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길 칼럼] '일본 패싱'은 안 된다

2018. 4. 16.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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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일본은 북한과의 외교 정상화 및 경제적 지원에서 미국보다도 실용적인 역할을 할 몫이 있다.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힘과 의지를 ‘인지’하는 것이 한반도 평화를 향한 첫걸음이다.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내세운 ‘정명가도’(명을 정벌하려고 하니 조선은 길을 내라)는 한국에서는 허풍으로 간주된다. 허풍이 아니었다. 당시 일본은 전국시대의 전투로 단련된 정규군 20만명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략했고, 일본 본토에도 13만명의 예비 병력이 있었다.

임진왜란 발발 50여년 뒤 명을 붕괴시킨 여진족의 청 병력이 14만명이었다. 청에 투항해 협력한 명의 장수 오삼계의 병력을 합쳐도 18만명이었다. 이를 고려하면, 당시 도요토미의 왜군이 명을 침략할 전력을 충분히 갖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명은 한반도에서 파죽지세로 북상하는 왜군을 저지하려고 임진왜란에 참전할 수밖에 없었다.

임진왜란 이전까지 한반도는 중국 중원을 놓고 겨룬 대륙세력들 패권 싸움의 종속변수였다. 하지만 임진왜란을 계기로 한반도는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해양세력과 남하하려는 대륙세력 사이의 각축장으로 변해갔다. 임진왜란 100년 전부터 세계적 진출을 시작한 유럽세력들의 서세동점은 일본을 아시아의 해양세력으로 진화시키는 충격을 줬다.

미국의 일부 동양사학자들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인구가 3200만명인 데 비해, 조선은 500만명 이하로까지 추정한다. 중세 이래 일본은 한반도 인구의 1.5~2배를 유지해온 게 사실이다. 국력의 잠재력이 우리에 비해 그만큼 크다는 의미다.

이런 힘을 가진 일본은 그 후 한반도 운명을 결정하는 상수가 됐다. 한반도 분단 역시 그 원형은 임진왜란에서 나왔다. 처음에 수세였던 명이 대동강변 분할선을 제안했고, 나중에 도요토미가 조선 남부 4도 할양을 제안했다. 일본의 표현으로 ‘조선 할지 전쟁’이고, 명의 표현으로는 ‘번리지전’(藩籬之戰·울타리 방어전)이었다.

1890년 일본의 3대 총리로 취임한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일본의 존망이 관계되는 ‘이익선’에 한반도를 포함시켰다. 일본은 1930년대 “만몽은 우리나라의 생명선이다”라고 주장했다. 두만강변의 훈춘에서 현재의 몽골까지 그은 직선의 남쪽 지역을 자신들의 사활적인 이해 지역으로 설정했다. 이익선이 ‘주권선’으로 격상·확장된 것이다. 일본이 이익선과 주권선을 확장하면서 청일전쟁, 러일전쟁, 한반도 식민지화,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이 벌어졌다.

한반도의 분단과 북핵 위기는 남북한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주변 4대 열강의 역관계가 빚은 것이다. 지금도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힘과 의지는 현실이다. 일본의 아베 신조 정권은 북핵 위기를 국내 정치에 이용했다. 북핵 위기를 고조시켜 두번의 총선에서 대승해 집권을 이어갔다. 북한 압박을 정권의 기조로 삼다가, 평창겨울올림픽 이후 한반도에 몰아친 화해 분위기에 당황하고 있다. 남북, 북-미, 북-중 정상회담 등 한반도 정세가 급변하는데 일본만 왕따당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일본을 고소해하고, 차제에 일본을 한반도 문제에서 배제해야 한다는 ‘일본 패싱’ 목소리가 나온다.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오히려 일본을 한반도 문제 해결의 건설적 동반자로 순치시켜야 할 절호의 기회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일본에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겠다”고 말했다가 외환위기 때 일본의 돈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국내정치 곤란을 타개하려고 독도를 전격 방문했다가 일본의 반격으로 독도 문제에서 한국의 입지는 악화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위안부 문제를 이유로 일본을 쳐다보지도 않다가 최악의 합의를 해주는 처지로 몰렸다. 일본을 우습게 보다가 당한 것이다.

지금 아베 정권은 안으로는 각종 스캔들로 정권 낙마 위기이고, 밖으로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정부로부터 무역압박 뒤통수를 맞고, 동북아 정세 진전에서는 소외되고 있다. 이럴 때 우리가 취약한 아베 정권에 대한 레버리지를 키울 수 있다. 이럴 때일수록 문재인 정부는 5월 한-중-일 정상회담 등에서 자존심 있게 일본을 배려해야 한다.

한국이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의 운전석에 앉으려면 주변 4대 열강의 합의와 보장이 필수다. 특히 일본은 북한과의 외교 정상화 및 경제적 지원에서 미국보다 더 실용적인 역할을 할 몫이 있다.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힘과 의지를 ‘인지’하는 것이 한반도 평화를 향한 첫걸음이다. 류성룡이 쓴 <징비록>은 신숙주가 죽을 때 성종이 유언이 있는가 묻자 “원컨대 일본과 실화(불화)하지 마옵소서”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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