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초토화 작전에 사라진 마을..학살의 현장

이재민 2018. 3. 31. 20:28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뉴스데스크] ◀ 앵커 ▶

해방 직후 이념갈등 속에 3만 명의 제주도민이 숨진 4·3은 우리 현대사의 큰 비극입니다.

1947년 3·1절 기념행사에서 일어난 경찰의 총격으로 6명이 숨진 사건이 발단이 됐고요.

이듬해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 선거 반대와 친일경찰 청산을 요구하는 무장봉기가 일어납니다.

그러자 미군정, 또 당시의 신생 대한민국 정부는 이를 북한의 사주라며 강경하게 진압했고 여성과 어린아이를 포함해 무려 3만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올해로 70년, MBC는 오늘(31일)부터 그 흔적과 상처를 연속 보도해드립니다.

첫 순서로, 초토화 작전으로 마을 자체가 사라져 버린 집단 학살의 현장을 찾아가보겠습니다.

이재민 기자입니다.

◀ 리포트 ▶

제주시 구좌읍 다랑쉬굴.

4·3 당시 동굴 피난민들의 모습이 드러났습니다.

숟가락과 고무신, 가지런히 놓인 유해 11구는 이곳이 가족단위 피난처였음을 보여줍니다.

[영화 '지슬'] "안 내려오면 다 죽인다고 하는 겁니다."

낮에는 군인·경찰을 피해, 밤에는 이른바 무장대를 피해 주민들은 동굴 속에서 목숨을 이어갔습니다.

[고성준/목시물 굴 생존자] "아기가 우니까, 그 사람 남편이 '한 사람으로 백 사람 죽는다'면서 입을 막으라고. 수건으로 입을 막으니까 아이가 숨이 막혀서 죽었어."

지금은 사라진 마을 무등이왓.

중간중간 남은 돌담이 마을의 흔적입니다.

[홍춘호 81세/무등이왓 마을 생존자] "다음 집하고 또 다음 집은 사람 하나도 없어. 4·3으로 다 죽어버려서."

한때 200가구가 넘었던 제법 큰 마을은 주민들과 함께 사라졌습니다.

[홍춘호 81세/무등이왓 마을 생존자] "죽창으로 다 죽지 않으니까 잡풀, 멍석 그런 것을 갖다가 씌워 가지고 불을 붙여 버렸어. 식구가 한 사람도 못 살아남은 집이 몇 집 있어요."

'초토화 작전' 넉 달 만에 사라진 중산간 마을은 1백여 곳.

제주도 중산간 마을 대부분에 사람이 없어졌습니다.

4·3이 일어난 1948년에만 6천 5백여 명.

이듬해 5천 명, 다음해 2천4백 명, 죽이려던 사람이 안 보이면 대신 그 가족을 죽이는 '대살'까지 성행했습니다.

[이형욱/대살 피해자] "내가 산에 갔다고 하니까, 그래서 (아내를) 대살시켜 버린 것 아닙니까. 말을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살려 준다는 말을 믿고 산에서 내려왔다가 군인 2명이 숨진 데 대한 보복으로, 도망자 가족이 있다는 이유로 확인된 사망자만 만 4천여 명.

1954년까지 7년 동안 숨진 제주 민간인은 3만여 명으로 추정됩니다.

1949년 미군 보고서는 사망자 80%가 군경 토벌대에 의해 숨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양봉천/전 4·3유족회장] "일곱 식구가 한꺼번에 죽었어. 2세, 3세 그런 아이들이 무슨 폭도냐 이거지. 2·3세가 무슨 놈의 공산주의를 알고 민주주의를 알았겠느냐…"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죽은 아버지 다 어디 갔소…우리 동생 찾아줍서…"

수많은 주민이 이유없이 죽어 묻혔지만 한시적으로 진행된 유해발굴은 이명박 정부 이후 예산 지원이 끊기며 중단됐습니다.

MBC뉴스 이재민입니다.

이재민 기자 (epic@mbc.co.kr )

[저작권자(c) MBC (www.imnews.com) 무단복제-재배포 금지]

Copyright © MBC&iMBC 무단 전재, 재배포 및 이용(AI학습 포함)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