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삶]4월의 진혼곡

이희경 음악학자·한예종 강사 2018. 4. 4.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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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싱그러운 섬 제주의 봄은 유채꽃 만발한 풍광으로 여행객들의 발길을 사로잡는다. 그 아름다운 자연에 깊은 상처와 아픈 역사가 서려 있음이 널리 알려진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인기 예능프로들에서도 잇달아 언급되며 제주의 산천에 아로새겨진 4·3사건에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너븐숭이, 다랑쉬굴, 섯알오름 등 70년 전 벌어진 끔찍한 학살의 현장을 그대로 품고 있는 땅. 섬사람들에게 그때의 사건은 발설은커녕 기억에서조차 지워야 했던 천형과도 같은 일이었다. 제주 4·3을 평생의 문학적 화두로 삼아온 재일조선인 작가 김석범은 이를 ‘기억의 자살’이라 불렀다. “공포에 질린 섬사람들이 스스로 기억을 망각으로 들이쳐서 죽이는” 것. 냉전과 분단체제, 독재정권하에서 그렇게 기억은 말살당했지만, 무고한 수만명의 억울한 죽음이 진상규명조차 제대로 되지 못한 채 역사에서 사라질 수는 없었다.

30년의 세월이 흐른 1978년 발표된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은 4·3의 진실을 문학을 통해 공론화했고, 1980년대 말 일기 시작한 4·3진상규명운동은 반세기가 지난 후에야 비로소 특별법 제정으로 이어졌다. 2003년 국가권력에 희생당한 주민들에 대한 대통령의 첫 공식사과 후, 2008년 민간인 학살과 제주도민의 처절한 삶을 기억하고 희생자들을 추념하기 위한 ‘제주4·3평화공원’이 문을 열었지만, 그 후로도 4·3은 외딴 섬 제주의 아픔으로만 여겨져 왔다.

역사적 진실은 때로 문학적·예술적 형상화를 통해 더 강렬하게 전해지곤 한다. 5년 전 개봉한 오멸 감독의 영화 <지슬-끝나지 않은 세월2>는 1948년 11월 중순 이후 자행된 중산간 마을에 대한 ‘초토화 작전’을 피해 동굴 속으로 숨어들어간 주민들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담아 큰 울림을 남겼다. 수십년에 걸쳐 창작된 김석범의 대하소설 <화산도>도 몇 년 전 한글완역본이 출간되며 한국 현대사에서 4·3이 갖는 의미를 다시금 돌아보게 했다. 그동안 많은 예술가들이 시와 노래, 춤과 연극, 그림과 영화로 이 비극적 사건을 기억하고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며 살아남은 자의 고통과 아픔을 치유하려 애써왔다. 30년 전 ‘잠들지 않는 남도’를 작곡한 가수 안치환이 최근 ‘4월 동백’을 발표하며 다시 이 섬의 슬픔을 노래하듯이.

올해 70주년을 맞아 제주 4·3의 진실과 역사적 의미에 대한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전국적으로 추모의 물결이 일며 각지에서 전시·공연·퍼포먼스·씻김굿 같은 다양한 문화행사가 열리는 가운데 클래식 음악인들도 4월3일 성남아트센터에서 ‘섬의 아픔을 뭍에서 기억하다’라는 추념음악회를 마련했다. 구자범의 지휘로 네 명의 독창자와 ‘참 필하모닉 프로젝트 오케스트라’, 국립합창단·안양시립합창단이 베르디의 ‘레퀴엠’을 연주한 이 음악회는 전국의 뜻있는 음악인들이 자발적으로 지원해 오케스트라에 동참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80명의 오케스트라와 90명의 합창단이 모아낸 진혼의 목소리는 음악회장에 온 청중에게는 물론이고 참여한 음악가들의 마음속에 제주 4·3을 깊이 새기는 계기가 되었으리라.

“영원한 안식을”이라는 가사로 시작되는 ‘레퀴엠’은 죽은 이의 넋을 기리고 산 사람을 위로하는 진혼미사곡이다. 그것이 종교적 의미를 넘어 20세기 이후에도 여전히 창작되고 연주되는 것은 잔혹한 폭력과 전쟁에 스러진 원혼들이 넘쳐나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우리 현대사에도 제주 4·3을 비롯해 여수·순천, 거창 등지에서 벌어진 억울한 죽음들이 많았다. 이 아물지 않은 상처들을 보듬고 우리 사회가 평화와 인권을 존중하는 좀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낡은 이념의 틀에서 벗어나 철저한 진상규명과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이 이뤄져야 할 터. ‘영원한 안식’은 그런 연후에나 가능한 일일 것이다.

불편한 진실도 마주해야만 비극이 되풀이되는 걸 막을 수 있다. 뼈아픈 성찰의 시간을 거친 후 4월의 진혼곡이 해마다 울려 퍼지며 한반도에 마침내 평화롭고 따뜻한 봄날이 찾아오기를….

<이희경 음악학자·한예종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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