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같은 강원도 양양군 서면에 속하지만 100리가 넘게 떨어진 갈천 증골(鄭谷) 큰집에서 한동안 더부살이를 했다. 증골은 정(鄭)씨가 사는 골짜기란 의미다. 증골로 할아버지께서 거처를 옮기시기 전에 사셨던 곳은 증골에서 고개를 하나 넘어 산비탈 오솔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가야 하는 곳이다.
집에서 건너다보이는 구룡령에 햇살이 제법 오래 비쳐들기 시작하는 정월 대보름이면 큰아버지는 겨우내 눈에 젖어 허물어지는 디딜방아 앞 봇도랑 가까운 화덕부터 손질하셨다. 진흙을 지게소쿠리에 한 짐 져다 물로 반죽해 수리하셨다. 풍구로 바람을 집어넣는 구멍도 손보고, 빨갛게 숯불을 피워올릴 화구도 말끔하게 손을 보셨다.
이렇게 손 본 화덕에 본격적으로 불을 피우고 농기구를 새로 만들거나 수리할 때면 까만 고무줄을 연결한 풍구를 돌리는 일은 내 몫이다. 납작하게 자른 나무토막을 엎어놓고 거기 앉아 풍구를 돌려야 했다. 참숯에 빨갛게 불이 이글거리며 붙고 파란 불꽃이 올라오도록 속도를 유지하며 몇 시간이고 풍구를 돌렸다.
호미며 괭이, 낫, 쇠스랑 등 1년 농사를 짓는데 필요한 농기구들은 이 작업으로 새것처럼 벼려졌다. 겨우내 장작을 마련하며 사용한 무디어진 도끼도 이때 온전한 모습으로 바뀐다. 농사일을 하시는 큰아버지는 갈천마을에서도 알아주는 대장장이기도 하셨다. 필요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몸에 익힌 솜씨였지만 작업에 필요한 집게부터 망치 등 모두 손수 만들어 사용할 정도로 솜씨가 좋으셨다.
벌겋게 달구어진 호미나 낫을 왼손에 든 집게로 잡고 모루 위에서 오른손에 든 망치로 두들긴다. 그렇게 닳고 무뎌진 농기구가 새것으로 바뀌는 과정은 신기에 가까웠다. 포탄껍질이나 잘라진 철로가 필요한 크기로 다시 나뉘고 잘려진 뒤 다양한 농기구로 만들어지는 모습은 차라리 경이로웠다.
이와 비슷한 풍경을 양양시장에서 만날 수 있다. 양양시장 한쪽엔 대장간이 있어서다. 농번기엔 주중에도 문을 열지만 한겨울에도 장날만큼은 반드시 문을 여는 대장간이다. 양양시장에 있어서가 아니라 오래전부터 대장간은 '양양대장간'이란 간판을 달고 있었다.
봄을 양양군에서 가장 빨리 느낄 수 있는 곳도 양양대장간에서다. 설 무렵부터 양양대장간에서는 다양한 농사용 낫이며 괭이, 쇠스랑, 거린대, 호미 등을 만든다. 철물점에서 1,500원~ 2,000원이면 중국산 호미를 살 수 있지만 이걸 써 본 농부는 굳이 대장간을 찾아 호미를 구입한다. 가격을 맞추려 지나치게 얇게 만든 중국산 호미는 주먹보다 조금 더 큰 돌 하나 빼지 못할 정도로 약한 탓이다.
양양대장간의 주인 김석수 대장장이는 명함에 'Yangyang Smithy'란 영문 표기가 있다. 그런데 그 흔한 대표나 사장이 아니라 직함은 대장장이다. 아, 이 명함에서 특별한 부분은 양양대장간 상호가 인쇄된 옆에 당당하게 '본점'이란 표기다. 지점이나 분점이 아니라 이곳이 양양대장간 본점이란 이야기고 이 본점의 대장장이니 부연설명 필요 없는 주인이란 이야기다.
대장간은 쇠를 불에 달구어 온갖 연장을 만드는 곳이다. 대장장이는 바로 이런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요즘에야 산소용접기를 이용해 필요한 크기로 쇠를 일정하게 잘라 원하는 형태로 가공을 용이하게 한다. 하지만 예전엔 포탄의 껍데기나 철로 등을 먼저 불에 달궈 작은 도끼와 비슷한 망치를 대고 이걸 커다란 망치로 내리쳐 끊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1970년 그때 큰아버지께서는 "요즘에야 이런 고철이라도 구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철광석을 주어다 그걸 녹여 쇳물을 내기도 했는데"라 하셨다. 양양군엔 철광석이 오래전부터 생산되던 고장이다. 큰집이 있는 갈천에도 구룡령 자락에서 철광석이 나온다. 예전 신작로 곳곳에 뒹구는 새까만 돌이 철광석이다.
이 철광석을 녹이는 작업은 아무래도 쇠를 달구는 정도의 열만으로는 불가능하겠다. 그런데 이걸 숯불로만 했다고 하니 그 고된 작업 과정이 사뭇 경이롭다. 그뿐인가. 물 하나만으로 담금질을 해 쇠의 물성을 바꾸는 과정 또한 경이롭지 않을 수 없다. 큰아버지께 궁금해서 여쭈어 본 적이 있다.
쇳조각 하나를 새빨갛게 달궈 물에 넣었다 꺼내신 뒤 집게로 모루에 올려주시더니 망치로 쳐 보라고 하셨다. 부러졌다고 해야 할지, 깨졌다고 해야 맞는지 잿빛에 가까운 무늬가 선명하게 드러난 쇳조각은 거짓말처럼 망치질 한 번에 조각났다.
너무 강하면 부러지거나 깨지고, 너무 무르면 낫은 나무를 찍어도 날이 문드러지고 호미는 휜다는 걸 그때 배웠다. 심지어 도끼도 담금질을 제대로 하지 않고는 나무를 쪼개기는커녕 쇠를 쳤을 때처럼 날이 무뎌졌다. 담금질의 중요성을 큰아버지는 이렇게 쇠를 무르게 한 상태에서 낫이나 도끼를 써 볼 수 있게 하셨다.
이런 추억을 간직한 덕에 서울에서도 광희문 앞에 있는 대장간이 낯설지 않았고, 양양시장에 대장간을 옮겨오면 좋겠단 이야기를 2002년에 제안할 수 있었다. 장터 풍경이 대부분 옷이나 먹을 거 위주로 펼쳐진다. 여기에 오래전부터 있었어도 장터가 아닌 외진 곳에 자리할 수밖에 없던 대장간을 옮기면 좋겠단 이야기를 했을 때 처음엔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 게 역력했다.
불구경이 사람을 모으고, 거기에 나름의 장단이 있는 대장간 풍경만큼 이야기가 풍성할 수 있는 조건을 지닌 것도 드물다는 이야기를 했다. 거기에 하나 더해서 뻥튀기까지 함께 시장에 터를 잡게 하면 좋겠단 이야기를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장 한 쪽에 대장간과 뻥튀기가 옮겨왔고 10년이 넘어섰다.
욕심 같으면 김홍도의 풍속화에 등장하는 대장간 풍경을 그대로 되살렸으면 싶다. 그러나 관리 자체가 어려워진다. 물론 지붕이야 따로 기둥을 세우고 얹을 수 있다. 하지만 난장에 설치할 수도 없는 일이다. 각종 집게며 다양한 종류의 망치 등 대장간이라면 반드시 있어야 될 공구들이 온전히 벽이 없는 장소에서 보존되리란 건 요원한 꿈이다.
하지만 이만큼이라도 되살려 놓았으니 양양장터를 찾았을 때 아이들에게도 이곳을 체험할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앞으로도 오랜 시간 유지되겠지만, 오래전 조상들이 어떻게 농기구를 만들어 사용했는지 배울 기회를 주는 학습의 장으로는 충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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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정덕수의 블로그 ‘한사의 문화마을’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