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찾아 유럽에 왔지만, 난 얻은 게 없다"

입력 2018. 3. 22. 21:36 수정 2018. 3. 22.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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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논픽션작가 그래픽 저널리즘
칼레 난민촌의 희망과 절망 기록
2015년에만 100만명 유럽으로
난민촌 철거에도 새 희망 탐색

[한겨레]

(※클릭하면 확대됩니다.) 2016년 3월, 프랑스 정부는 영국까지 해저터널로 이어지는 도버해협 연안도시 칼레의 난민촌을 강제철거하는 작업을 시작해 10월에 완료했다. 부서지고 불타는 임시주거시설과 집기류와 함께, 한조각 희망을 좇던 난민들의 마음도 산산조각 났다. 케이트 에번스, <그림으로 읽는 유럽의 난민>의 한 장면. 푸른지식 제공, 게티이미지뱅크

그림으로 읽는 유럽의 난민-구호 현장에서 쓴 생생한 기록
케이트 에번스 지음, 황승구 옮김/푸른지식·1만8000원

#1. 우리가 도착한 날, 러시아 전투기들이 시리아 영공을 침투했다. 그들의 표적은 ‘시리아 자유의 전사들’(바샤르 아사드 독재정권에 맞선 민병대)이었지만 민간인 사상자만 늘어난다. 피비린내 나는 내전의 포화 속에 많은 아이들이 희생됐다.(2015년 10월1일)

#2. 2016년 1월21일 자정, 세 명의 시리아 난민들이 칼레의 변두리를 걷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여섯 명이었고,(…) 곤봉을 들고 있었습니다. 총도 있었어요.” 지난 1년간 난민을 대상으로 한 심각하고도 부당한 폭행이 50건 이상 보고됐다. 가해자는 주로 경찰이나 일반 시민이었다.

#3. 아이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음식과 물도 없이 산악지방을 넘어 왔다. 터키에서 포로로 붙잡혀 있었고, 지중해에선 물에 빠져 죽을 뻔했다. 아이는 프랑스 경찰이 쏜 최루가스에 눈을 다쳤다. 7주 후에 트럭 뒤에 몸을 싣고 영국으로 떠난다. 이때 닫힌 문 때문에 산소 농도가 떨어져 아이와 열네명의 난민은 질식사할 위험에 처하게 된다.(2016년 2월18일)

위 기록들은 영국의 논픽션 만화 작가 케이트 에번스(45)가 지난해 출간한 <그림으로 읽는 유럽의 난민>의 몇 장면이다.

유럽 대륙과 영국을 갈라놓은 도버해협 아래로는 프랑스 칼레와 영국 포크스턴을 잇는 총연장 50㎞의 해저터널이 있다. 터널로는 승객용 초고속열차뿐 아니라 화물과 자동차를 실어나르는 열차도 운행한다. 덕분에 유럽 시민과 관광객들은 두 나라를 이웃마을처럼 오간다. 그러나 유럽 본토에서 영국으로 건너가려다 칼레에서 발이 묶인 난민들에게 이 해저터널은 하늘보다 높은 장벽, 심연보다 깊은 절망이다. 유엔난민기구(UNHCR)는 난민을 “인종, 종교, 국적, 특정사회집단의 구성원 신분, 또는 정치적 의견을 이유로 박해를 받을 우려 때문에 자신의 국적국 밖에 있으면서, 국적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거나 원하지 않는 자”로 정의한다. 대부분 중동과 아프리카의 분쟁지역에서 눈앞에 널린 죽음의 공포나 극심한 빈곤을 피해 고향을 등진 이들이다.

에번스는 2015년 10월 프랑스 해안도시 칼레의 난민촌에 자원봉사자로 들어온 날부터 이듬해 3월 초 난민촌 철거가 시작되기 직전까지 5개월간 수천명의 난민들과 함께 겨울을 나면서 직접 보고 들은 것들을 글과 그림으로 옮겼다. 칼레의 난민촌은 워낙 열악한 환경 탓에 ‘정글’로 불린다. “2015년 한 해에만 100만명이 넘는 난민들이 유럽에 도착했다(그 과정에서 적어도 3375명이 목숨을 잃었다).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프랑스 칼레에 도착한 수천명의 난민이 영국으로 위험한 횡단을 시도한다. 이 책은 그들의 이야기 가운데 극히 일부만 옮겨온 것”이다. 재미로 보는 만화(코믹스·comics)가 아니라 안타깝고 부조리한 현실을 드러내는 ‘그래픽 저널리즘’의 수작이다.

<그림으로 읽는 유럽의 난민-구호 현장에서 쓴 생생한 기록> 27쪽. 푸른지식 제공.
<그림으로 읽는 유럽의 난민-구호 현장에서 쓴 생생한 기록> 66쪽. 푸른지식 제공.

인물의 감정이나 동작, 사물의 움직임 외의 요소들을 과감히 생략하거나 단순화하는 전통적 출판 만화와 달리, 에번스의 그림에는 난민촌의 황량한 풍경이나 다급한 상황, 어지러운 사물들까지 세밀히 묘사한 장면들이 많다. 각 컷의 바탕은 대체로 어두운 무채색이다.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난민들의 처지와 갑자기 닥쳐온 ‘난민 홍수’가 당혹스러운 유럽의 음울한 현실이 질감으로 묻어난다.

‘유럽 난민 위기’는 2011년 ‘아랍의 봄’부터 8년째 이어지는 시리아 내전으로 촉발됐다. 유엔난민기구에 따르면, 2016년말 기준 전세계에서 자국의 국경을 넘은 난민은 2250만명으로 사상 최대 수치다. 무력충돌, 일상적 폭력, 자연재해 등으로 국내 다른 지역으로 피신하거나 쫓겨난 이들까지 합친 강제이주민은 6560만명에 이른다.

삶과 죽음, 희망과 절망이 엇갈리고, 일상과 위기, 연대와 적대가 뒤섞이는 난민촌 사람들의 삶을 지은이는 담담히 지켜보고 재현한다. 오물과 쓰레기가 나뒹구는 텐트촌에서 기약 없는 하루하루를 구호품으로 연명하는 이들의 삶은 비참하다. 그 속에서도 아이들은 진창에서 뛰어놀고 텐트 안에선 그림을 그린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하면 난민 지위 인정이 더욱 간절하지만 현실은 냉혹하기만 하다.

지은이는 그럼에도 책의 마지막 장에 ‘희망’이란 제목을 붙이고 난민에 대한 편견과 통념을 깨뜨린다. “이민자들은 당신의 일자리를 빼앗지 않는다. 이민은 경제적 성장을 이끈다. 그들은 대개 젊고 의욕적이며 열심히 일하기 때문이다. 통계적으로, 그들은 자국민들보다 국가보조금을 많이 요구하지 않는다. (…) 독일은 수천 명의 난민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것은 자선행위가 아니다. 난민으로 말미암은 경제 효과가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자국 정부에 대한 쓴소리도 빼놓지 않는다. “영국이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자행한 폭격은 각각 100만 파운드의 비용이 들어간 것으로 추산된다. 난민 위기를 촉발한 전쟁에는 자금을 동원할 수 있어도 난민의 고통을 경감하기 위한 자금은 확보하기 어려운 모양이다.”

<그림으로 읽는 유럽의 난민-구호 현장에서 쓴 생생한 기록> 101쪽. 푸른지식 제공.
<그림으로 읽는 유럽의 난민-구호 현장에서 쓴 생생한 기록> 115쪽. 푸른지식 제공.

그러나 프랑스와 영국에서 난민에 대한 장벽 쌓기는 좌·우 정권이 따로 없었다. 2016년 봄, 프랑스 사회당 정부는 영국 보수당 정부의 압박과 지원 아래 칼레 난민촌을 철거하기 시작했다. 이어, 그해 “9월21일, 영국 정부는 200만 파운드를 들여 칼레 항구 주변에 4미터 높이의 장벽을 세우는 건설을 시작한다.”

‘희망’은 새로운 장벽 앞에 끝내 무너지는 걸까? 지은이의 진단과 대안은 현실적이면서도 혁명적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조국을 떠나는 일을 막을 수 없다. 그 길이 목숨을 구하는 유일한 길이기에 더욱 그렇다. 저렴한 이민 노동자들이 영국 국민의 임금과 노동 환경을 위협할 수 없도록 막기 위하여, 우리는 ‘불법’ 이민자들을 합법화하고, 노동조합에 더 많은 권한을 줘야 하며, 최저임금제도를 제대로 시행해야 한다. (…) 수학적으로는 모든 국가적 장벽을 제거할 경우 전세계 국내총생산(GDP)이 지금의 두 배가 된다고 한다. 이는 세계경제가 성장하도록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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