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대한항공, '땅콩회항' 노골적 은폐 역사..'물세례 갑질'은?

입력 2018.04.17. 16:06 수정 2018.04.19.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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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AS] 조현아 전 부사장 판결문으로 본 '오너 감싸기'
'조 부사장 직속' 여운진 상무
피해자 박창진 사무장 협박·회유
"너 회사 오래 다녀야 되잖아"
"그냥 네가 잘못했다고 그래"
강요·증거인멸교사 모두 '유죄'

[한겨레]

박창진 대한항공 전 사무장(가운데)이 17일 오후 국회 정론관에서 열린 `정의당 심상정 의원·전국공공운수노동조합 공동 기자회견'을 마치고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반면교사’.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실패를 거울삼아 가르침으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조현민 대한항공 광고담당 전무는 언니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회항’ 사건을 보면서 무엇 하나 배운 게 없어 보입니다. 이른바 ‘물세례 갑질’로 언니만큼이나 국민의 공분을 사고 있으니 말입니다.

물세례와 별개로 간부급 직원에게 “진짜 네가 뭔데!”, “아이씨”와 같은 폭언과 욕설을 내뱉는 음성 파일까지 <오마이뉴스> 보도를 통해 공개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하고 있습니다. 경찰은 조현민 전무에 대해 정식 조사에 착수하고 출국 금지를 신청했습니다. ‘오너 리스크’로 대한항공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2014년 8월20일 오전 인천 중구 운서동 그랜드 하얏트 인천 웨스트타워에서 열린 호텔 개관식에서 관계자들이 테이프 커팅을 하고 있다. 사진 왼쪽부터 조현민 대한항공 전무, 폴 라이트 총지배인, 조현아 당시 칼호텔네트워크 대표,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 오너 리스크에는 반드시 조력자 있다

‘오너 리스크’에는 반드시 조력자가 있습니다. ‘땅콩회항’ 당시 조현아 전 부사장과 함께 법정에 선 여운진 대한항공 상무가 대표적입니다. 그는 조현아 전 부사장의 폭행·강요 피해자인 박창진 사무장을 회유하고 협박한 당사자입니다. 승무원 인력관리, 기내서비스, 안전업무 등을 관장하던 당시 여운진 상무의 직속상관이 바로 조현아 전 부사장입니다.

두 사람의 관계를 짐작게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여운진 상무는 ‘땅콩회항’ 직후인 2014년 12월8일 조현아 전 부사장과 통화를 했는데요. “사태를 잘 수습하라”는 조현아 전 부사장의 질책성 지시에 그는 “지시하신 대로 수습하고 있다. 법 저촉 사항이 없도록 처리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이 대화대로 대한항공은 박창진 사무장의 입을 막는 등 사건 초기 은폐에 나섰지만 여론의 역풍만 맞았습니다.

법원의 심판도 따랐습니다. 2015년 2월12일, 1심 재판부는 박창진 사무장에 대한 강요와 증거인멸 교사 등을 인정해 여운진 상무에게 징역 8월의 실형을 선고했습니다. 그는 석 달 뒤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감형돼 풀려났지만, 유죄인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땅콩회항’의 절대적이고 일차적인 원인은 회사와 직원을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는 총수 일가의 비뚤어진 우월감입니다. 하지만 총수 일가의 지시를 비판 없이 따르는 이들도 ‘땅콩회항’이라는 비극을 만든 당사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법원 판결문에 고스란히 기록된 대한항공의 ‘부끄러운 역사’를 다시 복기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 비행기에서 쫓겨난 직후 걸려온 전화

“네가 나한테 대들어, 어따 대고 말대꾸야! 내가 세우라잖아!”

2014년 12월5일 밤 12시53분(현지시각) 뉴욕 JFK 국제공항 제1터미널 제7번 게이트. 인천국제공항으로 출발할 예정이던 대한항공 비행기 일등석에서 터져 나온 목소리입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 뜯지 않은 마카다미아 봉지를 트집 잡으면서 시작된 그의 욕설과 폭행은 20여분 동안 이어졌습니다.

조현아 전 부사장은 객실 서비스를 총괄하는 박창진 사무장의 손등을 파일철로 3~4번 내리찍었고 “무릎 꿇고 사과하라”고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여성 승무원은 조현아 전 부사장이 집어 던진 파일철에 가슴 부위를 맞았고 어깨가 밀쳐져 끌려가기도 했습니다.

조현아 전 부사장의 난동은 어이없게도 박창진 사무장이 비행기에서 내리는 거로 마무리됐습니다. 이를 두고 1심 재판부는 조현아 전 부사장이 “승객에 불과해 운항과 관련된 지시를 할 아무런 권한이 없음에도 그룹 ‘오너’로서 대한항공 최고 경영자의 장녀이자 부사장의 위세를 배경으로” 비행기 정상 운항을 방해하고 박창진 사무장 등의 업무를 방해했으며, 항공기에서 내리도록 강요했다고 인정했습니다.

박창진 사무장의 시련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박창진 사무장이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조현아 전 부사장은 한국에 있는 여운진 상무에게 휴대전화로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콩 서비스 하나 제대로 못 해서 승무원 하기시키고 비행기 delay 시켜야 하는지, 담당자 모두 각자 임무에 대한 문책할 것이니 월요일 팀장 회의 전까지 이메일로 보고하십시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아직 뉴욕에 있는 박창진 사무장에게 여운진 상무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질책이 계속됐습니다. 박창진 사무장은 잠도 자지 못하고 새벽 내내 여운진 상무에게 보낼 사건 리포트를 썼습니다. 조현아 전 부사장의 욕설, 폭언 등을 사실대로 썼습니다.

■ “너 회사 오래 다녀야지?” 강요된 경위서와 시말서

12월6일 오후 4시30분께 박창진 사무장이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여운진 상무는 곧바로 그를 대한항공 본사 사무실로 불러들였습니다. ‘조현아 전 부사장의 기내 욕설과 폭언을 외부로 발설하지 말 것.’ 이것이 여운진 상무의 요구였습니다. 심지어 사건은 ‘사무장의 업무 미숙으로 인한 것’이라고 경위서를 쓰도록 했습니다. 박창진 사무장이 직접 쓴 것도 아닙니다. 컴퓨터로 대신 작성한 경위서를 보여주면서 동의를 받는 식이었습니다. 5~6번의 반복 수정 끝에 박창진 사무장의 책임을 부각한 경위서가 완성됐습니다.

당시 박창진 사무장의 상태는 엉망이었습니다. 조현아 전 부사장의 난동 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고, 식사도 못 했기 때문입니다. 여운진 상무는 경위서를 작성할 동안 박창진 사무장이 화장실도 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어떤 처벌이라도 달게 받겠다고 써야지, 우리끼리는 네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알지만 이렇게 쓰면 윗사람이 좋아하겠어”라는 말이 뒤따랐습니다.

경위서 다음은 시말서였습니다. 박창진 사무장은 거부했습니다. 왜 써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이유였습니다. 업무 과실 등에 대한 사유를 써야 하는 시말서는 작성하는 순간 박창진 사무장의 잘못이 공식적으로 인정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여운진 상무는 “너 회사 오래 다녀야 되잖아. 정년까지 안 다닐 거야”라며 박창진 사무장에게 인사상 불이익을 암시했습니다. 박창진 사무장은 결국 시말서를 썼습니다.

이른바 '땅콩회항'으로 파문을 일으킨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 2014년 12월17일 오후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 마포구 공덕동 서울서부지방검찰청에 출석하고 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 ‘짜고치는 고스톱’ 국토부 조사실마저 동행

12월8일 새벽1시 <한겨레> 온라인 누리집에 기사 하나가 올라왔습니다. “조현아 부사장 ‘사무장 내려라’ 고함…대한항공 뉴욕공항 후진 ‘파문’”이라는 제목의 단독 기사였습니다. 기사의 반향은 대단했습니다. 8일 오전 10시, 국토교통부가 당장 사건 경위 조사 방침을 밝혔습니다.

같은 날 오후 2시, 국토부 조사를 앞두고 대한항공 본사 사무실에 여운진 상무와 박창진 사무장 등이 다시 모였습니다. 여운진 상무는 ‘국토부에 거짓 진술은 할 수 없다’는 박창진 사무장에게 “다 여기 우리 대한항공에 있다가 간 사람들이야. 아무 문제 안 돼”, “이번 일만 해결되면 챙겨 줄게”라며 회유를 시도했습니다.

여운진 상무는 조사실에도 동행했습니다. 박창진 사무장 대신 질문에 답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상황에 대해 박창진 사무장은 한 언론 인터뷰에서 “(대한항공 쪽에서) ‘국토부 조사 담당자들이 대한항공 출신이라 (국토부 조사는) 회사 측과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 말했다”고 폭로하기도 했습니다.

국토부에 제출한 확인서 작성 과정도 이틀 전 시말서 작성 때와 같았습니다. 여운진 상무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확인서를 써주지 않으면 박창진 사무장을 집에 보내주지 않을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고 합니다. 글을 제대로 쓸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좋지 않았던 박창진 사무장을 앞에 두고 또 다른 간부는 “좋게 끝내야 회사생활 편하지 않겠어요”라며 그를 압박했습니다.

그날 밤늦게 대한항공은 ‘땅콩회항’에 대한 공식 입장을 냈습니다. “승객분들께 불편을 끼쳐드려 사과드린다”며 “매뉴얼조차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변명과 거짓으로 적당히 둘러댔다는 점을 들어 조 부사장이 사무장의 자질을 문제 삼았고, 기장이 하기 조치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박창진 사무장의 입을 막았다고 자신했기에 할 수 있는 거짓말이었습니다.

■ “다 사무장을 위해서 한 일” 변명

결국 박창진 사무장의 용기 있는 폭로로 대한항공의 은폐 시도는 헛수고가 됐습니다. 법정에 선 여운진 상무는 “허위 진술을 하게 한 적 없다. 박창진 등에 대한 징계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설득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법원은 이 주장을 모두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애초 박창진 사무장의 생각과 다른 경위서와 시말서가 작성됐고 국토부 조사 역시 현실적으로 공포심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신분상 불이익을 언급하면서 박창진 사무장이 허위 진술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1심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여운진 상무는) 조현아의 욕설, 폭언 등 기내 난동행위가 항공기 램프리턴 사태의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음에도, 이를 은폐하고 대신 ‘사무장과 기장의 잘못된 판단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취지로 사건을 왜곡·축소하기로 마음먹었다”고 꼬집었습니다.

지난 3월29일,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은 칼호텔네트워크 등기이사로 경영 일선에 복귀했습니다. 그는 1심에서 항공기 안전운항 저해 폭행으로 인한 항공보안법 위반, 강요 등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습니다만,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난 바 있습니다. <매일경제> 등의 보도를 보면, 여운진 상무 역시 조현아 전 부사장 경영 복귀 직전인 3월23일 대한항공 자회사인 에어코리아 상근 고문에 선임됐습니다.

박창진 사무장 인스타그램 갈무리.

조현아 전 부사장이 경영에 복귀한 날, 박창진 사무장은 머리에 생긴 양성종양 제거 수술을 받았습니다. “지난 3년간 핵폭탄 같은 스트레스로 생겼다”는 게 그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17일 국회 정론관 기자회견 자리에서도 “조현아는 화려하게 복귀했지만 나는 아직도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고 토로했습니다.

수술을 마친 그는 지난 12일 인스타그램에 조현민 전무의 ‘물세례 갑질’에 한 마디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반면교사’했다는 주장입니다.

“(조현민 전무는 언니로부터) 하나는 배운 듯합니다. 진심이 아니더라도 빨리 덮자고 말입니다. 뉴스 나오니 사과하는 건 진정성보다 본인의 이익을 위한 거겠죠.”

이유진 기자 yj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