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Why] "김정은 옆 아이린, 이게 다 김여정 연출"

이혜운 기자 2018. 4. 14.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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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운 기자의 살롱]
천재 탈북 피아니스트 김철웅이 본 서울 공연과 평양 공연
지도자가 박수치는 노래는 다 불러도 돼, 보위부도 못 잡아가
탈북 피아니스트 김철웅은 피아노를 보자 눈빛이 변했다. 지난 10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로비. 인터뷰를 마치고 사진 촬영을 위해 피아노 앞으로 이동하자 즉석에서 쇼팽 녹턴 20번을 연주했다. 그는 “내게 ‘통일이 언제 되나요?’라는 질문 대신 ‘어떤 작곡가를 가장 좋아하나요?’라고 묻는 시대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박상훈 기자


#1. "우린 벽 앞에 서 있었어. 수많은 총알이 우리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던 것도. (…) 우리는 영웅이 되는 거지."

1987년 여름 서베를린 의사당 앞 야외 광장. 록가수 데이비드 보위가 동·서독으로 헤어져 있던 연인에게서 영감을 받은 노래 '히어로스(Heroes)'를 부르자 관객들은 눈물을 흘리며 따라 불렀다. 그때 인근에 있던 베를린 장벽으로 수천 명의 동독 청년들이 올라와 보위의 콘서트를 구경했다. 당황한 동독 당국자들이 물대포로 강제 진압했지만, 그 열기를 식힐 수 없었다. 이를 계기로 동독 시위는 시작됐고, 2년 뒤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다.

#2. "자본주의 음악(록)이 소련 청년들의 머리를 병들게 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생전에 이 같은 말을 종종 했다. 그는 소련이 붕괴한 이유가 고려인 3세 빅토르 최가 리더로 있던 밴드 '키노'가 부른 저항적인 록 음악이 젊은이들을 변화시켰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실제로 빅토르 최가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한 뒤 소련 청년들은 혼란에 휩싸였다. 그로부터 1년 뒤 소련은 무너졌다.

올해 2월 서울에서 열린 북측 공연과 4월 평양에서 열린 남측 공연은 훗날 통일이 됐을 때 어떤 순간으로 기록될까.

'천재 탈북 피아니스트'로 불리는 김철웅(44) 서울교대 연구교수는 평양음악무용대학과 러시아 차이콥스키 음악원을 졸업하고 평양국립교향악단에서 최연소 수석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다 2001년에 탈북했다. 짝사랑했던 장성택 노동당 행정부장의 조카딸 장미영에게 프랑스 팝 피아니스트 리처드 클레이더만의 '가을의 속삭임(A comme amour)'을 연주하다 누군가의 밀고로 국가안전보위부에 끌려가 고문을 받은 것이 계기였다.

김 교수는 윤범주 삼지연관현악단 지휘자와는 죽마고우, 현송월 삼지연관현악단장과는 1년 선·후배 사이다. 지난 2월 국립극장 공연에 초청받아 무대 앞에서 "범주야"라고 불러 서로 눈이 마주쳤다. 북에서 열린 '봄이 온다' 공연 후 그를 만났다.

세련된 김정은식 '음악 정치'

―'봄이 온다' 첫날 공연에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참석했습니다.

"많은 사람은 이틀 뒤의 합동 공연을 관람할 것이라고 예측했는데, 전 처음부터 첫날이라고 봤어요. 1일 공연한 '동평양대극장'은 서울로 치면 '예술의 전당' 같은 곳. 음향 시설은 좋은데 조명이 좀 어두워요. 클래식 공연에 적당해요. 뉴욕필하모니도 여기서 공연했죠. 김정은이 앉을 수 있게 세팅된 곳이에요. 3일 합동 공연이 열린 '류경정주영체육관'은 '올림픽 체조경기장' 같은 곳이에요. 대중 공연장으로는 좋아요. 그런데 거기 어디에 김정은을 앉히겠어요? 경호도 첫날이 낫고. 명분상으로도 개막 공연을 봐 주는 게 맞고."

―이전에는 김 부자(父子)가 참석한 적이 없었나요?

"2001년 만수대예술극장에서 열린 김연자 공연 때 김정일이 몰래 가서 보고 왔대요. 유리창 뒷자리에서. 관객들도 김정일이 왔다가 간 걸 몰랐어요. 그런데 이번에 김정은이 나타나서는 '내가 바쁜데 일정 조정해서 왔다'는 식으로 했잖아요. 아주 쇼를 해라 싶었죠."

―북한에 계실 때 남한 공연을 보신 적이 있나요?

"김연자 공연 때 악단 전체가 초청받아 갔었어요. 그때는 정말 난리가 났어요. 암표가 100달러 하고 그랬어요. 북한 주민 월급이 0.5달러일 때예요."

―그런 쇼를 왜 했을까요?

"보여주기 위한 거죠. 외교적으로는 '나는 세련되고, 정상적이며, 여유 있는 사람이다'라는 것. 내부적으로는 '아무리 적들이 뭐라고 해도 이렇게 적들은 예술단까지 끌고 와서 나에게 인사할 정도로 내가 대단하다. 그러니 나만 믿고 따라와라'는 것. 이번 행사는 북한 정권 홍보 차원에서 최고의 득점이라고 봐요."

―이런 작전은 누가 짰을까요?

"김정은은 국내에서는 김일성 이미지를 코스프레하고 있지만, 외교적으로는 현송월·김여정·리설주 등 여자들을 앞세워서 부드러운 이미지를 강조하고 있어요. 남측 대북 특사단이 왔을 때 식탁을 분홍색 천으로 깔았던 것이나, 북한 대표단이 공연하러 왔을 때 단체복에서 핑크색 넥타이를 맨 거나. 전 태어나서 북한 남자들이 핑크색 넥타이 맨 것을 처음 봤어요. 그런 것들은 여자들의 세련미나 세심함 없이는 힘들거든요. 그러면 이 총책을 누가 하느냐. 제가 봤을 때는 이게 다 김여정 작품이라는 거죠."

―관객석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었나요?

"1일 공연에서는 가수 김주향, 송영, 지휘자 윤범주 등 문화·예술 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이더라고요. 평양시에만 문화·예술 단체가 30~40개 되거든요. 다 모으면 몇 천 명 돼요. 그들 중엔 유학파들이 많고. 그 외에도 통역하는 양반들, 대남 사업하는 사람들이 보이더라고요. 김연자 공연 때는 50대 이상이 많았는데, 이번 공연에는 30~40대가 대부분이고. 3일 공연은 좀 더 일반인이 섞인 것 같더라고요. 그래도 중앙당 과장 이상이었겠지만."

―이번 공연에서 김정은이 윤도현 노래 들으며 미소 짓다가 카메라에 잡히니 표정 관리하는 장면이 찍혀 화제였습니다.

"즐기는 장면은 본능이었다고 봐요. 카메라에 잡히니 아차 싶었겠죠. 북한에서는 지도자가 박수를 치는 노래는 다 불러도 되는 노래가 돼요. 보위부도 못 잡아요."

―레드벨벳을 김정은이 좋아해서 직접 방북단으로 찍었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그것까진 제가 모르지요(웃음). 방북 공연 결정 후 남한에서 '설마 레드벨벳이 북한 가서 빨간 맛을 부르겠어?'라는 말들이 농담처럼 나왔는데, 그걸 이미 지켜본 후 '우린 이런 것도 들을 만한 여유가 있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을 수도 있고."

―단체 사진에서 레드벨벳 아이린이 김정은 옆에 선 것을 두고도 해석이 분분합니다.

"자연스러운 자리 선정이었다고 말하는 최진희씨에게 묻고 싶어요. 그 현장에 있던 북측 관계자 중 그 누구도 '앉으세요. 이쪽으로 붙으세요' 이런 말 하는 사람이 없었는지. 누가 그 앞에 앉고 싶겠어요. 옆에 서고 싶지. 그걸 주변에서 자연스럽게 조율한 거죠. 누가 봐도 김정은의 세련된 이미지를 위해 연출된 사진이에요."

―싸이는 왜 방북 공연단에서 제외된 것일까요? 최고 존엄(김정은)과 너무 닮아서라는 농담도 있던데.

"그건 말이 안 되는 거고. 그렇다면 그 말을 꺼낸 사람이 모가지인데. 싸이의 '강남스타일'은 북한 입장에서는 가장 감당이 안 되는 노래예요. 남조선에서도 자본주의의 중심이라는 서울 강남이야. 거기에 퍼포먼스가 얼마나 화려해. 중독성이 너무 강해서 확 붙어서 휘발유가 될 수 있는 거죠. 윤도현밴드는 록 음악이지만 북한에서 인기인 '너를 보내고' 같은 노래 가사는 굉장히 순종적이에요. 오히려 싸이의 챔피언, 강남스타일 이런 것들이 감당이 안 되는 거죠."

―북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애창곡이었던 '그 겨울의 찻집', '뒤늦은 후회' 등을 불러달라 요청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되살리는 노래였을 수 있고. 현재 북한 간부층에는 아직 김정일 당시 인물들이 많이 남아있어요. 그들에게 김정일에 대한 효(孝)를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지요. 그 시대 사람들을 위한 헌정곡 같은."

―북한에서는 남한 노래만 들어도 총살인 줄 알았어요.

"지금도 그렇긴 하죠. 그런데 시대의 변화라는 게, 아무리 북한이 폐쇄돼 있지만, 접경 지역에서는 이웃 나라에 대한 문화적 전파가 가능하단 말이에요. 그걸 들은 사람들이 가만히 있겠느냐고. 처음에는 이 변화를 누르기 위해 감옥에 보내고 난리 블루스를 췄는데, 어떻게 전 국민을 감옥에 보내. 최진희의 '사랑의 미로'도 그래요. '그토록 다짐을 하건만~'을 부르며 아이들이 태어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국민가요예요. 그런 애들을 다 감옥에 보낼 거야?"

―'봄이 온다' 공연은 북한 주민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까요?

"2001년 김연자 공연 후 '눈물 젖은 두만강' 같은 한국 대중가요 22곡이 해금(解禁)됐어요. 이게 북한 역사상 처음이거든요. 북한에서는 유행가가 절대 허용이 안 됐는데, 억누를 수 없다는 걸 안 거지. 이게 김연자 공연이 가져다준 혁명이었어요. 지금도 녹화한 USB나 CD 영상 다 돌고 있을 거예요. 그로 인한 영향이 있겠지."

―김 부자(父子)가 음악에 대한 관심이 많네요.

"음악 정치라는 말이 김정일 시대에 나왔어요. 만수대예술단을 만들어서 김일성에게 바쳤고, 자기 시대에 와서는 북한식 전자악단인 '보천보전자악단'을 만들었고. 후계자 김정은에게는 '은' 자를 따서 북한 최초 팝 오케스트라인 '은하수관현악단'을 만들어 준 거예요. 그런데 김정은이 보니까 자기 스타일이 아니야. 그래서 싹 폐쇄해버리고, 리설주를 앞세워서 금성학원 출신들로 모란봉악단을 만든 거예요. '레드벨벳'을 부른 것도 모란봉악단 애들한테 직접 보여주기 위함도 있었다고 생각해요."

―북한에서 음악은 이데올로기를 위해 봉사하나요, 아니면 그 자체로 존재하는 예술의 가능성은 없나요.

"북한은 철저히 이데올로기적인 음악을 하고 있어요. 체제의 우월성, 김 부자 위대성, 당 정책 정당성. 그런 것들을 선전하기 위해 활용되는 것이 음악이에요. 순수 예술을 위한 음악은 없다고 봐야 해요. 그럼에도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곡들이 있는데, 그 곡들은 대부분 민족적 형식의 사회주의 내용을 담은 것들이에요. '음악 문예정책'이라고 해요. 저 같은 경우도 북에서 공연할 때 이데올로기적인 것만 해야 했어요. 북한 가요 '당을 따라 천만리', '백두의 눈보라' 같은 곡들을 피아노곡으로 편곡해 연주해요. 이번 서울·평양 공연은 색을 빼려고 노력을 하긴 했어요. 그러나 현송월이 서울 공연에서 불렀던 '백두와 한라'는 철저히 우리 민족끼리라고 해서 북한식 통일을 주창하는 곡들이에요. 평양 합동공연에서도 계몽기 가요라고 해서 일제 강점기 가요들을 하고, 다 같이 합창한 '다시 만납시다' 같은 노래도 자신들의 체제를 선전하는 노래지요."

남북 출신 아이들로 오케스트라 만들고파

피아니스트 김철웅이 2008년 10월 6일 미국 워싱턴 국무부 청사에 있는 벤저민 프랭클린 룸에서 북한 곡인 ‘환희의 노래’를 연주하고 있다. 탈북자 최초로 미 국무부 초청 연주회를 한 그는 “음악의 힘은 참으로 거대하며, 북한 인권 문제와 연결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조선일보 DB


김 교수의 외할머니는 평양 제1백화점의 초대 지배인이었다. 평양의 최고 부촌 창광거리 60평 아파트가 그의 집이었고, 1970년대 말 그의 집에는 일제 야마하 피아노도 있었다.

―어릴 때 김정남과도 친하셨다고요.

"로열패밀리들이 6~7살이 되면 고관댁 자녀가 가서 놀아줘요. 가서 군사놀이 같은 거 하고. 그러면 집으로 갈 때 초콜릿이나 기관차 장난감 같은 거 선물로 줘요."

―현송월, 윤범주가 같은 평양음대 출신이죠.

"윤범주와는 정말 친했어요. 그 친구가 여덟 살 때부터 피아노를 쳤는데, 그때부터 학교를 쭉 같이 다녔죠. 그 친구도 오스트리아 빈에서 4년 유학했어요. 현송월은 저보다 나이는 두 살 많고 학교는 1년 선배예요. 범주가 학교에서 부모님 신분이 제일 낮았어요(웃음). 걔네 아버지도 여기로 치면 국립의대 교수 격인데. 우리 학교에 장성택 조카딸 장미영도 있었고. 말레이시아 대사 했던 장영철 딸이에요. 한덕수 조총련 의장 손녀딸도 있었고. 그녀의 어머니가 김일성 집에서 김경희랑 같이 자랐거든요. 부주석 했던 김일의 외손녀도 있었고."

―현송월은 김정은 내연녀 설도 있었는데요.

"그건 완전 지라시예요. 지금 나이가 40대 후반인데. 학교 다닐 때 그렇게 예쁜 것도 아니었어요. 튀는 스타일도 아니었고. 그때 김광숙과 리경숙 같은 1세대 가수들이 나이를 먹었어. 그러면 2세대를 배양해야 할 텐데, 그걸 어떻게 하나. 그래서 급조해서 평양음대 재학생 중 조기 졸업장 주며 데려간 사람 중 하나가 현송월이에요. 그러다 은하수관현악단에서 만난 리설주랑 궁합이 잘 맞았어. 그런데 리설주가 장군님 부인이 됐어. 그래서 현송월이 단장이 된 거지."

―앞으로 꿈은 뭔가요.

"처음 한국에 왔을 때 꿈은 카네기홀에서 연주하는 거였어요. 그건 2009년도에 이뤘죠. 제가 탈북자로 산다는 게 어찌 보면 애매할 때가 있어요. 정말 저는 통일을 바라거든요. 그런데 만약 통일이 된다고 하면 제가 두 정부 모두에 불편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거예요. 이번 국립극장 공연에서도 뒤에서 '이 사람 어떻게 들어갔느냐. 절대 주석단하고 부딪치지 않게 해라'는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불편한 진실이 된 거지. 그래도 통일을 대비해 탈북한 애들과 남한 애들을 섞어서 '청소년 오케스트라'를 만들고 싶어요. 당장의 문화 차이는 없앨 수 없지만, 필요한 건 양보잖아요. 오케스트라는 서로 양보를 해야 가장 멋진 소리가 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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