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신도 버린 사람들' 불가촉천민들은 왜 거리로 나왔나

최민지 기자 2018. 4. 4.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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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인도 전역이 달리트의 분노로 들끓고 있다. 달리트는 과거 ‘불가촉천민’이라 불렸던 카스트 최하위 계층이다. 달리트 수만 명은 지난 2일(현지시간) 인도 10개 주에 걸쳐 대규모 동시 시위를 벌였다.

도시는 마비됐다. 시위자들은 철도를 막고 도로를 점거했다. 대중교통은 운행을 멈췄다. 인도 북부 펀자브주의 학교와 은행들은 문을 닫았다. 공공기관 서비스는 중단됐고, 시험은 연기됐다. 칼과 몽둥이를 든 시위자 수백 명으로 거리가 넘치면서 가게들도 영업을 포기했다. 이 과정에서 최소 10명이 숨지고 수백 명이 다쳤다. 체포된 시위자만 수천 명에 이른다.

달리트들은 왜 거리로 나오게 됐을까.

인도 카스트 최하위 계급인 달리트들이 2일(현지시간) 서북부 국경 도시 암리차르에서 대법원 판결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며 나렌드라 모디 총리를 상징하는 인형을 불태우고 있다. 암리차르|로이터연합뉴스

■인도 대법원, “불가촉천민보호법, 무고한 시민 협박하는 데 악용”

논란은 지난달 20일 인도 대법원에서 시작됐다. 대법원은 이날 ‘지정 카스트·지정 부족 보호법(SC/ST Act)’이 무고한 시민들을 협박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며 이 법률의 가해자 즉시체포 규정 금지 등을 명령했다.

SC/ST법은 하위 카스트인 달리트에 대한 범죄를 방지하기 위해 1989년 제정됐다. 이 법에 따라 달리트를 상대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누구나 즉각 체포할 수 있고, 보석도 엄격하게 제한된다.

대법원은 이 법이 남용되고 있다고 봤다. 법원은 판결문을 통해 “2015년 제기된 관련 고소·고발 건수의 15~16%가 허위였고, 사적인 원한 때문에 신고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지적하며 “이 법은 오용이 난무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무고한 시민들을 몰아세우는 것은 입법부가 의도한 것이 아니다. 입법부는 이 법이 협박이나 개인적인 복수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게 할 의도가 없었다”며 “법이 카스트에 대한 증오를 야기해선 안 된다”고 밝혔다. 이 법을 위반한 공무원 체포 시 지정된 관리자의 허가를, 민간인의 경우 해당 지역 경찰청장의 허가가 필요하도록 하는 명령도 내렸다. 기존에 인정되지 않았던 보석도 허용했다.

대법원의 이 같은 결정에 억압과 차별은 물론 범죄의 희생양이 되어 온 달리트들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득보단 실 될 것”…높아지는 비판

인도 달리트들과 좌파 단체들이 2일(현지시간) 뭄바이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피켓에는 “카스트 제도는 ‘불의’를 통해서는 절대 끝낼 수 없다”고 쓰여져 있다. 뭄바이|AP연합뉴스

달리트 단체들은 이번 판결이 득보단 실이 많을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무고한 시민과 정직한 공무원들을 보호하겠다는 명목이 오히려 달리트 대상 범죄자 처벌에 장애물이 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관료들이 하급 카스트에 대한 잔혹 행위를 눈감게 해 이들에 대한 폭력이 늘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층 계급을 위한 전인도연합’의 총서기 케이피 차우다리는 BBC힌두에 “SC/ST법은 달리트에 대한 어떤 차별도 처벌 가능한 범죄로 간주해 달리트를 보호해왔다. 하지만 대법원의 새로운 명령으로 이 법적 의무는 모두 끝이 났다. 우리 모두는 슬프고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진화 나선 정부, 고집하는 법원

3일 오후 인도 대법원에서 심리가 열렸다. 전날 연방정부 법무부가 판결 재검토를 요구하는 내용의 탄원서를 제출한 데 따른 것이다. 정부는 “해당 법은 오용되기보다 오히려 약하게 이행되고 있다”며, 대법원 판결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이날 법원은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 재판부는 “(지난달 판결은) 달리트에 대한 편견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며 “판결의 유일한 의도는 죄 없는 사람들이 엄격한 SC/ST법에 따라 불필요하게 고통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시위자들이 판결을 완전히 읽지 않았을 수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정부와 의회, 관련 단체 등 모든 당사자들에게 이틀 내로 의견을 제출하라고 요청했다. 다음 심리는 열흘 후 열릴 예정이다.

법원이 기존 입장을 쉽게 바꾸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는 데다, 내년 5월 치러질 총선을 앞두고 달리트 문제가 정치 이슈로 부상하고 있어 논란은 쉽게 사그러들지 않을 전망이다.

■불가촉천민, 여전히 ‘신도 버린 사람들’

신발 수선 작업을 하는 인도의 달리트(불가촉천민)의 모습. 이들은 물고기 잡기, 화장실 청소, 신발 수선, 시체 운반 등 육체적으로 고된 노동을 도맡아왔다. 게티이미지코리아

1950년 제정된 인도 헌법은 카스트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하지만 카스트가 인도인들의 생활과 생각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탓에 이에 따른 차별도 여전하다. 교육과 직업 기회를 얻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이들을 노리는 범죄도 흔하게 벌어지고 있다. 2016년 한 해 동안 인도에서 발생한 달리트 대상 범죄는 4만7000건이 넘는다. 최근에는 구자라트주에 사는 한 달리트가 힘과 부를 상징하는 말을 소유했다는 이유로 구타를 당해 숨지기도 했다. 인도 내 달리트의 수는 약 2억 명으로 전체 인구의 6분의 1을 차지하지만 여전히 소수자 지위를 면치 못하고 있다.

<최민지 기자 mi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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