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부는 왜 '갑자기' 우리국민 피랍 사실을 공개했을까?

2018. 4. 2.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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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외교부 누리집 갈무리.

지난달 26일(현지시각) 한국인 3명이 아프리카 가나 해상에서 해적으로 추정되는 세력에 의해 납치됐다. 사건이 발생한 지 일주일이 지나도록 정부가 피해자의 위치, 상태는 물론 납치 세력의 신원이나 요구사항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국민 안전’을 이유로 언론에 요청했던 ‘엠바고’(보도 자제)를 전격 해제한 이유를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외교부는 지난 26일(현지시각) 아프리카 가나 해역에서 무장한 해적 9명이 한국인 3명(선장·항해사·기관사)을 비롯해 가나 현지 선원 42명 등이 탄 500톤 규모 참치잡이 어선 ‘마린711호’를 납치했다고 밝히며, 외교부 출입 기자단에 ‘보도 자제’, 곧 엠바고를 요청했다. “피랍으로 추정되는데, 혹시라도 우리 국민 생명에 지장이 있을 수 있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외교부 당국자는 “우리 국민이 최종적으로 구출될 때까지 협조를 부탁한다”고 기자단에 말했다. 기자단은 이러한 정부의 입장을 받아들여 보도를 유예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외교부는 사건 발생 5일째인 지난 3월31일, 이 엠바고를 일방적으로 해제했다. 외교부 홈페이지에 가나 해역에서의 한국인 피랍 사실을 보도자료 형태로 게재했다.

가나 해역서 납치된 한국인 3명 관련

외교부, 27일 언론에 ‘보도 자제’ 요청

피해자 상황 변화 없고

소재조차 파악 안 되는데

5일 만에 입장 바꿔

일방적으로 “보도 가능”

엠바고란 기자들을 상대로 일정 시점까지 보도를 자제해 줄 것을 요청하는 일이나, 기자들 간의 합의에 따라 일정 시점까지 보도를 자제하는 행위를 말한다. 보통 납치 사건 등의 사건 정보가 노출되면 수사나 구조에 어려움이 생겨 피해자의 신변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있을 때 적용될 수 있는 보도 관행이다. 예컨대 유괴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이러한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면 가해자가 보도, 또는 보도로 인해 동요하는 여론을 활용해 자신의 협상력을 높이려 할 수 있다. 수사 당국이 가해자를 쫓기 위해 어떤 움직임을 보이는지 정보를 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엠바고는 ‘국민의 알 권리’라는 가치를 잠시 유보하고, 이같은 부작용을 방지하기 위해 정보 제공자(일반적으로 정부 기관)와 언론 사이에 제한적으로 맺는 약속이다.

외교부가 엠바고를 해제한 이유를 두고 논란이 인다. 일단, 사건 발생 당일과 비교했을 때 상황이 나아진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태는 더 악화됐다. 26일(현지시각) 가나 해역에서 해적으로 추정되는 세력들이 한국인 3명(선장·항해사·기관사)이 타고 있는 배를 훔쳐 달아났다. 납치 하루만인 27일 나이지리아 해군이 납치 세력에게 경고방송을 하자, 납치세력은 한국인 3명과 가나 선원 1명, 다른 배에서 납치해 데리고 다니던 그리스인 1명까지 모두 5명을 배에서 내리게 해 해적 소유의 스피드 보트에 태운 뒤 도망쳤다. 정부는 한국인 3명이 마린711호에 타고 있을 때만 하더라도 이들이 가나 인근 150㎞ 해상에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 하지만 납치세력이 속도가 빠르고 추적이 어려운 스피트 보트를 타고 해상 경계선을 넘어 나이지리아 방향으로 도망친 뒤로는 아직까지도 이들의 소재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강조하는 ‘우리 국민의 안전’이 여전히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외교부는 엠바고를 해제했다. 보도 자제 요청을 거둬들이고 보도를 허가한 셈이다. 또한 보도 자료를 일방적으로 외교부 누리집에 올렸으므로 이 사실이 국내에 퍼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정부는 한국 내부 언론의 보도를 허가하면서 정부는 크게 두 가지 이유를 댔다. △가나 현지 언론이 한국인 피랍 사건을 다뤘다는 점 △트위터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사건이 외부에 알려지고 있다는 점 등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납치 피해자가 속한 국가에서 보도가 나오는 것은 외국 언론 보도과 비교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예컨대 납치 세력이 피해자의 본국에서 관련 내용이 보도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면 해당 국가 시민들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본다는 점 등을 역으로 이용해 피해자의 몸값을 더 높여 부르는 등 협상력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외교부는 엠바고를 해제하는 문제에 대해 피해자의 가족과 상의를 하고 양해를 구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최악의 상황이 벌어져 납치 세력이 ‘몸값 협상’을 시도한다면, 실제 협상에 나서는 것은 정부가 아니라 피해자의 가족과 마린711호가 소속된 선사다. 한국 정부는 미국 등과 마찬가지로 테러집단이나 납치 세력의 협상 요청에 공식적으로 나서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국제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확립된 원칙’이기도 하다. 외교부가 낸 해외피랍 예방 및 대응 자료를 보면, 정부가 직접 납치범의 불법적인 요구나 정치적인 요구에 양보할 경우 유사 사건이 재발할 위험성이 있으므로, 이러한 점을 감안해 정부는 국제사회 원칙에 따라 납치 세력과의 몸값 협상에 직접 참여하지 않는다.

문무대왕함. 해군 제공.

청와대는 문재인 대통령이 아랍에미리트(UAE) 순방 중에 이러한 피랍 사실을 보고 받았고, 28일 새벽 귀국 직후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에게 청해부대를 피랍 해역으로 급파하라고 지시했다고 밝힌 바 있다. 윤영찬 국민소통수석은 “문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합동참모본부는 오만 살랄라항 앞바다에서 임무수행 중이던 문무대왕함을 피랍 해역으로 이동하도록 긴급지시했다”고 했다.

2일 외교부 당국자는 기자들을 만나 엠바고 해제와 관련한 논란에 대해 설명하며 “(납치세력이나 피랍자에게) 장시간 연락이 오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사건이 장기화될 (가능성에 대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며 “문무대왕함 파견이 (납치 세력에) 간접적인 압박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가진 게 사실”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문무대왕함은 오는 16일이나 돼야 사고해역에 도착할 예정이다.

이날 비공개 언론 브리핑에서 외교부 당국자는 ‘청와대 등 다른 곳의 정치적 판단에 의해 억지로 말을 끌어내는 것이 아니냐’, ‘정부 (홍보)에 필요한 방향으로 하는 게 아니냐’는 기자들의 물음에 “국민 생명이 걸린 문제를 홍보를 위해 엠바고를 해제한다는 것은 상상도 안 되는 일이다”라고 답했다. 그러면서도 그렇다면 왜 엠바고를 해제했느냐에 대해서는 “우리 국민의 생명과 안위를 위해 종합적으로 고려했다”는 말만 반복했다.

‘우리 국민은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은 일주일째 변함이 없다. 지금으로부터 보름이 지나야 현장에 도착할 ‘문무대왕함 파견’ 소식과 함께 외교부가 엠바고를 해제해야 했던 이유가 뭘까. 노지원 기자 z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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