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석구석 과학사](28)4차 산업혁명, 번역 속에서 길을 잃다

2018. 3. 28.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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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차 산업혁명의 ‘제4차’와 4차 산업의 ‘4차’는 각각 영어로는 fourth와 quaternary라는 분명히 다른 단어다. 하지만 한국어로는 둘 다 ‘4차’라고 옮기는 바람에 같은 말인 양 헷갈리게 되는 것이다.

제 4차 산업혁명에 관한 일러스트 / 김상민

지난 2017년 유행한 낱말 중 가장 강한 생명력을 얻은 것이 ‘4차 산업혁명’일 것이다. 전·현직 대통령부터 동네 학원에 이르기까지 너나할 것 없이 4차 산업혁명을 거론하며 서둘러 여기에 대비하지 않으면 시대에 뒤처져 큰 낭패를 볼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대전시는 대덕연구단지가 자리 잡은 이점을 살려 ‘4차 산업혁명 특별시’를 자처하고 나섰다. 사설학원은 물론 지방자치단체나 관공서의 공식 문서에서도 ‘4차 산업 전문가 양성과정’ 같은 문구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심지어 ‘4차 혁명’이라는 말을 쓰는 곳도 종종 보인다. 4차 산업혁명, 4차 산업, 4차 혁명, 비슷하지만 달라 보이는 이 낱말들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서로 섞어 써도 괜찮은 것인가?

4차 혁명의 4, 무슨 의미일까

우선 ‘4차 혁명’부터 따져 보자. 이 낱말은 간간이 앞의 둘과 섞어 쓰긴 하지만 자주 눈에 띄지는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뿌리가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4차 혁명이라는 말은 한국 안팎에서 이론적 토대를 갖추고 쓴 적이 없는 말이다. 단지 ‘4차 산업혁명’이라고 쓰기가 귀찮아서 또는 실수로 줄여 쓴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4차 산업혁명’과 ‘4차 산업’은 어떤 관계인가?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의외로 오래전 일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1940년대부터 뭔가 새로운 기술적 변화가 눈에 띄면 “이것이 바로 네 번째 산업혁명이다”라고 부르짖는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요즘 회자되는 제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클라우스 슈밥이 다보스 포럼에서 제안한 개념이다.

지금도 확실하게 합의된 개념은 없지만, 요즘 이 말을 쓰는 사람들은 대체로 인공지능의 발달로 지금까지와는 다른 차원으로 생산성이 도약하리라는 전망을 공유하고 있다. 이것은 18세기 증기기관과 기계화, 19세기 전기와 화학, 20세기 정보화에 이은 네 번째(fourth) 산업혁명이라는 뜻이므로, 엄밀하게 번역하자면 ‘제4차 산업혁명’이라고 해야 맞다.

한편 4차 산업에서 ‘4’라는 숫자는 네 번째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1차(primary) 산업은 자연의 산물을 얻는 농림수산업을 말하고, 2차(secondary) 산업은 1차 산업의 산물을 활용하여 더 부가가치를 높이는 생산업(광업, 공업, 건설업 등)을 뜻하며, 3차(tertiary) 산업은 1차 산업과 2차 산업의 결과를 필요한 곳에 공급하여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운수업, 상업, 서비스업 등을 의미한다. 즉 여기서 ‘-차’라는 것은 단순히 시간적 또는 공간적 순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기본이고 무엇이 그 위에 쌓아올린 것인가라는 추상적인 차원을 뜻한다.

4차 산업(Quaternary Industry)이란 선진 산업국가에서 3차 산업이 경제의 대부분을 차지할 만큼 비중이 커져서 더 이상 하나의 분류군으로서의 효용을 잃게 되자 3차 산업을 세분화하자는 취지로 제안된 개념이다. 기존 3차 산업 중에서도 지식 또는 정보와 관련된 산업을 따로 떼어 4차 산업으로, 인간의 정서와 관련된 휴양이나 치유 관련 산업을 ‘5차 산업’으로 분류하자고 몇몇 학자들이 제안했으나, 아직까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개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한국에서 4차 산업이 사람들의 귀에 익게 된 것은 실은 제4차 산업혁명과 혼용된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제4차 산업혁명과 4차 산업이라는 말은 결과적으로는 정보산업이라든가 인공지능과 같이 비슷한 대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두 말의 뿌리도 다를 뿐 아니라 번역하기 전의 영어 단어도 다르다. 제4차 산업혁명의 ‘제4차’와 4차 산업의 ‘4차’는 각각 영어로는 fourth와 quaternary라는 분명히 다른 단어다. 하지만 한국어로는 둘 다 ‘4차’라고 옮기는 바람에 같은 말인 양 헷갈리게 되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10월 11일 4차 산업혁명위원회 출범식 및 1차 회의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청와대 사진기자단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지만

4차 산업이 은근슬쩍 제4차 산업혁명과 혼용되면서 사람들을 의아하게 만드는 또 다른 낱말이 ‘6차 산업’이다. 6차 산업은 농수산업을 부흥하자는 기획에 요즘 단골로 등장하는 말로, 현재 일본 도쿄대학 명예교수인 농업경제학자 이나무라 나라오미(今村奈良臣)가 제안한 개념이다. 이나무라는 침체된 일본의 1차 산업을 일으켜 세우려면 농어촌에서 식품가공업(2차 산업)과 운송 및 판매업(3차 산업)을 함께 병행하여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가가치를 농어촌에 되돌려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하면 농업은 종래의 1차 산업을 뛰어넘어 1차, 2차, 3차를 합한 6차 산업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6차 산업에서 말하는 ‘6차’는 순서인가 차원인가? 1차, 2차, 3차 산업이라 할 때 숫자들을 차원의 뜻으로 쓴 것이므로 6차 산업도 산업의 차원을 뜻하는 이름일 것이다. 굳이 번역한다면 ‘Senary Industry’가 될 테지만, 사실 이것은 일본과 한국 밖에서는 전혀 통용되지 않는 개념이므로 번역할 이유도 별로 없다(실제로 ‘senary industry’를 구글 검색하여 나오는 결과들은 거의 다 한국에서 만든 웹문서들이다).

그런데 이 정도까지 시시콜콜 따지고 들 필요가 있겠는가? 말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뜻이 중요한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제4차인지 4차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4차가 됐든 44차가 됐든 과학기술로부터 시작되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미치는 변화가 이미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닌가, 또한 6차가 됐든 66차가 됐든 침체된 농업을 살릴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좋은 것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말은 생각을 규정한다. 뭔가를 진흥하려고, 살리려고 달려들기 전에 우리가 진흥하려는 것, 살리려는 것이 무엇인지는 똑똑히 알아야 하지 않는가? 당장 수많은 보고서와 계획서를 쓰면서 제4차 산업혁명에 대비할 것인지, 4차 산업을 진흥할 것인지, 4차 혁명을 선도할 것인지, 어휘 선택에 고심하는 연구자들이 전국에 적지 않다. 현재 한국의 분위기에서 실제 연구의 내용이 무엇이든 이런 낱말을 앞장에 넣지 않는다면 연구계획서나 보고서를 받아줄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이들이 같은 듯 다른 말들 사이의 모호한 경계에서 고민하는 사이, 정작 중요한 연구에 써야 할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모든 것이 연결되어 중심과 말단의 구별이 무의미해지는 ‘초연결사회’를 대비하자는 말이 무색하게, 컨트롤타워를 자임하는 정부에서 제시하는 유행어(심지어 쓰는 사람들도 헷갈리며 섞어 쓰는)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리는 일선 연구자들을 보는 마음이 마냥 편하지는 않다.

<김태호 전북대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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