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수의 '서문이라도 읽자']문익환의 「히브리 민중사」

2018. 3. 28.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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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기교의 문학주의와는 다른 ‘문익환의 구어체’

김현으로서는 문익환 목사의 혁신적인 성경 이해와 그에 따른 가파른 삶과 염원의 시들에서 이 한반도의 기독교와 문학의 관계 맺음을 지속적으로 생각하였을 것이다.

문익환의 <히브리 민중사>
심심하면 들춰보는 책이 몇 권 있다. 연구실에 큰 책상과 그보다는 더 크고 긴, 2m50㎝쯤 되는 테이블이 있는데, 그 위에 장정일 선생의 표현대로 ‘빌린 책, 산 책, 버린(릴) 책’들이 늘 어수선하게 늘어져 있다.

이 책들 중에 서가로 올라가서 제 자리를 차지할 책은 별로 되지 않는다. 그런 책더미들 위에 그곳이 자기 자리인 양 차지하고 있는 책 몇 권이 있는데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한두 권과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키워드〉와 사진책과 그림들, 그리고 늘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가 있다.

〈행복한 책읽기〉는 문학평론가 김현이 너무 일찍 찾아온 그의 생의 마지막(그는 오십이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몇 년 동안 읽은 책에 대한 기록, 혹은 독서로 다듬은 일기다. 1986년에서 1989년 사이다.

왜 이 책을 곁에 두고 틈틈이 읽는가 하면, 바로 이 시기가 나로서는 20대 초반의 몇 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때는 거의 밥을 먹듯이, 허기를 채우듯이 그야말로 닥치는대로 책을 읽던 시기인데, 그때 내가 읽은 책과 그 기억과 판단이 40대 후반의 김현이 읽은 독후감과 어느 대목에서 일치하거나 불일치하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읽은 책의 대부분을 나도 그 무렵에 읽었지만, 당연히 내가 읽었으나 느끼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 대목이 너무나 많다. 예컨대 1987년 3월 22일자 일기에서 김현은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을 정독했다. 번역이 좋아서였겠지만, 프랑스판을 읽었을 때와는 다른 감정, 앎이라는 감정보다는 삶에서의 싸움과 연관된 감정이 더 선명히 살아났다”고 썼다. 20대 초반의 나는 당연히 이렇게 읽을 수 없었다. 그 후로는? 글쎄, 여전히 〈역사와 계급의식〉이 내 서가의 중요한 위치에 꽂혀 있기는 하다.

아무튼 그럼에도 더러는 20대 초반의 내가 지식이나 이성이나 통찰보다는 그저 어린 시절의 감각으로 느꼈던 바를 김현의 독후감에서도 발견하였을 때, 아 내가 허투루 읽지는 않았구나, 하고 안도하게 된다. 내가 좋아한 것을 그도 좋아하였고 내가 싫어한 것을 그도 싫어하였구나! 그래서 곁에 두고 심심할 때마다 펼쳐본다.

1980년대 후반의 전반적인 ‘문학적’ 흐름

그 사례가 고 문익환 목사에 관한 기록이다. 1989년 6월 25일자 일기에서 김현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문익환 목사 1918~1994
“문익환의 〈두 하늘 한 하늘〉(창비·1989)은 구어체가 그 특징이다. 구어체이기 때문에 이미지의 전개에는 무리가 없고 말의 연결은 자연스럽다. 그 자연스러움 때문에 그의 시의 소박성·순진성 등을 논의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것들이 언제나 행복한 결과만을 낳는 것은 아니다(중략). 구어체는 할 말이 웅변적이지 않으면 깊은 감명을 주지 않는다. 그것은 대개 구수함의 차원에서 끝나게 마련이다(중략). 그러나 문익환의 시를 읽은 뒤에 읽은 박청륭의 〈사막은 고장이다〉(세명·1989)는 얼마나 문학적이며 기교투성이인지, 역겨울 정도이다.”

나는 그 무렵 박청륭의 시집을 읽지는 못했다. 그러나 김현이 ‘문학적’이라고, 또 ‘기교투성이’라고 할 때의 감각이 무엇인지는 안다. ‘역겹다’는 것에 대해서는 내가 그 시집을 읽지 못했으므로 말할 수 없는 문제이지만, 80년대 후반의 전반적인 문학 지형에서 ‘문학적’인 흐름들 특히 ‘기교적’인 흐름들이 어떤 풍경이었는지를 20대 초반에 생생히 목격하거나 읽어본 입장에서 문익환의 구어체에 대한 김현의 독후감에 배어 있는 신뢰를 나는 묵직하게 느낀다.

문학이 문학 이전에 있어야 하며 ‘문학적’인 것이나 ‘기교적’인 것에 사로잡히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큰 틀에서 그리고 ‘창비’ 그룹과 대별하였건대, ‘문학주의’를 대변하는 ‘문학과지성’ 그룹의 대표자로서도 당연한 지침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유년시절에 기독교에 심취하였고 신학대학 진학까지 생각했던 김현으로서는 문익환 목사의 혁신적인 성경 이해와 그에 따른 가파른 삶과 염원의 시들에서 이 한반도의 기독교와 문학의 관계 맺음을 지속적으로 생각하였을 것이다.

구약성서를 번역하며 체득한 구어체

문 목사의 신학적 생애와 깊이가 조금은 덜 알려지기도 했는데, 실은 문익환 목사는 1947년 목사 안수를 받았고, 1955년부터 1970년까지 서울 한빛교회 목사로 일했으며, 무엇보다 신·구교 공동 구약 번역 책임위원을 맡아 한국 교회사에 큰 업적을 이뤘다. 일본에서 경제학을 배웠지만 이탈리아 로마와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성서연구대학원에서 성서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성신대학(지금의 가톨릭대)에서 교편을 잡은 선종완 신부와 함께 문익환 목사는 신·구교 공동 성경 번역을 책임졌다.

교황청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년) 이후 가톨릭과 그밖의 모든 기독교의 일치를 위해 성서 공동 번역을 권고하게 된다. 이를 위하여 국내의 가톨릭과 개신교도 깊은 논의 끝에 1968년 1월 ‘성서번역공동위원회’가 조직된다. 그로부터 오랜 작업이 진행되어 1971년 4월 공동번역 ‘신약성서’가 대한성서공회 이름으로 간행되었으며, 이어 1977년 4월 부활 대축일을 기해 ‘공동번역 성서’가 완성되기에 이른다. 이 작업에 개신교 측의 문익환 목사와 곽노순 목사, 그리고 가톨릭 측의 선종완 신부가 참여하여 ‘구약 번역’ 등을 이뤄낸 것이다.

문익환 목사의 옥중서한집 〈꿈이 오는 새벽녘〉에 보면, 문 목사가 장남 문호근에게 투병 중에 선종한 선 신부를 위하여 이렇게 말한다. “선 신부님 묘에 비석을 하나 세워 줘, 그 비석에 이렇게 새겨 줘. ‘하느님도 인제 한국말도 제대로 하시게 되었군요.’ 그리고 그 옆에 성경을 한 권 놓고 유리로 뚜껑을 해 덮고 ‘문익환 드림’이라고 해주고….”

앞서, 김현의 독후감이 말한 ‘문익환의 구어체’는 바로 이런 맥락 속에서 나왔다. 할아버지 목사의 구어체이기도 하고, 통일을 염원하는 노인의 ‘청승맞은’ 구어체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개신교를 대표하여 공동번역의 ‘구약’ 편을 책임진 목사로서 구약의 ‘이야기’들을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체득된 ‘구어체’ 말이다. 최근 문익환 목사의 책 〈히브리 민중사〉가 재출간되었다. 1990년에 삼민사에서 출간되었다가 꽤 오래 절판된 것을 야심만만한 실력파 1인 출판사인 정한책방이 꼼꼼하게 교열하여 새로 냈다. 이 책에도 정겨운 할아버지이자 청승맞은 노인이자 신실한 목사의 ‘구어체’가 담겨 있음은 물론이다. 이 책의 서문 격인 맨 앞을 보면, 교도서에 정좌한 문익환 목사의 구어체, 아니 그 정겹고 눈물 많은 목소리가 잔잔하게 들려온다. 이 눈물의 목소리는 그 어떤 기교의 문학주의가 흉내낼 수 없는 것이다.

“공주교도소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때는 겨울이었습니다. 겨울이 되면 햇빛이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 밖에서는 상상도 못할 것입니다. 아무리 추워도 온몸을 햇빛에 노출시키고 손바닥으로 문지르지요. 맨 마지막으로 발바닥을 문지르다가 하루는 왈칵 쏟아지는 눈물을 걷잡을 길이 없었습니다(중략). 60여년 살아오는 동안 내가 언제 발바닥의 고마움을 느끼고 발바닥에 영광을 돌린 일이 있었던가? 모든 기쁨 모든 영광을 남에게 돌리면서 자신은 말없이 땅을 밟을 뿐인 발바닥에 얼굴을 대고 나는 엉엉 울었습니다.”

<정윤수 성공회대 문화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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