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공휴일 지정 계기로 논란 이는 지방공휴일
정부 "타 지자체와 형평성 어긋나" 반대 입장
광주5·18, 대구2·28 등 다른 지자체도 '촉각'
미국·일본 등 해외서는 자체지정 사례 '활발'
제주도는 “지난 20일 제주도의회를 통과한 ‘제주특별자치도 4·3 희생자추념일의 지방공휴일 지정에 관한 조례’에 따라 4·3추념일인 4월 3일을 지방공휴일로 지정했다”고 24일 밝혔다. 정부가 지난 1월 해당 조례에 대한 재의요구를 통해 반대 입장을 밝힌 지방공휴일을 자체적으로 도입한 것이다.
앞서 제주도의회는 지난 20일 정부의 재의 요구로 제주도가 제출한 ‘제주특별자치도 4·3희생자추념일의 지방공휴일 지정에 관한 조례안 재의요구안’을 가결한 바 있다. 원희룡 제주도지사도 “도의회의 재의결을 제주도민의 뜻으로 존중해 수용하겠다”고 밝힌 데 이어 이튿날인 21일 해당 조례를 공포했다. 당시 제주도의회 본회의에서 재석의원 31명 전원 찬성으로 가결된 조례안은 4·3 희생자 정신과 역사적 의미를 널리 알리기 위해 매년 4월 3일을 지방공휴일로 지정하는 내용이 골자다. 휴일 적용 대상은 제주도의회와 제주도 본청·산하기관 등이다.
제주도와 제주도의회는 지방공휴일제를 시행 중인 외국의 사례를 들어 조례 제정을 추진해왔다. 일본의 경우 오키나와(沖縄)현이 자체적으로 도입한 6·23 지방공휴일이 국가공휴일로 격상된 바 있다. 1945년 6월 23일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 본토 내 유일한 지상전인 오키나와전(戰)이 종료된 날이다. 당초 오키나와는 법적 근거 없이 조례로 지방공휴일을 시행하던 중 정부가 폐지를 시도하자 지방자치법을 개정시켜 공식 공휴일로 인정받았다. 오키나와 정부는 당초 1961년 위령의 날을 제정했지만, 1972년 오키나와가 일본 본토로 복속되면서 위령의 날은 사라졌다.
이후 1974년 오키나와 주민들의 반발로 위령의 날이 재지정되면서 독자적인 지방공휴일을 도입했다. 1989년 일본 정부가 주5일 근무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오키나와현이 ‘위령의 날 폐지 조례안’을 의회에 제출했지만, 주민들의 반대로 폐기됐다. 결국 1991년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 주민들의 의사를 받아들여 지방자치법 개정을 통해 지방공휴일 지정을 허용하면서 합법적 지위를 얻었다.
김광삼 법무법인 더쌤 대표변호사는 “지방공휴일의 원만한 시행을 위해선 지방이 자치입법으로 휴일을 정하고 정부에 최종결제를 받는 방식이 가능한 법령 개정이 필요해 보인다”며 “이를 위해서는 지방자치법 또는 관공서 공휴일에 관한 규정 등 개별 법령의 개정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제주도가 지방자치단체 최초로 자체 조례에 따라 지방공휴일 지정한 것을 놓고 전국 지자체들이 주목하고 있다. 4·3과 유사한 기념일이 있는 타 자치단체들 역시 지방공휴일 지정에 관심을 보여 왔기 때문이다. 광주광역시의 5·18민주화운동이나 대구의 2·28 등이 대표적 사례다. 김양래 5·18기념재단 상임이사는 “이번 제주도의 시도가 제주도민들의 화합에 좋은 역할을 할 것으로 본다”며 “지방자치를 강화하는 최근의 정부 기조를 볼 때 5·18기념일을 지방공휴일로 추진하는 것도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정일수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사무총장은 “지방공휴일 지정을 위한 각 지역의 움직임에 따라 충분히 논의할만한 가치가 있는 사안”이라고 말했다.
강영진 제주도 공보관은 “정부가 ‘효력정지가처분신청’을 할 경우 지방공휴일 시행을 막을 수도 있겠지만, 올해까지 거부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며 “대법원에 제소할 가능성은 있지만 이는 최소 2~3개월이 걸리는 만큼 올해 지방공휴일 적용에는 문제가 없어 보인다”고 밝혔다.
상당수 제주도민 역시 “혼란스럽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공휴일 적용 대상이 제주도의회와 제주도 본청·산하기관 등 공무원에 국한되는 점 때문이다.부수욱(30·제주시 회천동)씨는 “이번 공휴일을 만드는 본래 취지가 제주도민들이 심적인 여유를 갖고 4·3의 아픔을 추념하자는데 있는 것으로 안다”며 “전체 도민이 쉬지 않고 공무원 위주로 쉰다면 차라리 조례를 만들지 않는 편이 맞다고 본다”고 말했다.
제주 4·3은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발생한 소요사태와 경찰의 진압과정에서 주민이 대거 희생당한 사건이다.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를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것이 현대사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1954년까지 이어진 무력 충돌 과정에서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에 이르는 2만5000~3만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1947년 당시 통일독립을 촉구하는 대규모 3·1절 기념집회가 끝날 무렵 경찰의 발포로 젖먹이를 안은 21살 여인과 16살 학생 등 6명이 희생된 것이 사건의 도화선이 됐다. 당시 경찰은 한 어린아이가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차이는 것을 본 주변 사람들이 돌을 던지며 항의하자 시위대를 향해 총을 쐈다.
제주=최경호·최충일 기자 ckha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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