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안된다'면 안되는 것..성폭력 '저항' 아닌 '동의' 물어야"

박보희 기자 2018. 3. 24.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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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 [Law&Life-동의 없는 성관계 ①] 법원이 해석한 '폭행·협박' 기준..피해자 상황 고려한 현실적 '법 해석' 필요


"성폭행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상대방이 동의했는가?' 이것 하나뿐이다. 어떤 상황, 환경에 놓였건 '안 된다'고 하면 정말 '안 되는 것'이다. '동의'에 관해 두 사람의 주장이 매우 다르면…그게 바로 강간이다."(2016년, 마빈 주커 판사, 케나다 온타리오 법원)

"강간죄 성립을 위한 폭행·협박은 피해자의 항거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것이어야 한다…성관계가 피해자의 내심에 반해 이뤄진 것으로 보이지만 강압적 수단에 이르렀다고 볼 수 없다."(2017년, 성폭행 사건 판결문 중, 서울중앙지법)

'내심에 반하는 성관계'에 대해 한국과 케나다의 두 판사는 서로 다른 판결을 내놨다. 한국 판사는 '동의하지 않은 성관계를 했다'면서도 성폭행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피해자의 저항이 부족했다고 본 것이다. 이같은 판결에 피해자들은 "저항하다 맞아 죽기라도 해야 성폭행 피해자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냐"고 반문한다. 이같은 지적이 이어지자 국회와 정부는 '동의하지 않은 성관계'는 성폭행으로 인정하는방향의 법 개정 방안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피해자에게 '얼마나 저항했느냐'를 물을 것이 아니라 가해자에게 '동의가 있었느냐'를 묻는 것이 성폭력 판단의 기준이 돼야한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있다.

◇"저항하다 맞아 죽기라도 해야 충분히 저항한 것인가?"

A씨는 B씨를 성폭행으로 고소했지만 B씨는 무죄 선고를 받았다. 재판부는 성관계가 있었고, 심지어 A씨가 '소극적 저항'을 했다고 인정하면서도 B씨가 A씨의 거부를 '몰랐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판사가 볼 때 A씨가 저항을 한 것은 맞는데, B씨가 몰랐을 수 있으니 무죄라는 것이다.

성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는 C씨는 "분명히 싫다고 말했다"며 "둘만 있는 상황에서 싫다고 말하는 것조차 무서웠고 잘못해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들어 공포스러웠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 생각해도 뭘 더 어떻게 했어야하는지 모르겠는데, 맞아 죽을 각오로 저항하지 않으면 성폭력이 아닌 것이냐"며 "그렇다면 차라리 법원이 이정도는 해야 성폭력에 해당한다고 '저항 가이드라인'이라도 만들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현행법상 강간과 강제추행은 '폭행 또는 협박'이라는 전제가 붙는다. 폭행·협박이 어느 정도여야 한다는 기준은 없지만 법원은 '반항이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한 정도'를 기준으로 삼는다. 법원이 '소극적 저항'과 '내심에 반하는 성관계'가 이뤄졌다면서도 무죄를 선고하는 이유다. 사건을 맡은 판사가 기대하는 수준 이상의 '저항'을 해야 피해자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직장내 성범죄의 경우 협박·폭행이 없었더라도 '업무상 위력'에 의한 성폭력을 적용해 처벌할 수는 있다. 문제는 업무상 위력 관계 역시 판사의 주관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이다. 한 성폭력 전담 국선변호사는 "업무상 위력에 대한 시각이 제각각"이라며 "직장 상사면 업무상 위력관계가 인정될 것 같지만, 형식적인 조직도를 보고 위력관계가 아니라며 무죄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

예를들어 팀장이 팀원을 성추행해 '위력에 의한 추행' 혐의로 재판을 받는 경우, 팀장이 한 인사평가를 근거로 부장이 인사 조치를 내리는 상황이더라도 형식적인 인사권은 부장이 가지고 있으니 팀장과 팀원은 업무상 위력관계가 아니고, 따라서 업무상 위력에 의한 추행은 무죄라는 식의 판결이 나온다는 얘기다.

◇'저항 아닌 동의로' 법개정 논의 시작했지만…"사법부 현실적인 법해석 필요"

전문가들은 결국 어떤 경우라도 '당사자의 동의'가 성폭력 여부를 가르는 기준이 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같은 지적이 이어지자 정부와 국회 역시 관련 법 개정을 논의 중이다.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은 지난 19일 국회에서 열린 제1차 여성가족위원회 성희롱·성폭력 근절대책 관련 현안보고에서 "명시적 폭행이나 협박이 없었어도 피해자가 동의하지 않은 성관계라면 강간죄가 성립할 수 있는 방향으로 법 개정이 이뤄질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국회에서도 법 개정안이 발의됐다. 홍철호 자유한국당 의원은 "폭행 또는 협박 정도의 기준은 각 상황마다 달라 일괄적으로 적용하는데 한계가 있다"며 '사람의 의사에 반하는 경우'를 성폭력 범죄 요건에 포함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강창일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상대방의 명시적 동의 없이 이뤄진 성관계는 강간죄로 처벌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개정안을 발의했다.

법 개정이 추진 중이지만 사법부의 법 해석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법 개정은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 당장 법원의 법 해석에 따라 피해자 구제와 가해자 처벌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강 의원 측은 개정안을 발의하며 "형법에는 폭행, 협박의 정도에 관한 명시적 규정이 없는데도 판례는 '피해자의 반항이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한 정도'일 것을 요구하고 있다"며 "이로인해 가해자의 강간 여부가 아니라 피해자의 구조 요청이나 반항 유무가 중점이 돼 2차 피해를 일으킨다"며 고 지적했다.

법 자체도 문제지만 법원의 법 해석 역시 문제가 있다는 얘기다. 성폭력 피해자 사건 담당 경험이 많은 한 변호사 역시 "성폭력 사건의 경우 어떤 판사를 만났는지에 따라 결과가 전혀 달라진다"며 "판사가 피해자의 상황과 현실을 직시한다면 다른 판례들이 충분히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보희 기자 tanbbang15@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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