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의 추억'이 불러온 안성기와 노무현

강대호 2018. 3. 30.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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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을 좋아하는 마음은 무엇일까

[오마이뉴스 강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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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내가 쓴 짜장면에 대한 글을 보고 자신의 소감을 전해주는 지인들이 있었다. 짜장면에 얽힌 기억부터 맛에 대한 공감까지 혹은 맞춤법에 관한 의견 등 같은 소재를 놓고도 다양한 감상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관련 기사 : 짜장면을 절대 자장면으로 쓰지 않겠다던 시인)

그 글 때문에 라면도 내게 연락을 했다. 섭섭하다면서. 물론 라면이 내게 이야기할 리는 없다. 내가 그 상황에 짜장면을 선택했듯이 자기는 라면을 택할 것이라는 지인들이 의견을 보낸 것이다. 그들은 라면에도 짜장면 못지않은 추억과 이야기가 담겨 있다고 했다. 사실 나도 그렇다.

어릴 적 밤늦게 들어갔는데 찬밥도 없어 미안해하시며 어머니가 끓여준 라면. 대학 시절 공깃밥 추가하여 막걸리와 먹던 라면. 군시절 봉지에 익혀 먹던 뽀글이. 그 맛을 수십 년이 흐른 지금도 잊지 못한다.

또, 처음으로 손수 끓여 먹은 라면도 잊을 수 없다. 초등학교 5학년쯤인가 어머니께서 외출하셨을 때 봉지의 설명을 뚫어져라 읽으며 겨우 끓여 먹었던 라면. 비록 물 조절에는 실패했지만, 그 뿌듯했던 맛이 아직 기억난다.

처음 끓여본 라면을 생각하니 떠오른 장면이 있다. 고등학교 때 친구 집에서 그의 여동생에게 라면을 끓여오라 했더니 30분 후쯤 내온 다 퍼져 죽이 된 라면. 중학교 1학년이던 여동생은 생애 처음으로 끓인 라면이었다며 울기 일보 직전이라 웃으며 수저로 퍼먹던 기억이 새롭다. 친구의 여동생은 지금은 50이 다 된 고3 엄마다. 라면의 달인이 되었을 것이다.

글을 쓰다 보니 라면에 담긴 추억이 쏟아져 나온다. 추억이 많아서 좋아하는지, 많이 먹다 보니 쌓인 것인지. 물론 이외수처럼 깊은 기억은 아니지만···.

그는 트위터에서,
"누가 만들었을까. 라면. 내가 개고생했던 시절에 미리 만들어 주셨으면 열흘씩 물배만 채우고 살지는 않았을 텐데. 제기럴, 지금은 몇 박스씩 쌓아두고 사는데도 죽이는 맛이네. 먹을 때마다 옛날이 생각나고 먹을 때마다 억울해지네. 때로는 목이 메이네."
라고 기억했다.

모두가 좋아하는 라면을 나는 박스나 묶음으로 사지 않는다. 그때그때 먹고 싶은 라면을 한 봉지나 두 봉지를 사는 것을 좋아한다. 많이 있으면 의도치 않게 자주 먹게 되기 때문이기도 하고. 시중에 나온 라면 종류가 너무 다양하여 골고루 먹고 싶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의 라면 취향은 한 제품을 의리있게 꾸준히 먹는 것이 아니었다. 그때그때 달랐다. 한때 '사나이 울리는' 라면을 좋아했고, 원조라고 광고하는 '친구라면'도 좋아했다. 지금은 오뚜기가 그려진 매운 라면을 좋아한다. 때론 밥 말아 먹을 때 가장 맛있다는 그 라면도 먹곤 하고. 2분만 끓이면 되기 때문이다.

우리 집 앞에는 노부부가 운영하는 슈퍼가 있는데 각종 라면을 낱개로도 판다. 집에 있는 동전을 탈탈 털어가면 2개나 적어도 1개 정도는 살 수 있어 편하다. 한때 유행한 하얀 국물 라면, 칼국수 라면도 다 섭렵했다. 짜장라면과 우동라면도 간편하긴 하지만 중국집이나 우동집에 가서 먹는 게 더 좋은 것 같다.

라면을 좋아하는 마음은 무엇일까? 아니, 맛있고, 간편한 데다 다양한 입맛을 만족시키는 라면이 가진 매력은 무엇일까? 긴장을 풀어주어 배뿐만 아니라 마음마저 포만하게 만들어 주는 따뜻함 때문은 아닐까? 잠시나마 가벼운 일탈을 경험하게 해주는 친구처럼?

오래전 영화인 <피아노 치는 대통령>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안성기가 대통령으로 나온. 늦은 밤 관저 주방에 들른 대통령이 간이 탁자에서 라면 먹는 장면이다. 주방장이 먼저 끓여준다 했는지 대통령이 먼저 끓여달라 했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대통령도 배가 고프고 마음도 헛헛하면 라면을 먹으며 위로를 받을 수도 있겠지? 라는 생각을 들게 한 장면이었다. 다른 장면이나 등장인물은 기억나지 않지만, 이 장면만큼은 가끔 떠올랐다.

평범하지만 평등해서 사랑받는 음식인가? 대통령이든 누구든 봉지에 적힌 레시피대로 끓여야 하고, 천하장사라도 후 불어 뜨거운 김을 날려야 한다. 목석같은 사람이라도 미소 짓게 만드는 라면은, 소소한 일탈을 함께 즐겨주는 어릴 적 친구처럼 마음을 놓게 만든다.

그리고 10년 전쯤 어느 전시장에서 본 사진 한 장도 떠오른다. 해외 순방길 공군 1호기 럭셔리한 탁자 위에 대령한 라면, 김밥 그리고 김치. 역시 럭셔리한 의자에 앉아 만찬에 젓가락을 대는 대통령 부부.

웃는 표정과 무표정이 대비되지만, 무척 홀가분해 보인다. 후 불며 후루룩 먹었을 순간의 순간. 그 순간만큼은 무거운 국사를 잊고 라면이 주는 포만감에 배와 마음이 불렀을까? 카펫 앞에 벗어둔 구두를 봐도 그렇고, 그랬으리라 믿고 싶다.

이 사진을 보고 작은 바람이 생겼다. 아니, 큰바람인가? 먼 훗날 우리나라의 대통령들이 퇴임 후 사저에서 커튼도 열어놓고, 편한 옷을 입고 라면 먹는 장면을 보는 것이고. 이 장면을 누군가 또 찍어서 그 훗날 추억의 앨범에서 꺼내볼 수 있는 나라에서 사는 것이다.

라면은 배를 채우며 추억의 한켠을 불러오는 앨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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