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판사님의 '3분 호통'은 끝났지만.. 소통은 계속된다
'호통 판사' 천종호(52)는 지난달 두 번이나 뉴스의 주인공이 됐다.
먼저 들려온 소식은 미담. 지난해 9월 대한민국을 뒤흔든 '부산 여중생 폭행사건' 피해자 A양(15)이 그 폭행사건 전 저지른 가벼운 비행으로 부산가정법원 법정에서 천종호 부장판사를 만났다. 천 판사는 A양에게 동의를 구하고 가해자 중 구속되지 않은 B양을 불러냈다. B양은 A양에게 "미안하다 용서해줘"를 10번 외쳤다. 둘은 결국 부둥켜안고 울었다. 감동적인 장면은 재판이 끝난 다음에 펼쳐졌다.
천 판사가 A양에게 말했단다. "너, 판사님 딸 하자!" 싫지 않은지 A양은 빙긋이 웃었다. 휴대전화로 함께 사진을 찍고 나서 천 판사가 덧붙였다. "누가 괴롭히거든 이 사진을 보여줘라. 힘들면 연락해."
며칠 뒤 나쁜 뉴스가 엄습했다. 부산지방법원으로 인사 발령이 나 소년보호재판을 떠나게 된 것이다. 천 판사는 지난달 20일 짐을 싸고 있었다. "소년 재판만 하다 퇴직할 줄 알았는데 충격이 크다"며 허탈하게 웃었다. 사무실 한쪽엔 소년범들에게 받은 편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소년범들의 아버지' 떠나다
청와대 국민 청원 게시판에는 '천종호 판사 인사 발령을 철회해달라' '계속 소년 재판만 하게 해달라' 같은 청원이 10여건 올라와 있다. 분노가 주로 지배하는 이 게시판에서는 드문 경우다.
―'소년범들의 아버지'로 불렸습니다만.
"지난 일주일간 낮에는 무기력증에 시달렸고 밤에는 잠을 못 잤어요. 삶의 기쁨이 통째로 사라진 기분이에요."
―소년 재판만 8년 하셨지요?
"2010년부터 소년범 1만3000~4000명을 만났습니다. 처음 맡았을 땐 하루 6시간 동안 아이들 100명을 처분해야 했어요. 1인당 3~5분. 그래서 '컵라면 재판'으로 불렸습니다. 성인 재판을 그렇게 했다면 변호사들이 가만 안 있겠죠. 소년 재판은 또 당일에 판결해야 해요."
―그 짧은 시간에 호통까지 치셨군요.
"3분 동안 무미건조하게 재판하면 아이들은 '소년 재판 가봤는데 별거 아니네' 이렇게 나옵니다(웃음). 호통도 치고 꿇어 앉혀 빌게도 하면서 법정의 위중함을 각인시키려 했어요."
―소년 법정에는 화장지가 상비돼 있나요.
"법정 경위가 가지고 있다가 뽑아 드립니다. 아이 부모를 비롯해 방청석에서 쓸 수 있게. (판사도 사용하는지 묻자) 저는 휴정하고 뒷방 들어가서 울고 나와요. 하하하."
―눈물의 양이 다른 법정보다 많습니까?
"형사 법정은 사실관계와 양형만 확정하면 되니 로고스(이성)가 필요한 장소죠. 소년 법정은 목적이 달라요. 사회에 불만 가진 아이들이 건전하게 성장하도록 돕는 것, 문제아를 사람 만드는 겁니다. 범죄가 아니라 한 인간을 다루죠. 로고스가 아니라 정서로 접근하니 눈물의 양이 많아집니다."
―호통 재판은 일종의 퍼포먼스군요.
"연극 보며 카타르시스 느낄 때가 있잖아요. 엄숙한 법정에서 감정이 몰입된 상태로 '사랑합니다' '죄송합니다'를 대여섯 번쯤 하면 어김없이 눈물이 터집니다. 부모를 겨냥한 것이기도 하고요. 원수처럼 여기다가도 그 순간엔 서로 가까워집니다."
―부산 여중생 폭행사건엔 국민적 관심이 높았지요. 특별한 무엇이 있었나요?
"전혀요. 소셜 미디어에 드러나 공분을 샀을 뿐 비슷한 사건은 최근에도 몇 건 있었어요. 과거와 다른 거라면 인정 욕구가 강해졌잖아요. 아이들이 소셜 미디어에 '좋아요'를 눌러주면 진짜 기뻐해야 할 일인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그 패턴에 반응하는 거죠. 그만큼 외롭고, 기댈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얼마나 심각한지요.
"비행 청소년의 70%는 결손 가정이나 빈곤층입니다. 보호자에게 따뜻한 사랑을 받지 못한 경우가 많아요. 일종의 대안 가정인 청소년회복센터에 보내면 3개월 동안 폭식을 합니다. 정서적 허기를 음식으로 해결해요. 그제야 교육이 됩니다."
―피해자 A양은 어떻게 살고 있나요.
"재판 마치고 '도보 여행'을 권했어요. 멘토와 함께 8박9일간 제주 올레길을 걷는 코스입니다. 장기간 결석 후 학교에 가야 하니 불안할 거 아녜요. 뭘 도와줄까 궁리하다 '너, 내 딸 하자'며 사진 찍었어요."
"저출산 해법, '투명인간' 취급 말아야"
어려서 그는 부산 아미동 까치고개(빈민가)에서 자랐다. 산비탈 단칸방에서 아홉 식구(그가 칠 남매 중 넷째)가 살았다. 천종호 판사는 "소년범들에게도 터닝 포인트를 찾아주고 싶다"고 말했다.
―인생에 어떤 터닝 포인트가 있었나요.
"초등학교 때 육성회비 500원을 못 낼 정도였어요. 등교하기 싫었죠. 5학년 때 덜컥 반장이 됐어요. 집안 형편은 어려웠지만 학교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학도 원서 접수 마지막 날에 길에서 우연히 만난 친구가 원서를 사주는 바람에 진학(부산대 법대)할 수 있었어요. 나중에 그 이야기를 했더니 친구는 '내가 그랬나? 기억이 안 난다'는 겁니다. 우리가 어려움에 처한 아이들한테 별것 아닌 호의를 베풀지만 그 아이에겐 엄청난 터닝 포인트가 될 수 있어요."
―저서에 '법관이 들고 있는 양팔 저울은 공정과 소통'이라고 쓰셨는데.
"상대와 소통하지 않는 공정은 한계가 있어요. 소년 재판은 애프터서비스(AS)까지 해야 재비행을 막을 수 있습니다. 법정 밖에서도 그들이 보내오는 마음의 소리를 들으려고 노력해요."
―어떻게요?
"저한테 재판받은 아이 중엔 축구를 하다 돈이 없어 그만둔 경우가 많아요. 운동에서 손을 놓으면 비행으로 갈 확률이 높아져요. 그런 아이들을 데리고 2016년에 '만사(萬事)소년'이라는 축구단을 만들었습니다. 매주 목요일 모이는데 30명이 넘게 와요. 마치면 돼지국밥 한 그릇씩 먹고요."
―소속감과 안정감을 줄 수 있겠군요.
"저도 같이 축구를 하는데 아이들이 생각보다 순수해요. 딱 보면 실력 파악이 되는지, 저한테 심한 태클은 안 하더라고요(웃음). 악보 볼 줄 모르는 아이들을 4개월 합창 연습시켜 무대에 올리고 박수받게도 합니다. 그런 기간엔 비행을 잘 안 저질러요. 남에게 인정받고 소속감도 충족되니까. 그렇게 3년쯤 끌어주면 철들어요. 그때까지만 도와주면 돼요."
―밖에선 그런데 조직 내에선 소통을 안 하니 인사 조치 대상자가 된 거 아닙니까.
"하하하. 그런가 봐요."
―다리가 교통량을 지탱하는 힘(수송력)은 여러 교각의 평균값이 아니라 가장 약한 교각에 좌우된다고 하죠. 법원에서는 소년 법정이 가장 취약한 곳 같습니다.
"쇠사슬도 가장 약한 부분에서 끊어져요. 사회의 수준은 가장 높은 곳이 아니라 가장 낮은 곳에서 결정됩니다. 한국에서 비행 청소년은 어떤 계층에도 안 들어 있는 '투명인간' 같아요."
―투명인간요?
"'비행'은 범죄, '청소년'은 선거권이 없다는 뜻이에요. 그러니 처우 개선이 안 됩니다. 재판 중인 피의자를 수용하는 구치소는 전국에 다 있는데 소년 재판에서 그 역할을 하는 소년분류심사원은 6곳뿐이에요. 일본엔 52곳이 있습니다. 인구 대비 열악하기 짝이 없죠. 그냥 방치하는 거예요."
출산율이 떨어지면서 비행 청소년은 감소했다. 천 판사는 "재범률이 안 줄어든다는 게 문제"라며 "가정 불화와 해체, 게임 중독으로 심각한 아이들은 급증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저출산 문제 해법의 하나로 사회 전체가 나서야 한다"며 "소년 재판을 떠나더라도 저는 그 아이들 편"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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