까. “애국가는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노래이자 우리 국민이 다 아는 최고 유행가이지 않습니까. 전 세계의 시선이 평창으로 쏠린 올림픽 폐막식에서 우리나라를 대표해 애국가를 부를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영광스럽고 소중한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가장 한국적인 목소리’를 지녔다고 평가받는 그는 평창올림픽 폐막식 순간을 돌아보며 “영광이란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며 감회에 젖었다.

소리꾼 장사익은 올림픽이 한반도 평화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감격스러워 했다. “올림픽 개막식이 열리는 순간까지 걱정이 많았죠. 한반도를 둘러싼 대외 상황은 물론 날씨까지 불안했으니까요. 그런데 폐막식이 다가오며 ‘역시 우리나라 사람은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어요. 평화적인 화합의 계기를 만든 우리나라가 다시 한 번 놀라웠습니다.”

올림픽은 정치적 대결국면을 단숨에 뒤바꿔 꽉 막힌 한반도에 숨통을 틔워줬다고 그는 신명 난 듯 얘기를 이어갔다. “우리나라 사람은 정말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는 걸 다시 느꼈습니다. 한때 저도 국제회의 같은 것들에 대해 ‘왜 굳이 돈을 들여 저런 걸 하지’라는 생각을 했어요. 특히 이번 올림픽을 앞두고는 북한과 미국이 충돌 일보 직전까지 갔잖아요. 그런데 올림픽을 통해 꽉 막혀 있던 상황에 숨통이 터져버렸습니다. 만나면 삿대질만 하던 이들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어요. 옛날부터 올림픽 때는 전쟁을 하지 않는 전통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런 근본적인 올림픽 정신이 평창올림픽을 통해 전 세계에 퍼트려졌어요. 정치를 떠나서 말입니다.”

소리꾼 장사익 인터뷰/권욱기자
그는 이어 2002년 서울 마포구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펼쳐졌던 남북통일축구 이야기를 꺼냈다.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남과 북이 만나 친선축구를 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당시 소리꾼은 남과 북이 하나가 될 수 있는 노래, 아리랑을 열창했다.

“단지 노래 한 곡을 부른 건데 정말 뭉클했습니다. 남북한 축구가 처음 이뤄졌는데 ‘분단된 지 오래됐지만 여전히 이렇게 감정을 교류할 수 있구나’라고 느꼈습니다. 그때 참 인상이 많이 남았는데 정말 뿌듯했습니다. 남북한 화합의 장에 이렇게 설 수 있다는 게 말입니다. 북한에 가서 노래 불렀던 적도 있는데 제가 원래 목청이 좋아서 목이 잘 안 쉬는데 그때는 노래 두 곡 부르고 나니 말조차도 안 나오더라고요. 기회가 되면 평양과 북한에 또 가고 싶습니다. 감정을 교류하는 한민족이니까요.”

장사익 소리꾼은 올해 한국 나이로 70세다. 어느덧 데뷔 25년 차를 맞이했다.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는 질문에 그는 “또래 가수들은 이미 데뷔 40, 50, 60주년인데 난 그들 절반밖에 안 됐다”고 웃었다. 보험회사, 과일 장수, 카센터 등 25년간 15개의 직장을 전전하다가 남들은 가수를 접고 제2의 인생을 준비하는 46세에 본격적인 가수의 길에 들어선 그다. 그는 “오히려 늦게 데뷔해서 자신만의 소리를 찾을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밝혔다.

“저는 늦게 가는 게 오래간다고 생각하고 살아요. 간장·된장도 10년, 20년 지나면 약이라 하는 것처럼 소리도 20년, 30년 숙성하면 정말 멋진 소리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귀곡성이라고 하지요. 귀신을 울리는 소리, 외국의 재즈 가수처럼 긁으면서 올라가 컬컬하게 맺히는 소리를 좋아합니다. 소리에는 양념처럼 인생관·자연관이 스며들어 있어야 남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장사익은 올림픽 이후 애국가에 대한 사랑이 더욱더 깊어진 듯했다. 올림픽 감회가 큰 탓인지 애국가 얘기가 한참 더 이어졌다. 그는 애국가 제창을 제의받고 어떻게 애국가를 불러야 할지 한참 동안 고민했다고 한다. 여러 가지 버전을 만들어 물어보기도 했다고. 고민 끝에 그는 애국가의 음정을 3키 높이고 박자도 최대한 느리게 편곡했다. 그 이유가 궁금했다.

“애국가 가사 중에 ‘남산’ ‘푸른’ ‘기상’이 나옵니다. 그 가사야말로 우리 민족의 기백이고 용맹을 보여주는 소절이라 생각합니다. 전 세계의 선수들이 한데 모여 자신의 신체를 겨루는 자리였던 만큼 애국가 역시 기백 있고 우렁차게 기가 질리도록 불러 우리의 기백과 용맹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음악감독이 편곡한 애국가를 듣자마자 ‘선생님 3키 높아요. 다 함께 제창해야 하는 노래인데’라며 불안해했다”며 웃은 그는 템포 역시 우리나라의 자연과 4계절을 표현하기 위해 조절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자연의 호흡처럼 강의 물결, 산의 능선을 애국가의 호흡에 담아내려 했다. 그는 처음에는 반주에 북도 넣고 최대한 웅장하게 부르고 싶었다고 밝혔다.

“‘마림바 하나로는 약하지 않나’ 생각했습니다. 북도 넣고 웅장하게 만들고 싶은 욕심이 있었지요. 하지만 막상 부르고 나니 아이들과의 호흡만으로 부르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밴드나 관현악단이 있으면 편하기는 한데 막상 보컬이 묻힐 때도 많거든요. 한복을 입은 늙은 제가 태극기를 입은 아이들과 함께 애국가를 부르는 모습이 마치 우리나라의 전통과 미래를 상징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그런 게 목표였어요. 큰 행사에서 우리의 것을 재미있게, 제대로 표현하는 것이 저 같은 예술인이 해야 할 일이지요.”

소리꾼 장사익 인터뷰/권욱기자
가장 한국적인 목소리의 주인공인 소리꾼 장사익이 생각하는 최고의 무대는 어디였을까. 올림픽도, 남북축구대회도 평생 잊을 수 없지만 지난해 12월 고향인 충남 홍성군 광천읍에서 부른 무대 역시 감명 깊었다고 밝혔다. 500석도 안 되는 조그마한 극장에서의 공연이었지만 공연 내내 아버지가 생각나 기쁜 눈물을 흘렸다고 밝혔다.

“광천이 고향인데 어느 날 장날이라고 500석짜리 소극장에서 공연을 할 수 있느냐 물어보길래 알았다고 했습니다. 갈 때까지만 해도 몰랐는데 막상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에서 노래를 부르니 아버지 생각이 정말 많이 나더라고요. 아버지께서 장구를 치셨는데 그때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눈물이 절로 나는데 슬픈 눈물이 아닌 기쁜 눈물이었어요. 홍대에서의 데뷔 무대도, 일본에서 단 한 사람의 팬을 위해 노래한 것도 오래 기억에 남지만 그런 느낌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는 올해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공연에 나선다. 오는 28일에는 경북 구미에서, 다음달 18일에는 일산에서 단독공연을 가진다. 6월에는 서울 충무아트센터 단독 공연과 함께 새로운 앨범도 발매한다. 그는 앞으로도 계속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 나이가 더 들어도 힘이 빠지고 금이 간 목소리 그대로 전달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젊고 춤 잘 추고 예쁜 사람들만 노래해야 한다는 법이 있나요. 나이 먹고 죽음이 내일 앞으로 다가온 사람도 노래를 부를 수 있잖아요. 40대에 데뷔했을 때는 40대에 느꼈던 감정을 얘기하고 50대, 60대, 70대에는 또 그때의 느낌을 전달하는 게 노래라고 생각합니다. 죽기 전 힘이 다 빠진 상황에서도 있는 모습 그대로 힘없이 노래를 부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멋있는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영탁기자 tak@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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