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찬수의 에코파일] 항생제 내성균 잡는 '마법의 탄환'

강찬수 2018. 3. 24.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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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균 표면에 붙어있는 T1 박테리오파지. 박테리오파지는 세균을 공격하는 바이러스다. [중앙포토]
2001년 12월 추운 겨울날 흑해 연안의 조지아(그루지야) 공화국에서는 세 명의 남자가 땔감을 줍고 있었다. 이들은 페인트 통 크기의 금속 용기를 발견했다. 금속 용기 주변만 눈이 다 녹아있어 쉽게 눈에 띄었다. 남자들은 이 뜨거운 금속 용기를 캠프로 가져가 난로처럼 사용했다. 금속 용기는 구소련 시절 임시변통으로 만든 히터였고, 그 속에는 스트론튬-90이란 물질이 들어있었다. 반감기가 28년인 방사성 동위원소였다. 몇 시간 뒤 두 명이 어지럼증과 구토 등 방사선 노출 증세를 보였고, 피부도 벗겨지기 시작했다. 황색포도상구균(Staphylococcus aureus)이 상처 부위에 침투했다. 상처가 깊은 탓인지 항생제도 말을 듣지 않았다. 이들은 조지아 수도 티빌리시의 병원으로 후송됐고, 거기서 박테리오파지(bacteriophage)를 이용한 치료를 받았다. 박테리오파지는 세균을 먹는 바이러스다. 2~3주 후 감염은 치료됐고, 이후 피부 이식 수술로 완치됐다.

항생제를 투여해도 죽지 않는 세균, 특히 인류의 골칫거리인 항생제 내성균을 박테리오파지로 다스리는 새로운 치료법이 주목을 받고 있다. 박테리오파지는 ‘세균(bacteria)을 먹는 포식자’를 의미한다. 그리스어로 "파게인(phagein)"은 “먹는다(to eat)”란 뜻이다. 일부에서는 박테리오파지 요법을 항생제 내성균을 잡는 ‘마법의 탄환(Magic bullet)’이라고까지 부른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알고 보면 박테리오파지 요법은 100년의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 지구 상에 가장 흔한 '생물체'

박테리오파지 전자현미경 사진. [중앙포토]
바이러스는 혼자서는 번식할 수도 없는 존재이지만 지구 상에서 가장 흔한 ‘생물체’다. 찻숟가락 하나 분량의 강물이나 바닷물에 100만 개 이상의 바이러스가 존재한다. 바이러스의 대부분은 박테리오파지다. 과학자들은 지구 상에 세균이 5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개쯤 존재할 것으로 추산한다. 5 곱하기 10의 30승이다. 박테리오파지는 세균 숫자의 두 배, 즉 10의 31승일 것으로 추산한다. 특히 물속에서는 세균 하나당 박테리오파지가 15~20개꼴로 존재한다. 바다 표층수에서는 세균의 20~40%가 매일 박테리오파지 공격으로 죽는다. 박테리오파지가 끊임없이 세균을 공격하고 파괴해서 세균 세포 속 영양물질을 배출하도록 하고, 다른 세균이 이를 먹고 자랄 수 있게 한다. 사실 우리 장(腸) 속에서도 박테리오파지가 활동하면서 매일 엄청난 숫자의 세균을 죽이고 있지만, 사람 건강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 미생물학자들이 바이러스를 발견한 것은 19세기이고, 박테리오파지도 1880년대에 존재가 알려졌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박테리오파지를 발견한 것은 1915년 영국의 프레더릭 트워트(Frederick Twort)와 1917년 프랑스계 캐나다 사람인 펠릭스 데렐(Felix d'Herelle)이었다.
박테리오파지가 세균 세포를 공격하는 과정
전자현미경으로 보면 세균의 표면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박테리오파지는 ‘달착륙선’을 연상하게 하는 모양이다. 단백질로 이뤄진 껍질 속에는 유전물질인 DNA 혹은 RNA가 들어있다. 박테리오파지가 번식하려면 살아있는 세균 세포가 필요하다. 세균 세포 안으로 침투해 세균의 효소와 단백질을 낚아채, 박테리오파지의 '부품'인 DNA와 단백질을 대량 생산하는 공장으로 바꿔놓는다. 세포 안에서 DNA와 단백질로 수백, 수천 개의 박테리오파지가 조립되면 이들은 세포를 파괴하고 외부로 퍼져 나가 다시 다른 세균을 공격한다.
━ 안전성 증명 위해 가족에게 투여하기도
박테리오파지를 사실상 처음 발견한 펠렉스 데렐 [중앙포토]
1930년대까지는 페니실린 등 세균을 죽이는 항생제가 개발되지 않았다. 당시에는 상처가 나서 감염이 되면 상처 부위를 깨끗이 씻는 것이 유일한 수단이었고, 그래도 안 되면 사지를 절단할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환자가 사망했다. 100년 전인 1917년 데렐은 박테리오파지를 발견하자마자 세균 감염병 치료에 사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1919년 여름 프랑스에서 살모넬라균에 의한 가금(家禽)티푸스가 발생했을 때, 닭에게 박테리오파지를 투여해 성공을 거뒀다. 치사율도 낮췄고, 발병 기간도 줄였다. 몇 년 후 데렐은 세균성 이질을 앓고 있는 12세 소년에게 박테리오파지를 투여했고, 2~3일 뒤 소년은 회복했다. 다른 세 명에게도 투여해 치료에 성공했다. 이에 앞서 데렐은 안전성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과 가족들, 동료 연구진들에게 박테리오파지를 주사하기도 했다. 데렐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일할 때에는 수에즈 운하를 지나면서 선(線)페스트에 걸린 4명의 환자에게 박테리오파지를 투여했고, 병을 치료하는 데 성공했다. 부어오른 림프샘의 가래톳에 박테리오파지를 주사한 것이다. 이 같은 데렐의 이야기는 싱클레어 루이스가 ‘애로스미스(Arrowsmith)’라는 제목의 소설의 모태가 됐고, 이 소설로 루이스는 1924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1931년에는 소설이 할리우드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 동구에서 꽃 피운 박테리오파지 요법
조지아 공화국 수도 티빌리시에 있는 엘리아바 연구소에서 연구원이 박테리오파지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 엘리아바연구소]
박테리오파지 요법은 1940년대부터 점차 시들해졌다. 박테리오파지 자체에 대한 과학적인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치료 현장에서 박테리오파지를 다루기가 쉽지 않았다. 더욱이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항생제가 등장하면서 박테리오파지 치료법은 관심에서 멀어졌다.

하지만 동유럽에서는 냉전 시대를 거치면서 지속해서 연구가 이어졌다. 데렐은 1930년대 스탈린의 초청으로 소련을 방문했고, 박테리오파지 요법도 전수했다. 그는 게오르그 엘리아바 교수가 조지아 수도 트빌리시에 엘리아바 연구소 창립하는 것을 도왔다.

엘리아바 교수는 1937년 국가보안위원회(KGB)의 전신이자 비밀경찰인 내무인민위원회(NKVD)에 의해 처형됐지만, 박테리오파지 요법은 살아남았다. 1963년 엘리아바연구소는 트빌리시 어린이 3만 명을 대상으로 대규모 실험도 진행했다. 길을 가운데 두고 한쪽에 사는 어린이들에게는 시겔라 균을 죽이는 박테리오파지를, 다른 쪽에 사는 아이들에게는 설탕으로 만든 약을 투여하고 109일 동안 추적했다. 그 결과 박테리오파지를 투여한 쪽에서는 세균성 이질 발생률이 1000명 중 1.8명이었지만, 설탕을 준 쪽에서는 1000명당 6.7명이 병에 걸렸다. 뚜렷한 차이를 보인 것이다. 엘리아바연구소는 1980년대에 1200명의 직원이 매일 2t의 박테리오파지를 생산할 정도로 번성했다. 하지만 조지아 내전(1988~1993년) 때 연구소는 크게 피해를 보았고, 박테리오파지 샘플과 카탈로그도 사라졌다. 1994년 이후 연구소는 민영화됐고. 박테리오파지 연구도 재개됐다.

━ 서구에서는 사람에겐 아직 사용 못 해
세균 세포에 붙어있는 박테리오파지. 파란색이 박테리오파지다. [중앙포토]
동구에서 진행된 박테리오파지 요법은 1989년 소련이 무너진 이후 서구에도 알려졌고, 이제는 서구에서도 비교적 활발하게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현재까지 미국이나 유럽연합(EU)에서 박테리오파지를 직접 인체에 투여하도록 허가한 사례는 없다. 다만 치즈나 육류 가공 공장 청정실 등에서 식중독을 일으키는 리스테리아(Listeria) 균을 제거하는 용도로 사용되며, 육류 제품에서 박테리오파지가 검출되지 않도록 하고 있다. 미국 식품의약청(FDA)은 2006년 6종의 박테리오파지를 섞어 만든 스프레이를 GRAS(Generally Recognized as Safe, 일반적으로 안전하다고 인정하는 물질)로 허가했다. 이는 경험과 훈련을 거친 전문가들이 과학적 절차를 통해 정해진 사용조건 아래에서 사용했을 때 안전하다고 판단되는 물질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치료를 위한 연구는 계속되고 있다. 2012년 아일랜드의 코르크 대학연구팀은 슈도모나스(Pseudomonas aeruginosa) 균을 죽이기 위해 박테리오파지를 연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폐에 점액이 쌓이는 낭성 섬유증(cystic fibrosis) 환자들은 항생제 내성을 지닌 슈도모나스 균에 감염되는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연구팀은 실제 환자가 아닌 감염 상황을 모사한 조건에서 박테리오파지가 균을 죽이는 데 효과가 있음을 확인했다. 2013년 유럽연합(EU)은 세균 감염이 진행된 화상의 치료에 박테리오파지를 활용하는 방안을 연구하는 데 연구비를 지원했다. 2014년 미국 피츠버그대학 연구팀은 결핵균(Mycobacterium tuberculosis)을 죽이는 다양한 박테리오파지가 존재하고, 이들을 활용할 경우 결핵 전염을 차단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국내에서도 양계장에서 가금티푸스를 일으키는 살모넬라(Salmonella enterica Gallinarum) 균이나 느타리버섯에 갈반병을 일으키는 슈도모나스(Pseudomonas tolaasii) 균을 공격하는 박테리오파지에 대한 연구가 진행된 바 있다.

━ 급증하는 항생제 내성에 대한 해결책

바실러스 균이 자란 배지 위에 투명한 구역(위쪽 가운데)을 만든 박테리오파지 [중앙포토]
항생제 내성균으로 인한 피해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미국에서는 매년 9만4000명 정도가 항생제 메티실린에 내성을 가진 황색포도상구균(MRSA, methicillin-resistant strains of Staphylococcus aureus)에 감염되고, 이 중 1만9000명 정도가 사망한다. 이를 포함해 미국 내에서는 항생제 내성으로 인한 전체 사망자가 연간 2만3000명에 이른다. 항생제 내성으로 인한 치료비용도 연간 550억 달러(약 60조 원)에 이른다. 2016년 영국 정부가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항생제 내성으로 인한 사망자가 연간 70만 명이나 된다. 2050년에는 연간 사망자는 1000만 명, 치료비용은 100조 달러로 늘어날 전망이다. 하지만 새로운 항생제 개발은 쉽지 않다. 1983~97년 사이 미국 FDA는 16종의 새 항생제를 허가했는데, 2010~2016년 사이에는 6종으로 줄었다.

이런 상황에서 박테리오파지 요법을 연구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항생제 등과 비교했을 때 박테리오파지 요법의 장점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우선 ‘특이성(specificity)’을 들 수 있다. 모든 세균을 공격하는 게 아니라 특정 종류의 세균(병원균)만 골라 공격한다. 또 박테리오파지가 증식하는 곳이 바로 감염이 일어난 바로 그 장소라는 점이다. 박테리오파지가 필요한 곳에서 계속 세균을 죽이면서 숫자를 불리는 것이다. 세균이 두꺼운 생물 막(biofilm) 형태로 자랐을 때 항생제의 경우는 겉에 있는 세균만 죽일 뿐 생물 막 내부의 세균은 죽일 수 없다. 반면 박테리오파지는 겉에서부터 차례차례 공격하면서 들어가 생물 막 전체를 파괴할 수 있다. 별다른 부작용도 없다. 다만 세균이 죽으면서 배출한 독소(endotoxin)로 인한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으나, 항생제를 사용할 때도 나타나는 부작용이다.

━ 돌연변이 세균이 공격을 피할 수도
대장균이 자란 배지 위에 투명한 구역을 낸 것은 박테리오파지인 람다 파지가 대장균을 공격했기 때문이다. [중앙포토]
박테리오파지 요법에 대한 우려도 없지 않다. 세균 자체가 돌연변이를 일으켜 박테리오파지에 대한 저항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박테리오파지가 너무 많이 몸 안에 돌아다닐 때 예상치 못한 면역반응이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문제점들도 점차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세균이 돌연변이를 일으켜 박테리오파지의 공격을 피한다면, 돌연변이를 일으킨 박테리오파지를 찾아내 돌연변이 세균을 공격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서는 연구자들이 박테리오파지 DNA에 원하는 유전자를 넣는 등 새로운 박테리오파지를 인위적으로 개발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황색포도상구균을 공격해서 죽이더라도 세균 세포를 완전히 파괴하지는 않는 박테리오파지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 박테리오파지에 의해 세균이 죽더라도 독소를 배출하지 않아 부작용도 나타나지 않게 된다. 한편에서는 박테리오파지가 만드는 특정 단백질, 즉 세균 세포를 파괴할 수 있는 단백질을 대량 생산해 박테리오파지 대신에 단백질만 감염 부위에 투여하는 방법도 연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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