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안 하던 기특한 짓.. 아내에겐 상처였네요

입력 2018. 3. 23. 04:00 수정 2018. 3. 23.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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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한가운데 | 별별다방으로 오세요!]

늙은 남편은 마음이 변했습니다. 봄이 오듯 철이 났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이미 서늘한 가을로 걸어갑니다. 그렇게 부부는 또 한 번 엇갈리는 걸까요? 힘껏 달려 아내의 빠른 걸음을 따라잡으세요. 손잡고 같이 가을, 겨울을 지나 새봄으로 뛰어드세요. 쉽게 포기하지 말고….

홍여사 드림

지난 수요일, 점심을 먹고 들어오는 길에 평소와 달리 제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습니다. 상점 앞 매대에 진열된 색색 사탕꾸러미들.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습니다. 그렇구나. 오늘이 3월 14일 화이트데이구나.

결혼 25년차 아저씨가 화이트데이를 놓쳤다고 가슴이 철렁할 일은 아니지요. 그런데 올해는 어쩐 일일까요? 진열대 앞에서 심호흡하게 되더군요. 나도 한번 이 핑크빛 물결에 몸을 실어볼까? 아니, 그런 생각을 하기도 전에 서툰 손이 먼저 움직였습니다.

사탕을 품에 넣고 다니자니 오후 내내 가슴에 봄이 온 듯 훈훈했습니다. 그 훈기를 몰아 귀갓길에 꽃집에도 들렀죠. 워낙 꽃을 좋아하는 아내입니다. 내가 언제 마지막으로 꽃을 샀던가? 25년 전 처가에 처음 인사를 드리러 갈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네요. 그때 아내는 과일 바구니 대신 풍성한 꽃다발을 사라고 했었습니다. 엄마도 나도 꽃 앞에선 넋을 잃는 여자들이라며….

이래저래 추억에 젖는 귀갓길이었습니다. 가슴엔 사탕을, 손에는 꽃다발을 쥐고 현관에 들어섰죠. 익숙한 우리 집 냄새가 나며, 부엌 쪽에서 물소리가 들려옵니다. 오늘 같은 날은 아내가 달려나와 맞아주면 좋으련만, 언제나처럼 부엌일이 더 급합니다. '왔어요? 들어와.'

평소 같으면 옷을 벗으러 직행했겠지만, 그날은 꽃을 든 채 잠시 서 있었습니다. 이윽고 아내가 뒤를 돌아보았는데, 그 순간 유령이라도 본 듯, 놀라더군요. "엄마야. 깜짝이야. 뭐야? 꽃이네? 웬 꽃?"

저는 품에서 사탕을 꺼내고 꽃다발을 내밀며 말했습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몰라?"

제 말에 아내의 이마엔 묘한 주름이 잡히더군요.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은 모양입니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요. 생전 처음 있는 일이니까요. 저는 어서 이 꽃부터 받으라고 다발을 흔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아내는 다시 싱크대로 돌아서며 말하더군요. 별일이네. 거기다 놔!

저는 아내의 반응에 실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언제부턴가 아내는 그런 여자가 되어 있는 줄을 아니까요. 좋아도 흥, 싫어도 흥, 무슨 일로 불같이 화를 낼 때를 제외하곤 감정 표현이 무딥니다. 예전엔 소녀 같고 애교도 많은 사람이었는데, 세월이 아내를 그렇게 멋없이 둥글려놓았네요. 저는 꽃다발과 사탕을 식탁 위에 두고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갔죠. 식탁에 마주 앉을 때쯤이면 아내의 기분이 좋아져 있을 거라 믿으면서요.

하지만 그날 밤은 제 생각처럼 그렇게 훈훈하게 저물지를 않았습니다. 식사를 하는 내내 우리 사이의 공기는 점점 무거워지기만 했습니다. 꽃과 사탕은 거실의 다탁 위로 치워져 있을 뿐 아직 손대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 안에 끼워놓은 저의 짤막한 메모도 보지 못했겠지요. 혼자 기대한 바가 있었기 때문일까요? 아내의 무심함이 서운했습니다. 아니 어쩌면 단순한 무심함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설거지를 하는 뒷모습만 봐도, 접시 부딪히는 소리만 들어도 저는 압니다. 아내의 기분은 저기압 상태임이 틀림없었습니다. 일부러 모른 척하는 게 틀림없었습니다. 저는 이해가 안 갔습니다. 꽃다발을 받고 도리어 기분이 가라앉다니…. 손 부끄럽게 꽃을 사 들고 온 늙은 남편의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그래서 제가 넌지시 물었습니다. "당신 오늘 뭐 기분 안 좋은 일 있었나?"

그 말에 아내가 저보다 더 낮은 목소리로 대답하네요.

"아니! 기분 좋을 일이 딱히 없는 거뿐이야."

저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습니다. 이건 시비를 거는 거다 싶더군요. 한마디 안 할 수 없었습니다.

"꽃다발을 받아도 넋이 안 나가던가?"

그러자 아내는 일손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더군요. 제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작심한 듯 말합니다.

"당신! 안 하던 짓 하지 마. 부담스러워. 그리고 좀 비굴해 보여."

정말이지 기가 막힌 대답이었습니다. 부담이라니, 비굴이라니…. 이젠 둘만 오롯이 남은 집. 앞으로는 살갑고 다정하게 잘 지내보자는 뜻인데 그걸 '부담' 주는 짓으로 매도하다니요. 안 하던 기특한 짓을 하면 칭찬을 해야 마땅하지 비굴하다는 소리가 할 소리입니까? 저도 모르게 버럭 화를 냈습니다. 제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왔는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아내한테서 속사포처럼 쏟아져 나온 말들은 아직 귓가에 쟁쟁 울리네요. 제가 해도 해도 너무하게 무심한 남편이었답니다. 평생 꽃다발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았고, 아플 때, 동동거릴 때, 힘에 부칠 때만이라도 돌아봐 주길 바랐답니다. 그런데 저는 제 직장 일과 바깥 생활, 본가의 형제·자매 일에만 성의를 다할 뿐, 아내에게는 냉정하고 무관심했다네요. 25년 혹독한 세월 끝에 이제 겨우 무디고 센 '아줌마'로 거듭났는데 이제 와서 왜 안 하던 짓 하느냐고.

아내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버렸고, 저는 꽃다발과 함께 거실에 남았습니다. 저도 할 말은 있는데, 그 말이 아내에게는 비겁한 변명으로만 들릴 것을 알기에 저는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아내에게 쓴 메모도 내 손으로 접어버렸습니다. 남은 시간, 서로 아끼며 제2의 신혼으로 살자는 말이 저에게는 100퍼센트 진심이지만 아내에겐 가증스러운 거짓으로 들릴 테니까요.

아내 말도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닙니다. 지난 이십오 년간 저는 왜 그렇게 무디고 뭘 몰랐던 걸까요? 그러다 요즘 들어서는 또 왜 안 하던 짓을 자꾸 하게 될까요? 진열대의 사탕이 눈에 보이고, 봄꽃 향기가 코에 느껴지고, 아내가 예전에 했던 말이 문득문득 떠오릅니다. 새벽에 다리 두드리는 아내의 기척에 잠이 깨고, 앉아서 밥상을 받아 먹기가 미안해서 수저를 놓습니다.

늦게라도 철이 나는 남편을 아내가 좀 받아 줄 수는 없을까요? 안 하던 짓 하지 말라는 말이 아내의 진심일까요?

※실화를 재구성한 사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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