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역사가 망친' 재일동포의 처절한 삶

김향미 기자 2018. 3. 23.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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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파친코 1·2
ㆍ이민진 지음·이미정 옮김 | 문학사상 | 368쪽(1권), 400쪽(2권) | 각 1만4500원

재일동포 3세 최강이자씨가 2016년 6월 일본 가와사키에서 일어난 일본 우익들의 혐한시위에 맞서 항의발언을 하다가 울음을 터뜨리고 있다. 연합뉴스

선 밖에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위협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인은 선 밖에 있었다. 해방 이후에도 일본이라는 땅에서는, 변함 없는 사실이었다. <파친코>는 차별받는 재일동포(자이니치)들의 처절한 삶을 기록한 소설로, 지난해 전미도서상 최종후보작에 오르는 등 미국 문학계에서 큰 화제를 모았다.

한국계 1.5세 미국 작가 이민진(50)은 대학생이던 1989년 개신교 선교사를 통해 재일동포들이 겪는 차별에 대해 처음 접했다. 그로부터 약 30년. “일본에서 살아가는 조선인들의 삶 대부분이 경시당하고 부인당하고 지워진다는 이야기를 글로 써야 한다는 고집스러운 (작가의) 믿음”은 변하지 않았고, 2권짜리 장편소설이 탄생했다.

소설은 일제강점기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한 가족의 삶을 4대에 걸쳐 따라간다. 부산 영도에 살았던 훈이와 양진. 언청이에 다리도 불편했던 훈이와 가난한 탓에 그에게 시집을 온 양진은 몇 번의 유산 끝에 딸 순자를 낳는다.

‘정상’으로 태어난 순자는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랐지만, 열여섯에 야쿠자였던 30대 중반의 생선 중매상 고한수와 사랑에 빠져 임신을 한다. 고한수는 유부남이었고, 그의 ‘첩’이 되길 거부한 순자는 젊은 목사 백이삭과 결혼해 일본 오사카로 떠난다.

이야기는 순자가 한수의 핏줄인 노아와 이삭의 핏줄인 모자수 등 두 아들을 낳아 기르고, 모자수의 아들 솔로몬이 성인이 될 때까지 이어진다. 시간이 흘러 전쟁이 끝나고, 가난도 차츰 그들의 삶에서 사라졌다. 명문대인 와세다대에 진학해 영문학을 공부한 노아는 자신의 후원자였던 고한수가 아버지이자 야쿠자란 사실에 충격을 받아 가족을 떠난다. 일본인이 되고 싶었던 노아는 조선인이란 정체를 숨긴 채 파친코에서 일하다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모자수는 파친코 사업을 해 성공하지만, 주류가 될 순 없었다. 미국 유학까지 한 솔로몬은 은행에 취업했으나 이용만 당한 채 해고되고, 모자수의 파친코 사업을 물려받기로 한다.

“파친코는 운명을 알 수 없는 도박이라는 점에서 재일교포들의 삶을 상징하는 좋은 은유”(김성곤 서울대 명예교수)다. 재일동포들은 파친코와 야쿠자에 연루됐다. 조선인들은 다른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고등교육을 받은 조선인들도 마찬가지였다. 파친코와 야쿠자는 폭력적 이미지를 띤다. 파친코 사업을 하면서 정당한 세금을 내고 기부를 해도 그 이미지는 배제의 이유가 됐다.

7살 때부터 미국에서 산 작가는 예일대 역사학과를 나와 조지타운대 로스쿨을 졸업한 후 기업 변호사로 활동했다. 한인 이민 사회의 성공 모델이기도 했던 작가는 2004년 단편 ‘행복의 축(Axis of Happiness)’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8년 첫 장편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Free Food for Millionaires)>이 한국을 비롯해 11개국에 번역·출간되면서 이름을 알렸다. 일본계 미국인 남편을 따라 2007년부터 4년간 일본에 살면서 <파친코>의 뼈대를 완성했다.

도쿄의 파친코 가게. 위키피디아 Photo by by Michael Maggs

작가는 <파친코>에서 신분 상승 욕구를 발현했던 재미동포와 달리 정체성 그 자체만으로 사회적·경제적 사다리 밑에서 신음했던 재일동포들의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려 했다. 단적인 예가 작가가 직접 들었던 조선인 중학생 투신 사건을 극화한 것이다.

작품 속 배경은 1976년 요코하마. 모자수의 일본인 친구이자 경찰인 하루키는 조선인 중학생 투신 자살 사건을 맡게 된다. 이 학생의 졸업앨범에는 이런 메모가 쓰여 있었다. ‘죽어버려, 못생긴 조선인’ ‘보조비 챙길 생각하지마’ ‘방귀 냄새 나는 가난한 인간들’…. 이야기를 들은 모자수의 반응은 이랬다. “이 나라는 변하지 않아. 나 같은 조선인들은 이 나라를 떠날 수도 없어. 우리가 어디로 가겠어? (중략) 서울에서는 나 같은 사람은 일본인 새끼라고 불러. 일본에서는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아무리 근사하게 차려 입어도 더러운 조선인 소리를 듣고. 대체 우리 보고 어떡하라는 거야? 북한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굶어 죽거나 공포에 떨고 있어.”

<파친코>의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한계와 굴레에 갇혀 살아간다. 선천적 장애와 가난, 이민자라는 정체성은 그들에게 ‘삶의 선택권’을 앗아간다. 그럼에도 투쟁적으로 살아온 한 가족의 이야기가 한 편의 드라마로 펼쳐진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는 소설의 첫 문장은 이 소설의 주제와도 같다.

<김향미 기자 sokh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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