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에 고려왕릉이 있는 이유

김희태 입력 2018. 4. 19. 17:51 수정 2018. 4. 20.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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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작고 초라해진 강화도의 고려왕릉, 당시의 시대를 이야기하다

[오마이뉴스 김희태 기자]

우리 역사를 돌아보면 조선에 비해 고려의 비중은 높지가 않은 편이다. 이 같은 이유는 고려의 수도인 개성(개경)이 북한에 귀속되어 있어, 접근 자체가 어렵다는 점이 한계로 작용한다. 고려의 수도인 개성에 갈 수 없는 건, 문헌 사료를 제외한 고고학 등의 연구 성과의 접근이 상대적으로 어렵다는 뜻이다.
  
경기도 고양에 소재한 공양왕릉, 고려 멸망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공양왕릉은 현재 고양과 삼척 두 곳에 자리하고 있다. ⓒ김희태
그럼에도 강화도를 비롯한 경기 북부 등 일부에서 고려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고려왕릉이다. 흔히 고려왕릉이라고 하면 수도인 개성 인근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의외로 강화도에 희종의 '석릉(碩陵)', 원덕태후 유씨(아래 원덕태후)의 '곤릉(坤陵)', 고종의 '홍릉(洪陵)', 순경태후 김씨(이후 순경태후)의 '가릉(嘉陵)' 등이 있다. 능내리 석실분의 경우는 왕릉급의 고분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경기도 고양시와 강원도 삼척시에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릉이 전해지고 있다. 
강화도에 소재한 고려궁지, 대몽항쟁 기간 동안 고려의 왕궁이 있었던 곳으로, 지금은 조선시대 건물인 외규장각이 복원되어 있다. ⓒ김희태
개성을 비롯해 국내에 남아있는 고려왕릉은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관리 상태가 좋지 못하다. 왕릉이라기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초라한 편이다. 그렇지만 강화도의 고려왕릉은 무신정권과 대몽항쟁의 시대를 생각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는 장소다. 오늘은 강화도의 고려왕릉을 통해 당시의 시대를 조명하고, 왜 강화도에 고려왕릉이 조성되었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희종의 석릉이 강화도에 있는 까닭은?
  
강화도에 있는 고려왕릉 중 희종(재위 1204~1211)의 '석릉'은 가장 이른 시기의 왕릉이다. 또한 '곤릉'과 '홍릉', '가릉'과 달리 대몽항쟁 시기에 조성된 왕릉이 아니다. 석릉이 강화도에 있게 된 배경을 이해하려면 무신정권 시대의 특징을 이해해야 하는데, 희종은 당시 실권자인 최충헌(1149~1219)에 의해 폐위되어 강화도로 유배를 갔던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희종의 석릉, 무신정권 시기 최충헌의 암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하며 결국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김희태
'무신정권(武臣政權)'은 고려 의종 때 무신들의 반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던 시기를 말한다. 이때 의종(재위 1146~1170)은 폐위되고, 의종의 동생인 왕호가 왕위에 올랐는데 이가 명종(재위 1170~1197)이었다.

무신정권에서는 집권자의 의지에 따라 왕을 입맛대로 교체하는 일이 잦았다. 대표적으로 이의민을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한 최충헌의 사례를 들 수 있다. 최충헌은 집권 후 명종과 태자인 왕오를 폐위시켰다. 이후 명종의 동생인 왕민을 왕위에 올리니 이가 신종(재위 1197~1204)이다. 

석릉의 석인상, 다른 고려왕릉의 석인상과 달리 조각 수법이 조악해서 다른 곳에서 가져와서 세운 것으로 보고 있다. ⓒ김희태
희종은 신종의 맏아들로, 희종이 즉위할 당시 이미 모든 실권은 최충헌에게 있었기에, 이 시기 고려의 왕은 말 그대로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다. 겉으로는 최충헌에게 비위를 맞추며 왕위를 유지했지만,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희종은 1211년 측근을 보내어 최충헌을 궁으로 유인한 뒤 암살을 시도했다. 

그러나 암살은 실패로 끝나고, 이에 격분한 최충헌은 희종을 폐위한 데 이어 강화도로 유배를 보냈다. 그리고는 자신이 폐위시켰던 명종의 태자 왕오를 옹립하니 이가 강종(재위 1211~1213)이다. 이때 재위에 오른 강종과 원덕태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고종이니, 강화도의 고려왕릉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신정권의 이해가 필수적이다.

배면에서 바라본 석릉의 모습, 무신정권 때 집권자의 입맛에 따라 왕을 폐위했던 사례를 희종의 석릉을 통해 알 수 있다. ⓒ김희태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에 소재한 석릉은 <조선고적도보>에 사진으로 등장한 바 있다. 총 5단의 석축으로 이루어진 석릉은 1단에 돌로 쌓은 곡장과 봉분, 훼손이 심한 석인상이 하나 자리하고 있으며, 2단에는 표석과 함께 또 다른 석인상이 자리하고 있다. 

석릉의 석인상과 관련해 <강화 고려왕릉의 석물연구> 논문에 따르면, 곤릉이나 홍릉, 가릉의 석인상과 달리 조각 수법이 다른 점을 들어 다른 곳에서 있던 석인상을 석릉에 가져다 놓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석인상의 하부에서 확인된 시멘트 기초와 석릉과 관련한 기록에서 석인상이 등장한 적이 없다는 점을 근거로 제기하고 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석릉이 '부의 남쪽 21리에 있다'라는 기록을 통해 당시에도 피장자가 알려진 고려왕릉인 것을 알 수 있다.
  
강화도의 고려왕릉 중 가장 초라한 원덕태후의 곤릉
  
보통 능이라고 하면 왕과 왕비, 대비의 무덤을 이야기한다. 왕과 달리 왕비나 대비의 경우 일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치적이나 자세한 에피소드를 알기는 어렵다. 곤릉의 피장자인 원덕태후도 마찬가지인데, <고려사>에는 원덕태후와 관련한 짧은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원덕태후의 곤릉, 석릉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외형은 고종의 홍릉과 유사하다. ⓒ김희태
기록을 살펴보면 원덕태후는 본래 유씨가 아닌 왕씨 성을 가진 종실의 후예로, 신안후 왕성의 딸로 기록하고 있다. 희종이 폐위된 이후 강종이 즉위하자 '연덕궁주'로 책봉이 되었으며, 책문에는 '타고난 현숙한 자질과 옥같이 아름다운 모습을 지녔으며, 오로지 착한 마음과 온유한 행실을 지녔다'고 적고 있다. 강종과의 사이에서 고종을 낳은 원덕태후는 1239년 세상을 떠나고, 아직 대몽항쟁이 끝나지 않았던 시기였기에 곤릉은 강화도에 조성되었다.

곤릉의 경우 가는 길의 일부가 개인 사유지라 초행길이라면 다소 찾기 어렵다. 외형은 고종의 홍릉과 비슷하지만, 석물이나 봉분의 상태 등을 보면 다른 고려왕릉에 비해 상대적으로 초라한 모습이다. 현재 복원된 곤릉은 난간석이나 석물 등이 없는 모습이지만, 지난 발굴 조사를 통해 봉분이 12각 호석으로 조성된 사실과 석인상 및 석수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전면에서 바라본 곤릉의 모습, 발굴조사를 통해 석인상 4기와 석수 1기의 머리 부분이 확인되었다. ⓒ김희태
석인상의 경우 머리 부분만 4기가 수습되었고, 석수의 경우 석양의 머리가 확인되면서 곤릉에도 석인상과 석수가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조선고적도보>의 사진을 보면 곤릉의 곡장 역시 돌로 쌓은 것을 볼 수 있는데, 지금의 형태와는 차이가 난다.

고종의 홍릉, 고려의 대몽항쟁을 상징하는 장소가 되다

  
고종(재위 1213~1259)은 강종과 원덕태후의 아들로, 고려의 왕 가운데 가장 오래 재위한 왕이다. 재위 기간만 무려 45년이었지만, 당시 최씨 무신정권이 지속되고 있었기에 고종은 아무런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최씨 무신정권은 자신들의 정치적 기반이 사라질 것을 염려해 강화도로 천도하면서 고종은 대몽항쟁이 끝나는 것을 보지 못하고 강화도에서 세상을 떠났다. 

전면에서 바라본 홍릉의 모습, 1단에 봉분이 있고, 2단에 석인상 2쌍과 상석과 향로석이 설치되었다. ⓒ김희태
하지만 고종은 우리 역사에서 비중 있는 인물로 그려지는데, 이는 고종이 몽골과의 화의를 통해 대몽항쟁을 종식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의 결정은 무신정권의 힘을 빼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는 측면과 이전과 달리 몽골이 직접적으로 고려의 국토를 잠식하고 있었기에 차후 고려의 국토가 몽골의 손에 떨어질 경우 나라 자체가 멸망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홍릉에서 볼 수 있는 동자석주 2매, 봉분의 난간석에 사용된 석재로 이 같은 형태는 능내리 석실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김희태
당시 고종은 나이가 많고, 병이 들어 자신을 대신해 태자 왕정(=원종)을 몽골로 보내 입조하게 했다. 이때 우리 역사의 중요한 분기점이라고 할 수 있는 한 장면이 등장하게 되는데, 본래 태자 일행의 입조는 뜻하지 않게 뭉케 칸이 세상을 떠나면서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이후 몽골은 칸의 자리를 두고, 카라코룸의 아리크부카와 화북 지역에 있던 쿠빌라이가 서로 칸의 계승을 주장했다. 

이러한 선택의 기로에서 태자는 쿠빌라이를 찾아가 입조를 했다. 그리고 이 선택은 쿠빌라이의 정통성과 위신을 높여주는 결과를 낳게 되고, 훗날 쿠빌라이가 칸에 오르면서 위험한 도박은 성공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때의 선택으로 고려의 풍속과 국체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천운이라 할만했다.
  
1259년 고종이 세상을 떠난 뒤 홍릉에 장례를 지내게 되는데, 그 위치와 관련해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부의 서쪽 6리에 자리하고 있다'고 했다. 또한 강화도의 고려왕릉 중 아직까지 미발굴된 유일한 왕릉으로, 다른 왕릉과 달리 재실이 자리하고 있는 점도 특징이다. 

배면에서 바라본 홍릉의 전경, 홍릉을 통해 고려의 대몽항쟁 시기의 역사를 생각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공간이다. ⓒ김희태
<조선고적도보>의 사진을 보면 봉분에 난간석을 두른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때 사용된 석재인 동자석주 2매가 홍릉에 남아있다. 석인상의 경우 좌우 2쌍씩 자리하고 있는데, 총 3단으로 된 석축 가운데 1단에 봉분이 자리하고 있고, 2단에 상석과 향로석, 석인상 등이 자리하고 있다. 3단은 고려 태조의 '현릉'과 능내리 석실분의 사례로 봤을 때 정자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석실의 내부를 볼 수 있는 순경태후의 가릉
  
<고려사>에 등장하는 순경태후의 열전을 통해 순경태후가 경주 김씨 출신으로 장익공 김약선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최초 고종의 아들인 왕정(=원종)과 혼인하여 '경목현비'로 책봉이 되었다가 이후 왕정이 태자로 책봉되면서 태자비가 되었다. 한편 원종과의 사이에서 충렬왕을 낳았는데, 출산 과정에서 세상을 떠났다. 
전면에서 바라본 순경태후의 가릉, 좌우로 석인상 1쌍과 함께 능역의 뒤쪽에 석수 1쌍이 세워져 있다. ⓒ김희태
당시 개경으로 환도하기 전이라 강화도에 능역이 조성되었다. 이후 원종 때 정순왕후로 추존이 되었으며, 아들인 충렬왕 때 순경태후로 격상되었다. 열전에는 당시 원나라의 무종이 고려왕비로 추봉하면서 내린 조서가 있는데, 이때 충렬왕이 무종에게 부탁해 휘호를 내린 것을 알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가릉이 '부의 남쪽 24리에 있다'라고 했으며, 지난 2007년 가릉의 발굴조사를 통해 봉분에 8각 호석을 두른 것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능에 장명등을 설치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강화도의 고려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석실의 내부를 볼 수 있다는 점과 가릉의 뒤에 좌우로 석수 1쌍이 세워져 있다는 점도 눈여겨 볼 만하다. 
가릉의 뒤에 자리한 능내리 석실분, 왕릉급의 고분으로 추정이 되며, 능의 배치와 고려왕릉의 특징을 이해하기 위한 좋은 학습 현장이다. ⓒ김희태
한편 가릉의 뒤쪽으로 능내리 석실분이 자리하고 있는데, 봉분과 난간석, 석수를 비롯해 축대의 흔적과 정자각을 세웠을 초석의 흔적까지 확인된다. 왕릉급의 고분으로 추정이 되지만, 이미 도굴로 인해 특징적인 유물이 출토가 되지 않아 정확한 피장자는 알 수가 없다. 능내리 석실분은 고려왕릉의 묘제를 이해하는데 있어 좋은 학습 현장이라는 점에서 가릉과 함께 꼭 봐야할 장소다.

이처럼 강화도에 남겨진 고려왕릉은 단순한 문화재가 아니다. 고려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무신정권과 대몽항쟁의 시대를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다. 비록 남겨진 석릉과 곤릉, 홍릉과 가릉 등 조선왕릉에 비해 그 외형이 초라하고 볼품은 없지만, 이곳에 담긴 의미가 적지 않다는 점을 인식하고, 강화도의 고려왕릉에 대해 주목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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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네이버 블로그 김희태의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에 실린 고려왕릉 글을 재편집하여 작성한 글입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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