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장은주의 정치시평]진보, 왜 자유민주주의를 두려워하나

장은주 | 와이즈유(영산대) 교수·철학 입력 2018.04.16.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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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한국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가진 몇 안되는 비서구 국가들 중 하나다. 비록 아직 여러모로 부족하기는 해도 충분히 자랑스러워할 만하다. 그렇지만 이 자유민주주의라는 개념이 한국만큼 어처구니없는 방식으로 오용되고 있는 나라도 없는 듯하다. 정치권과 공론장에서 이 개념이 사용되는 모습을 보노라면 무슨 블랙코미디 같다. 약속했던 개헌 논의를 이런저런 핑계로 회피해 오던 자유한국당은 대통령이 개헌안을 발의하자 ‘사회주의’ 개헌안에 맞서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겠다고 요란을 떨고, 온갖 추악한 비리로 구속된 이명박 전 대통령은 자신에 대한 사법적 징치가 자유민주주의를 와해시키려는 정치공작이라고 선동한다.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이해에 따르면, 자유민주주의란 그 핵심에서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인정하고 보장하며 법의 지배를 원리로 하는 민주적 정치체제다. 우리나라에서 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1987년 민주화 이후 비로소 불완전하나마 꽃피기 시작했다. 그러나 군부독재에 뿌리를 둔 지금의 한국당 세력은 민주화 이후 늘 우리 정치체제의 자유민주주의적 성격을 부정하거나 축소하는 데 골몰해 왔다. 특히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 그랬다. 끊임없이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위협하는 국가보안법의 논리를 들이대며 민주주의를 일그러트렸고, 용산참사, 국정원 댓글 공작, 역사교과서 국정화, 블랙리스트 작성 등 하나같이 국민의 기본권과 존엄성을 짓밟는 정치를 일삼았았다. 최근 한국당이 지배하는 충남도의회는 인권조례를 폐기하는 정치적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겠단다.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이런 적반하장이야말로 우리 사회에 숱한 적폐를 낳았던 박정희 패러다임의 정치적 핵심 특성이다. 우리 헌법에 처음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문구가 새겨진 것은 유신헌법에서였다.

애초 이 문구는 독일 기본법(헌법)이 나치 같은 전체주의 세력으로부터 민주주의를 방어한다는 차원에서 독일의 항구적이고 기본적인 정치적 토대와 원리를 나타내려 도입한 “자유롭고(free) 민주적인 기본질서”라는 표현에 뿌리를 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우리나라에서 흔히 이해하듯 사유재산권 보호에 초점을 둔 자유주의적(liberal) 민주주의가 아니고,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가치를 중심에 둔 민주적 법치질서를 의미한다. 그런데도 유신헌법 정초자들은 그 기본 정신을 정반대로 뒤집고 표현을 살짝 비틀어 그것이 박정희의 종신 집권을 보장한 독재 체제를 의미하도록 만들고선 자유민주주의를 지킨다며 노래를 불러왔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이 거대한 정치적 사기에 놀아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블랙코미디를 더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는 이 개념에 대한 우리 진보개혁 세력의 태도다. 좁은 의미의 진보진영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진보적 자유주의’를 추구한다는 민주당 계열에서도 무슨 이유인지 이 개념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 너무 오래 색깔론에 시달려서일까? 이념적 정체성이 진짜 불분명해서일까? 일각에서는 아예 우리 헌법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규정에서 ‘자유’를 빼려는 어설픈 시도를 하다 더 심한 이념 공세의 빌미를 주기도 했다. 그러면서 결국 자유민주주의라는 개념과 가치가 보수진영의 전유물이 되도록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는, 단순히 특정 정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하나의 정치체제로서 근대 이후 전 세계에서 민주공화국이 발전해 온 정치 동학의 어떤 필연적 결과물로 이해되어야 한다. 모든 시민의 평등한 존엄성을 실현하려는 열망과 실천이 기본권의 확대로 이어지고, 그것이 다시 시민들의 민주적 실천의 가능성과 공간을 더 굳건히 하는 방식으로 발전해 온 민주공화국의 보편적 형식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다. 굳이 특정한 이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나라 민주화의 역사, 특히 지난 촛불혁명만을 잘 반추해 보면 그러한 과정의 필연성과 의미를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진보는 자유민주주의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아니, 다름 아닌 진보야말로 자유민주주의의 진정한 옹호자를 상징할 수 있어야 한다.

촛불혁명은 사기꾼들이 찬탈했던 자유민주주의를 구해내었지만, 아직은 상처투성이다. 지금 우리 눈앞에 성큼 다가와 있는 한반도의 봄은 분단체제의 한계를 극복하고 이 땅에 비로소 온전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세우는 게 가능하리라는 희망을 갖게 하고 있다. 그러나 그 희망을 실현하려면 먼저 툭하면 철 지난 색깔론을 펴는 보수진영의 엉터리 공세부터 단호히 물리칠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자유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말이다.

<장은주 | 와이즈유(영산대) 교수·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