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도 오빠 허락 받으라고?

성현석 기자 2018. 3. 23.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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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광장으로 나온 '미투'..'2018분 이어 말하기' 이틀째

[성현석 기자]

 

"5살 때부터 아버지에 의해 지속적 성폭력을 겪었습니다. 아버지는 섹스를 사랑이라 했고, 사랑이 하고 싶으냐고 내게 물었습니다. 침대에 불렀습니다. 13살이 돼 처음으로 싫다고 말했습니다. 나만의 기억이고 잊으면 좋겠지만, 그럼 저들의 잘못은 어디로 가나요. 잊을 수도 없었고 말할 수도 없었습니다.

얼마 전 어머니에게 처음 말했을 때 어머니는 '그럴 리 없다'고 했습니다. 고아가 된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세상이 변한다고 합니다. 들으십시오. 나는 살아남았습니다. 앞으로도 살아나갈 것입니다. 조금이나마 이런 나의 용기가 당신의 용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기차에서 잠들었다가 허벅지가 뜨끈해져서 깨어보니, 옆의 남자가 내 허벅지를 만지고 있었습니다. '이놈, 뭐 하는 거야' 소리쳤습니다. 승무원이 왔고, 그 자리에서 사과를 받기로 했습니다. 그놈이 바로 무릎을 꿇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알고 있습니다. 그 일은 전혀 사소하지 않다는 것을.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던 사람이 이제 뉴스에 나옵니다. 당신들은 거장이 아닙니다. 가해자이고 범죄자일 뿐입니다.

아직 알려지지 않은 가해자, 자신의 가해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가해자. 모든 이들은 두려워하십시오. 뒤에 숨어서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이들, 두려워하십시오. 당신들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우리는 말할 수 있고 말할 것입니다.”

"'미투(Me too)'는 성범죄 고발 운동입니다. 진보 역시 성역이 아닙니다. 피해자 입장에선 보수든 진보든 가해자일 뿐입니다. '미투'는 정치공작이 아닙니다."

광장을 빗질하는 스산한 바람도 문득문득 움찔대는 듯했다. 광장 담벼락 대자보에선 고름이 흘러내렸다.

지난 22일 오전 9시 22분부터 서울 청계광장에서 진행된 '2018분의 이어 말하기' 행사. 밤을 꼬박 새우면서도 발언자는 끊이지 않았다. 23일 오후 7시까지 진행되는 행사를 다 지켜보기란, 확실히 무리였다. 평생 숨겼던 상처가 광장에서 드러날 때마다, 펜을 잡은 손에서 힘이 풀렸다.

가족으로부터 겪은 성폭력, 강간으로 인한 임신과 출산, 성희롱에 맞서니까 돌아온 보복. 광장에서 마이크를 든 여성들의 사연은 중년 남성 기자의 상상 범위를 가뿐히 넘어섰다. 동시에 광장은 거대한 발전소였다. 상처가 드러날 때마다 격려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때마다 찌릿찌릿, 새로운 전기가 참가자들을 휘감았다.

이 행사는 340여 개 여성·노동·시민단체들로 구성된 '미투 운동과 함께하는 시민행동'이 마련했다. 온라인 혹은 오프라인으로 신청한 참가자들이 성폭력 피해 체험을 토로하고 위로받는 자리다. 기억 아래 잠겨 있던 상처가 목으로 터져 나오는 것만으로도 고통이 줄어든다. 남성들에겐 한국 사회에 만연한 성폭력을 생생하게 배우고 느끼는 자리다.

광장 한편엔 자유롭게 벽보를 붙일 수 있다. 직장, 학교, 학원 등에서 겪는 성추행 사례가 적나라하다. 예컨대 이런 내용.

"어리고 예쁜 신입 간호사의 허리는, 무릎은, 가슴은 왜 자유롭지 못한가? 그것도 늙은 60대 원장의 손에, 40대 과장의 손에, 30대 레지던트의 손에. 직장에선 일만 하고 싶습니다."

한 남성이 붙인 글도 있다. "여성만 힘든 게 아니다"라는 내용이다. 반박 문구가 적힌 포스트잇이 잔뜩 붙었다.

이런 벽보도 있다.

"여성 인권이 높아지면, 남성도 더 살기 좋아집니다."

여성들의 피해 호소가, 실은 권력 문제라는 지적이다. 상대적 약자인 여성의 지위가 올라가면, 약자 일반의 처지도 개선된다는 이야기.

"오빠가 허락하는 페미니즘? 무식한 소리 마라!"


이런 글도 눈에 띈다. 무대의 발언 중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었다. 성폭력 피해 여성들의 응어리 진 외침마저, 주류 엘리트 남성의 언어로 해석해야 직성이 풀린다는 이들이 있다. 그러면 안 된다는 지적이다.

조직 안에서 성폭력 사건이 터졌을 때, 윗사람의 섣부른 개입이 오히려 상처를 키운다는 발언도 있었다.

'미투' 운동이 폭발한 올해를 성폭력 근절의 계기로 삼자는 취지로 마련된 '2018분의 이어 말하기' 행사는 이제 200분쯤 남았다. 퇴근길에 들르고 싶은데, 곧 끝날 것 같다고? 실망할 필요 없다. 행사가 끝난 직후인 23일 오후 7시엔 같은 장소에서 '성차별·성폭력 끝장 문화제'가 열린다.


▲ '2018분 이어 말하기' 현장 대자보. ⓒ프레시안(성현석)



성현석 기자 (mendrami@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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