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속 연습실]널뛰듯 펼쳐지는 옥타브의 폭넓은 도약..찬사와 혹평이 교차한 연주기법

조은아 피아니스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입력 2018. 3. 23.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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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죽기 4개월 전인 1886년 3월의 프란츠 리스트(1811~1886)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던 작곡가들이 있다. 베토벤은 대담하고 거침없는 연주 스타일로 특유의 광기와 격정을 토로했고, 쇼팽은 마치 벨칸토 아리아를 부르는 소프라노처럼 오른손의 유려한 호흡이 특징적이었는가 하면, 리스트는 청중을 경악하게 하는 악마적 기교로 명성이 높았다. 세 작곡가 모두 피아노를 다루는 나름의 독특한 테크닉을 발전시켰는데, 흥미로운 것은 이 기록이 고스란히 악보에 새겨져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 악보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작곡가가 선호했던 울림이라든가, 손가락의 쓰임, 심지어 신체조건과 심리적 경향까지도 얼추 가늠해 볼 수 있다.

리스트는 종종 자신의 경이로운 테크닉을 과시하기 위해 작곡을 활용했다. 곳곳에 심어놓은 전시적인 울림을 두고 당대의 음악평론가들은 “기교가 내용을 압도한다”며 비판했다. 최고의 스타성을 갖춘 이 ‘피아노의 마법사’는 ‘대중의 피상적인 선호도를 충족’시키기에 급급하다는 것이었다.

음악 사학자 윌리 아펠은 “싸구려 금색장식으로 치장한 매혹적 악상”으로 “계시처럼 시작해 서커스처럼 끝난다”며 촌철살인 비평을 서슴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은 그의 비르투오소적인 면모가 유감없이 발휘된 곡이다. 그러나 스케치부터 출판까지 장장 27년이 걸렸을 정도로 작곡가의 신중한 탐색이 담겨있는 곡이기도 하다.

이 협주곡은 시작부터 기교적이다. 오케스트라의 어둡고 짧은 도입에 이어 독주자는 갑작스러운 옥타브의 돌격으로 청중의 시선과 집중을 단박에 끌어모은다. 이렇듯 건반 위에서 널뛰듯 펼쳐지는 옥타브의 폭넓은 도약은 리스트가 가장 편애했던 대표적 연주기법이었다. 좌중을 압도하는 이 화려한 등장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악기 곁에서 수천 번 단련되었을 정확한 도약이 필요하다. 피아니스트들은 이런 패시지(경과구)에 맞닥뜨릴 때마다 손끝에 눈이 붙어있으면 좋겠다며 엄살을 부리곤 한다. 심리적으로도 그만한 맷집을 갖추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이 화려한 서막을 베토벤 협주곡과 빗대어 살펴보자. 베토벤은 체르니를 가르쳤고 리스트는 체르니에게 배웠으니, 세 사람 모두 같은 계보라 할 수 있다.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는 리스트 피아노 협주곡 1번과 동일한 조성(E♭장조)을 갖고 있는데, 이 곡 역시 초장부터 위풍당당한 음형으로 청중의 시선을 끌어모은다. 그러나 베토벤은 ‘음계와 펼친화음’처럼 보다 정밀한 음형으로 악상을 전개한다. 리스트가 위팔 등의 큰 근육을 활용해 거대한 밀집화음을 즐겨 연주했다면, 베토벤은 개별 손가락의 독립을 강조한 고른 음형을 선호하는 것이다. 이는 악기의 발달사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베토벤 시대의 피아노는 건반과 음색이 가벼웠지만, 리스트 시대는 무게와 음량 모두 육중하게 진화했기 때문이다. 리스트는 베토벤보다 음의 덩어리를 한데 섞는 ‘음향음악’의 효과에 한층 더 관심을 가졌다.

마지막 악장에선 리스트의 개인기가 총출동해 호화로운 향연을 펼친다. 어떻게 자신을 드러낼지 꿰뚫고 있던 최고의 흥행사는 결승점을 향하는 코다에서 광적인 질주를 마다하지 않는다. 마지막 페이지의 악보를 들여다보면, 건반의 전 음역을 망라하며 옥타브 반음계가 휘몰아친다. 유연한 손목을 훈련하지 않으면 연주하기 힘든 두꺼운 트레몰로가 유달리 발광하는데, 덕분에 거대한 밀집화음은 천둥과 같은 울림으로 지축을 흔든다. 마지막 화음은 길게 늘여 연주해야 할 페르마타가 붙어있다. 그 표식 위로 청중의 뜨거운 박수가 환청처럼 들리는 듯하다.

<조은아 피아니스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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