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스파이어] 후암동에는 오래된 마을을 가꾸는 건축가가 산다

입력 2018. 4. 17. 11:41 수정 2018. 4. 17.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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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필수 기자의 인스파이어]

“음~한 10억쯤 하겠지? 형이 보기엔 저거 얼마인 거 같아?”
 

누구나 한 번쯤, 지금껏 무심코 지나쳤던 아파트나 주택을 숫자로 평가하는 순간을 맞이한다. 그때부터 ‘우리 집’은 온 가족이 함께 지지고 볶고 생활한 공간이라는 장황한 설명 대신 ‘돈’이라는 개념으로 쉽게 설명할 수 있게 된다. 나이가 들수록 우리들의 따뜻한 보금자리는 욕망의 결정체라 불리는 부동산으로 변질된다.

그런 집을 사람 냄새 나는 이야기로 기록하는 건축가가 후암동에 터를 잡았다. 도시공감 협동조합 건축사사무소(이하 도시공감). 대학원에서 함께 공부했던 젊은 건축가들이 협동조합 형태로 설립한 건축사사무소다.

이들이 그리 대단한 작업을 하는 건 아니다. 한 줄로 요약하면 ‘후암동의 집과 사람을 기록하고 공유 공간을 만들어 사람들이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정도다.

다만, 특별하다. 집을 기록해주니 사람들이 집과 동네에 대한 애정을 다시 갖게 됐다고 고마워했다. 주방과 서재를 만드니 사람들이 모이고 추억과 이야기가 쌓이기 시작했다. 자꾸만 희미해지고 사라져만 가는 ‘우리 집’과 ‘우리 동네’. 도시공감은 후암동에서 작은 변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짓고 나면 그만’인 건축의 개념에서 한발 비켜나 ‘우리만의 건축’을 실현해나가는 도시공감. 창립멤버 중 한 명인 이준형 실장을 만났다.

후암동 전경. 후암동에는 아파트부터 다세대, 다가구 주택 등 다양한 주택이 함께 자리잡고 있다.

#. “대학원 나와서 회사 그만두고 약간 노는 애”

이 실장은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뒤 취직 대신 대학원을 택했다. 주변엔 번듯한 건설회사나 건축사 사무소를 다니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대학원을 진학한 이유는 도시재생이라는 ‘다른 건축’을 공부해보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대중들에게 도시재생이라는 개념마저도 생소했던 시기였다.

대학원 졸업 후에는 생계를 위해 일반 건축사 사무소에서 일했다. 모니터 속 구글 지도를 보며 부지를 살펴보기도 했다. 사람 냄새 없는 페이퍼 건축을 하면서 깨달았다. “이곳에선 내가 배운 걸 실현할 수 없겠다”고.

퇴사 후 도시재생을 꿈꿨던 친구 5명이 출자금 200만원을 모아 협동조합을 설립했다. 세 명은 생업이 따로 있었다. 남은 두 명은 일거리를 구해야 했다. 이 실장은 두 명 중 한 명이었다.

200만원은 창업 비용으로 택도 없었다. 일단 사무실이 없다. 손에 쥔 건 노트북이 다다. 어머니는 “쟤는 대학원 나와서 회사 다니다 그만두고 약간 노는 애”라고 했다. 사실상 백수 취급당했다. 그래도 여러 걱정에 밤잠 설치지 않았다. 자신들이 추구하는 건축이 필요한 공간, 사람이 있다고 믿었다. 

도시공감 식구들. 도시공감은 이준형 실장(왼쪽에서 3번째)을 포함한 5명의 친구들이 협동조합 형태로 설립한 건축사사무소다.


공감(함께 느끼고), 공유(함께 나누고), 공진(함께 나아가다). 도시공감의 신조다. 도시의 공감을 꿈꾸고 다른 건축가들이 보지 않는 이면을 들춰 보겠다는 신념으로 시작했다.

#. 도시재생의 시작과 끝은 가내 수공업

창업 당시 운 좋게도 서울시를 비롯한 대도시 지자체가 도시재생 사업에 관심이 많았다. 신도시 위주의 확장 일변도에서 소외된 구도시를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도시공감은 2015년에는 구로구가 추진하는 ‘가리봉동 주거환경 관리사업’에 힘을 보탰고 2016년과 2017년에는 종로구와 협업해 세종마을(서촌)과 대학로에 ‘장애물 없는 마을’을 조성했다.

도시공감이 두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실혈을 기울인 건 가내 수공업이었다. 휠체어와 유모차가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마을, 즉 ‘장애물 없는 마을’을 완성하려면 주민과 가게 사장님들의 협조가 절실했다. 책상에 둘러앉아 탁상공론을 하기보단 한 손에는 곱게 포장한 사탕을, 다른 한 손에는 설문지를 들고 거리로 나섰다. 더운 여름날 거리의 사람들을 만나 사랑을 건내며 프로젝트를 설명했고 그들의 이야기를 취재했다. 그 과정 속에서 하나둘씩 가게의 입구 문턱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도시공감이 가내수공업에 집중하는 모습. 사람들에게 사탕을 건내거나 게시판을 만들어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한다.


저층주거지 환경 개선이 목적인 ‘가리봉동 주거환경 관리사업’도 방식은 같았다. 마을 어귀에 게시판을 만들었고 사랑방을 조성했다. 다가구ㆍ다세대 주택이 밀집해 자못 을씨년스러운 동네에 사랑방이 생기자,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마음속 숨겨놓았던 여러 생각이 사랑방에서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그 생각들은 자연스레 환경 개선 방안에 접목됐다. 전문가라는 알량한 자부심으로 마을을 섣불리 진단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건 우리가 하려는 건축이 아니거든요. 결론을 정하고 접근하기보다는 그곳에 사는 사람의 생각이 중요해요. 결과물을 보면 웃길 수 있죠. 너무 사소한 변화일 수도 있거든요. 하지만, 과정은 중요해요. 사람들과 함께 울고 웃고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을 통해 얻은 결과물과 그렇지 않은 결과물은 겉보기에는 비슷할지 모르지만, 지속성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고 믿어요”

#. 골목골목 오래된 집과 후암가록

2016년 들어 도시공감은 후암동에 새 보금자리를 틀었다. 이 실장은 “골목골목 손때 묻은 거리가 좋았고 오래된 집들이 많아서 좋았다”고 담백하게 말했다. 도시공감은 여기서 마을을 따뜻하게 만들 수 있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후암동의 오래된 집을 기록하는 작업인 후암가록(厚巖家錄)이 첫 번째였다. 언제 어떻게 사라져도 아무도 관심 갖지 않지만, 집주인에겐 많은 추억을 안긴 집이 우선 대상자였다. 실측한 자료를 바탕으로 도면을 제작해 액자 형태로 만들어 하나는 집 내부에, 하나는 집 밖에 문패처럼 걸어두었다.

“사람들에게 ‘우리 집’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는 계기를 제공한다는 점이 좋은 것 같아요. 액자 속 도면을 보며 다시 한번 느끼는 거에요. “아, 우리 집이 도면으로 보니까 이렇게 생겼구나.” 살면서 잊고 지냈던 집에 대한 애정을 다시금 환기시키는 거죠.” 

집 그림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는 후암가록 의뢰자(왼쪽).


도시공감은 작업 대가를 받지 않는다.“저희가 이 일을 돈을 벌려고 하진 않아요. 비록 지금까지 12집밖에 하지 못했지만, 저희들이 힘이 닿는 한 이 프로젝트를 계속하고 싶어요. 기록한 집이 50집, 100집으로 늘어나면 그 자체가 후암동의 집에 대한 역사, 이야기를 보여주는 자료가 될 겁니다. 이런 작업이 10년, 20년 이어지면 마을에도 변화가 있지 않을까요?”
도시공감은 지금도 후암동 주민들에게 의뢰를 받고 있다.

#. 열린 주방과 서재가 있는 후암동

곧이어 ‘방 있읍니다’ 프로젝트도 가동했다. 주거에서 소홀해졌거나 없어진 서재와 부엌이라는 공간을 마을에서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방값 비싼 서울에서 편하게 책보고 요리하는 장소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후암주방’과 ‘후암서재’를 만들었다. 이 또한 영리목적이 아닌 만큼 최소한의 유지비만을 받아 운영하고 있다.

후암주방은 휴가 나온 군인이 여자 친구를 위해 요리를 했던 공간이었고, 일 년에 한두번 모이는 취준생들이 눈치 안 보고 파스타를 만들어 먹는 공간이 됐다. 식탁 옆 냉장고에는 요리하고 남은 재료들이 다음 손님들을 기다리곤 했다. 서로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간접적으로나마 음식을 나누게 됐다. 

후암주방 내외부


은은한 나무 냄새 속에서 커피와 사색이 필요한 사람들은 후암서재를 찾았다. 마을 주민들은 책을 읽으러 서재를 찾다가, 다음 사람을 위해 책을 기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서재에는 주민들의 손때 묻은 책들이 한 권 두 권 쌓이고 있다.

“공유공간 형태로 이런 곳이 마을에서 생기면 마을이라는 게 좀 더 내가 사는 동네 같이 느껴질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놀라운 건 대부분 ‘이런 공간을 만들어줘서 고맙다. 아주 잘 썼다’고 하세요. 같이 요리를 해먹고 오순도순 모여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경험. 거기에 대해서 고마움을 느끼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후암서재 내외부. 연필(오른쪽)은 이용자가 서재에 기증한 물품 중 하나다.


이 실장은 서재와 주방을 만들면서 건축가의 역할은 무엇인가에 대해 더 고민하게 됐다고 한다.

#. 우리의 건축은 여전히 거칠다.

우리의 건축은 고도성장기 한국의 모습을 고스란히 빼다 닮았다. 낡으면 부수고 더러우면 치운다. 거기다 재생의 개념이 정착된 역사도 너무나 짧다. 그래서 우리는 오래된 집 특유의 콤콤한 냄새 대신 아파트 페인트 냄새에 더 익숙하다.

그런 건축이 필요한 때가 있었다. 다만, 이제는 앞만 보고 함께 달리던 시대를 지나 뒤처지는 사람을 기다려주거나 뒤에서 밀어줘야 하는 시기가 됐다. 건축도 그래야 하는 때가 왔을 뿐이다.

마을을 기반으로 한 도시재생을 꿈꾸는 그에게 ‘집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라고 물었다. 

후암동을 돌아다니며 사색에 잠긴 이준형 실장


“대부분 아파트라는 걸 동경하고 좋아하는데 잘 들여다보면 주거, 집은 다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집은 크게 보면 정치고 경제거든요. 아파트에 들어가고 싶지만, 경제적으로나 여러 가지 여건들 때문에 아파트가 아닌 다세대ㆍ다가구를 선택할 수도 있잖아요. 그런 측면에서 보면 낡은 건 바꿔야 하고 아파트로 바뀌어야 한다는 인식보다는 한 동네에서 집이라는 것은 아파트도 있고 다세대도 있고 조금 낡았지만 작고 오래된 집도 있어야 한다는 다양성의 측면을 주목해야 한다고 봐요. 여러 종류의 집들이 마을 안에서 공존해야 건강하다고 생각해요”

essential@heraldcorp.com

헤럴드의 콘텐츠 벤처 <인스파이어ㆍINSPIRE>가 시작됩니다. 영어로 ‘영감(靈感)을 불러일으키다’라는 뜻의 인스파이어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가치있는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에게 영감을 전달하고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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