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아이들 다 아는데, 학교만 모르는 '진짜 성교육'

2018. 3. 31.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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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커버스토리
고양지역 교사 '초등젠더교육연구회'
여자·남자다움 틀에 가두지 않는
성평등·성교육 고민하고 시도해와
'선택 폭 넓혀주자' 학부모 설득도
"가르친 학생들로부터 다시 배운다"

[한겨레]

경기도 고양시 한 초등학교 5학년 학생들이 창의적 체험활동 시간에 자신이 들었던 성차별적인 말과 이러한 표현 대신 사용하면 좋겠다고 생각한 말을 종이에 썼다. 초등젠더교육연구회 제공

[토요판] 커버스토리

‘젠더 감수성’ 배우는 사람들 ② 변화 꿈꾸는 초등교실

20~44살 한국인 48%는 ‘원하지 않는 성관계’를 한 적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여성은 62.3%, 남성은 33.6%가 이런 경험을 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2017년 8월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전국 17개 지역 미혼·기혼 1222명(남 607, 여 615)을 조사해 보고서 ‘한국 사회의 젠더와 건강 불평등 연구(Ⅰ)’에 실은 내용이다.

원치 않는 성관계는, 몸과 마음의 건강을 해치는 위험 요소다. 원치 않는 성관계를 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성(性)적 자기결정권이 약한데, 특히 여성에게서 이러한 특성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만약, 여자답게 혹은 남자답게가 아닌 ‘나’답게 행동하는 법을 배웠더라면, 싫은 것은 싫다고 표현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소통하는 방법을 익혔더라면 어땠을까? 유엔 교육과학문화기구(유네스코)는 생물학적 성(sex)뿐 아니라 인권과 성평등 교육을 아울러 다른 사람과 원만한 관계를 맺고 살아갈 수 있도록 ‘포괄적 성교육’(CSE) 시행을 강조한다.

경기도 고양시 2개 초등학교 소속인 김수진·이예원·황고운·김지영(가명)·이한영(가명) 선생님은 지난해부터 교과 과정을 기반으로, 성평등 수업과 성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초등젠더교육연구회’를 만들어 1~2주에 한번씩 만나 수업자료를 어떻게 만들지 머리를 맞댄다.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각자 수업을 진행한 뒤, 후기와 향후 과제를 연구회 블로그(blog.naver.com/gdgamsung)에 기록하고 있다. ‘남자아이가 분홍색 가방을 메도 놀림 받지 않는’ ‘여자아이가 무슨 태권도니? 라는 말을 듣지 않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 아이들을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성(gender), 즉 여자다움·남자다움이라는 틀에 가두지 않는 ‘젠더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지난 3월22일 저녁,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서 선생님들을 만나 지난 1년간 해온 활동을 되짚어보았다.

1. 학생들 궁금해하는 걸 가르쳤더니…

초등학생들은 스마트폰과 유튜브를 통해 ‘그 모든 것’을 보고 있다. 그러나 학교에선 자궁이나 나팔관 모양만 보여줄 뿐, 아이들의 성적 호기심을 해소해주는 ‘진짜’ 성교육이 없다. 인터넷에 떠도는 성 지식과 잘못된 통념, 소수자·약자를 비하하는 표현을 고스란히 흡수하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선생님들은 ‘제대로 알려주는’ 성교육을 준비하기 위해 몸과 마음에 변화가 찾아든 6학년 학생들에게 궁금한 점을 쪽지에 적어 소통함에 넣어달라 부탁했다. 고민 끝에 생리와 몽정·발기뿐 아니라 자위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기로 했다. 그런데 수업 이후 한 학부모가 학교에 민원을 넣었다. 아이 입에서 나온 ‘자위’라는 말에 놀란 것이다. 영어나 수학은 미리 가르쳐도 성교육은 최대한 미루려는 학부모들이 적지 않다. 학교는 선생님에게 학생들 ‘수준’에 맞는 교육을 하라고 요구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보고서를 보면, 자위를 한 적 있는 20~44살 1027명(84%) 가운데 21.4%가 초등학교 때 첫 자위 경험을 했다. 수업을 들은 한 학생은 “자위를 할 때 깨끗이 손을 씻고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는 후기를 남겼다.

2. 5~6학년도 성폭력이 무엇인지 몰라

지난해 5학년 학급 담임을 맡았던 황고운 선생님은 음란물에 대해 솔직히 이야기하고, 이성 관계에서 ‘동의’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남학생들이 수업을 듣다 여자 선생님이 자신을 잠재적 가해자로 대한다고 느낄까봐 조심스러웠다. 같은 학교 6학년 학급 담임인 남자 선생님도 황 선생님과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여학생들에게 성적 자기결정권과 생리컵(질 내에 삽입해 생리혈을 받아내는 제품)에 대해 알려주고 싶었지만 자칫 오해를 살까 걱정스러웠다. 남학생들 사이에 ‘쟤 생리한대’란 말이 돌까봐, 여학생들은 생리한다는 사실을 가장 친한 친구에게 말하는 것도 어려워한다. 그렇다면, 두 선생님 반 학생들을 성별로 합쳐, 동성 선생님이 성교육을 해보면 어떨까? 학교에서 관리자 허가 없이 교육 과정에서 벗어나 계획과 다른 방법으로 수업을 하는 건 불가능하다. 황 선생님은 아이디어를 현실화하기 위해 수업 취지와 근거를 마련해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결재를 받았다.

5~6학년 여학생들은 생각보다 ‘성폭력’을 낯설어했다. 아이들이 상상하는 성폭력은 강간뿐이었다. 가해자가 주로 ‘아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경악했다. “나쁜 행동은 신고하는 것이다. 좋은 어른을 고발하는 거라고 생각해 참거나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 거절하는 법을 일러주자, 한 학생은 수업 후기를 통해 “누가 나를 만지거나 희롱할 때 싫다고 이야기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남자 선생님은 5~6학년 남학생들에게 음란물은 관계와 과정이 생략된 가짜이며, 자극에 둔감해지면 새 자극을 원하듯 중독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야동은 몸만 있는 거네요?” 듣고 있던 학생이 핵심을 짚었다. 또다른 학생은 남자인 자신도 성폭력 피해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지난해 초등학교 4학년 학생이 그린 그림. 저학년이든 고학년이든 남녀를 명확히 구분짓고 하는 일도 나눠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초등젠더교육연구회 제공

3. ‘여자답게/남자답게’ 웃어보세요

선생님 5명이 각각 2학년부터 6학년 학생들을 지도해본 결과, 학년에 상관없이 ‘쟨 남자 글씨인데’라는 말처럼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을 구분짓고, 하는 일도 나눠서 생각하는 경향을 보였다. 교사가 되고 싶은 학생은 여자아이들뿐이다. 고학년 가운데 과학자를 꿈꾸는 학생은 모두 남자다. 초등학교 4학년 2학기 사회 과목엔 ‘양성평등’을 가르치는 단원이 포함돼 있지만 성 고정관념은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교과서엔 ‘옛날에는 남자와 여자의 역할이 엄격하게 구분되었지만 오늘날은 그렇지 않다’는 정도의 가르침만 있다.

학생들이 스스로 성 고정관념을 갖고 있다는 걸 어떻게 느끼게 할 수 있을까? 김수진 선생님은 4학년 학생들에게 ‘여자답게/남자답게 웃어보세요’ ‘여자답게/남자답게 달려보세요’ 등 제시어를 주고 동작을 해보도록 했다. 여자처럼 웃는다며 입을 가리고 ‘호호호’ 소리 낸 학생이 있었다. 남자처럼 달린다며 과장된 몸짓을 하는 학생도 있었다. 동작을 끝낸 학생들에게 어떤 느낌이었냐고 물었다.

“여자답게 하라고 해서, 원래 그렇지 않았는데 얌전히 달렸어요.”

“남자답게 하려고 더 크게 행동했어요.”

선생님은 되물었다.

“왜 우리는 여자답게, 남자답게 행동하라는 말에 나와 다르게 행동했을까요?”

“우리가 가진 고정관념 때문에요.”

수업 이후 교실에선 머리 긴 학생에게 쏟아지던 ‘남자가 왜 머리를 기르냐’는 말이 사라졌다.

최근 새 학기 학부모총회에서 선생님들은 모든 학생이 가져오는 ‘미니빗자루 세트’ 사진을 보여주었다. 분홍색 아니면 파란색. 어느 쪽이 여학생 것인지 명확했다. “1970년대만 해도 여아용·남아용 완구가 따로 없었다. 100여년 전만 해도 분홍색과 레이스는 남자 것이었다. 아이들이 가정으로부터, 사회로부터 고정관념을 흡수하고 있다. 자라다 보면 성별에 따른 제약이 커지고 선택의 폭이 좁아질 수 있는데, 우리가 함께 틈을 열어주면 어떻겠느냐.” 학부모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초등학생들 새 학기 준비물인 ‘미니빗자루 세트’. 학생들이 가져오는 빗자루 세트는 성별에 따라 분홍색 아니면 파란색이다. 초등젠더교육연구회 제공

4. 학부모 상담에 아버지들이 온다면?

학교는 사회와 분리된 공간이 아니다. 사회의 성차별 구조가 학교 행정에도 고스란히 재현된다. 초등학교에선 녹색어머니회, 책읽어주는 북맘, 어머니폴리스(마미캅) 등 갖가지 업무에 어머니들을 ‘무료’로 동원한다. 올해 3월, 청와대 홈페이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초등학교에서 어머니 동원을 금지해달라’거나 ‘안전한 등굣길을 어머니뿐 아니라 온 가족 및 지역사회가 책임질 수 있게 해달라’는 제안이 올라왔다.

선생님과 학부모가 매 학기 만나 소통하는 자리인 ‘학부모 상담’에도 대부분 어머니들만 참여한다. 지난해 2학기 ‘아버지 상담’을 시도한 이유다. 아버지가 없는 학생들이 혹여 상처를 받을까 걱정스러웠지만 어머니만 참여하는 상담 풍경을 바꿔보자 싶었다. 아버지들에게 참여를 독려하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학교에선 ‘회사 다니는 아버지들에게 부담을 줄 수 있다’ ‘아버지만 상담이 가능한 것처럼 느낄 수 있다’고 우려했다. 결과적으로, 5명의 선생님을 만나러 온 학부모 가운데 아버지 비중은 절반이 넘었다. 이러한 시도에 고마움을 표시한 아버지들도 있었다. “학부모 상담에 아내와 같이 가볼까 생각만 하고 실천을 못 했는데 선생님 메시지 덕분에 드디어 오게 됐다.”

황고운 선생님이 근무하는 학교는 올해 처음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가나다’순으로 출석번호를 매겼다. 지난해까지 남학생 출석번호는 1번부터, 여학생은 31번부터였다. 2005년 국가인권위원회는 초등학교에서 ‘남학생 앞번호, 여학생 뒷번호' 방식으로 출석번호를 부여하는 건 차별이라며 시정을 권고했다. 교육행정정보시스템인 나이스(NEIS)에서 번호만 조정하면 바꿀 수 있는 관행이지만, 인권위 시정 권고가 나온 지 13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많은 학교가 옛날 방식을 고치지 않는다.

4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집에서 일어나는 일을 포스트잇에 적고, 그 일을 하는 가족 구성원들에게 붙여 보도록 했다. 한 학생은 수업 후기를 통해 “일이 많은 사람은 엄마, 아빠, 나, 형 순서였는데, 수업을 하고 보니 엄마가 너무 힘들어 보이고 아빠도 힘들어 보였다. 이젠 골고루 나누어서 엄마 일을 같이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초등젠더교육연구회 제공

5. 어른들 가르치는 게 더 시급하다

선생님들은 자신이 가르친 학생으로부터 다시 배운다. “성폭력 문제를 이야기하다 ‘그런 아저씨’라는 표현을 썼는데, 한 학생이 ‘아저씨들만 그러는 거 아닌데’라고 하더라. 좀더 세심하게 표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제자들의 변화를 보면 애써 수업자료를 만들고 고민한 보람을 느끼지만, 바뀌지 않는 학교 벽에 부딪칠 때마다 힘이 부친다. ‘젠더 교육’을 하겠다고 했을 때 학교 관리자들이 말했다. “트랜스젠더, 동성애 가르치는 거냐. 이상한 거 하지 마라.” 아이들보다 어른들을 가르치는 게 시급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젊은 교사들이 꼭 참여해야 하는 연수 과정에 강사로 참여하고 싶다. 함께 변화를 꿈꾸는 동료 선생님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초등학교 4학년 2학기 사회 과목엔 ‘양성평등’을 가르치는 단원이 포함돼 있지만 성 고정관념은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초등젠더교육연구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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