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레카] 합의에 의한 관계 / 임석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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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빈슨, 열아홉 여성이었다.
이 법에 걸린 이들이 한결같이 꺼내드는 방패가 '합의에 의한 관계'다.
그런데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은 본시 합의에 의한 관계다.
문제는 그 합의에 이르는 과정에서 직장 내부 상하관계, 고용관계 등에 대한 위력이 작용했느냐 여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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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미셸 빈슨, 열아홉 여성이었다. 1974년 미국 워싱턴디시 메리터 저축은행에 고용됐다. ‘잦은 병가’를 이유로 4년 뒤 해고될 때까지 직속 상사 시드니 테일러로부터 원치 않은 성적 요구를 받았다. 회사 안팎에서 공개, 비공개적으로 4년 내내 지속적으로 각종 성적 괴롭힘을 당했다. ‘40~50차례’ 성관계도 있었다. 해고된 뒤 테일러와 은행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은행 쪽은 빈슨이 이런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며 책임이 없다는 주장을 폈다. 빈슨은 해고가 두려워 회사에 항의도, 시정 요구도 할 수 없었다고 맞섰다.
하급심은 성관계에 ‘자발성’(voluntariness)이 있었다며 기각했다. 연방대법원 판단은 달랐다. 성폭력 문제에서는 ‘자발성’보다 ‘달갑지 않음’(unwelcomeness)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며 사건을 파기환송했다. 성희롱을 인정한 최초의 판결이었고, 성폭력 사건의 기념비적 판례로 남았다. ‘여성운동 대모’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성폭력법의 가장 위대한 혁신들 가운데 하나는 합의(consent)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달가움(welcome)이란 단어를 사용한 것”이라고 평했던 그 판례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받고 있는 혐의가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이다. 형법은 ‘업무·고용 등의 관계로 보호·감독 받는 사람을 위계 또는 위력으로 간음하는 죄’로 정의한다. 이 법에 걸린 이들이 한결같이 꺼내드는 방패가 ‘합의에 의한 관계’다. 그런데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은 본시 합의에 의한 관계다. 문제는 그 합의에 이르는 과정에서 직장 내부 상하관계, 고용관계 등에 대한 위력이 작용했느냐 여부다.
이런 법이 있다는 걸 아는 여성은 많지 않다. 달갑지 않은 성관계를 맺고도 딱부러지게 거부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시달리며 살아간다. 이 법의 판단 잣대도 ‘자발성’이나 ‘합의’가 아니라 ‘달갑지 않음’, ‘내키지 않음’이 돼야 하지 않을까.
임석규 논설위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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