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피해자서 예방강사로.. 손경이씨 "자신있게 말하라"

고양=임주언 심우삼 기자 2018. 3. 22.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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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교육 강사로 활동 중인 손경이씨가 18일 경기도 고양시의 한 카페에서 자신의 경험을 담담하게 털어놓고 있다. 고양=심우삼 기자

성교육 하면서 피해 떠올라 치유하기 위해 ‘미투’ 외쳐
용기 못내는 여성들에게 “스스로 학대 말라” 조언도

손경이(49·여)씨는 스물넷의 봄날, 성폭력 피해자가 됐다. 낯선 남자에게 끌려가 며칠 동안 붙잡혀 있다 간신히 도망 나왔다. 그 과정에서 ‘사건’이 벌어졌고 돈도 뺏겼다. 경찰이 몇 달 동안 수사했지만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손씨의 무의식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사건을 기억 뒤편으로 숨겼다.

기억은 우연한 기회에 아프게 돌아왔다. 스스로를 치유하기 위해 2007년 성폭력 생존자들의 말하기 모임에 나가 ‘미투(MeToo)’를 외쳤다. 여성학·심리학을 공부하고 성폭력 예방교육도 받아 각종 자격증도 땄다.

“제가 도움을 많이 받았던 만큼 도움을 주고 싶어요. 피해자들이 더 이상 부끄러워하거나 힘들어하지 않게. 세상이 바뀌고 있으니 더 살아보자고 말하고 싶어요.”

손씨를 지난 18일 경기도 고양 화정역 인근 카페에서 만났다. 그는 피해를 입었을 때 가족에게조차 말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범인을 잡기 위한 경찰의 고군분투가 그나마 위안이 됐다. 수사 마지막 날 ‘그래도 세상엔 좋은 사람이 더 많다’는 경찰관의 위로에 그는 펑펑 울었다.

그는 아이를 낳은 뒤 좋은 부모가 되고 싶어 부모교육과 성교육을 받다 성교육 강사가 됐다. 돌이켜보면 운명 같은 일이었다. 기억을 회복하지 못했던 새내기 강사 시절 한 초등학교에 성폭력 예방 교육을 나갔다. 5학년 교실에서 성폭력을 당했을 때 “싫어요, 안돼요”라고 말해야 한다고 강의했다. 매뉴얼대로였다. 한 여자아이가 손을 들어 “소리 못 질러요. 저는 아빠한테 성폭행을 당했어요”라고 했다. 놀란 손씨가 “여기서 그런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했더니 아이는 “그럼 어디서 이야기를 해야 하나요”고 되받았다. 울면서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빌었다.

성교육 자료만 보면 심장이 조여오고 머리가 아팠다. 6∼7개월 앓으면서 ‘기억에 구멍이 있다’고 느꼈다. 상담과 기억훈련 끝에 기억이 되살아났다. 성폭력 피해자 말하기 대회에 참가했고 성폭력 생존자 다큐멘터리 영화 ‘버라이어티 생존토크쇼’에도 출연했다. 기억을 찾는 과정은 힘들었지만 말하기를 택했던 시간은 ‘힐링’이 됐다.

성폭력 피해자 말하기는 올해 미투운동으로 확대됐다. 용기를 내는 이들이 전보다 많아진 것처럼 보인다. 그는 “피해자들이 바뀐 게 아니에요. (전에는) 들을 사람이 없었고 들을 준비가 안됐던 거죠”라고 짚었다. 피해보다 가해를 예방하는 성교육을 하게 된 것도 같은 이유다. ‘가해자가 없으면 피해자도 없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지금 미투를 하지 못하는 여성들에게는 “스스로를 학대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당장 피해를 말해야 한다고 압박감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저는 말하고 힘든 것과 침묵하며 힘든 것 중 전자를 택했지만 선택은 본인 몫이에요. 다만 선배로서 ‘말하고 나니 참 좋더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어요. 나를 지지해주는 사람이 많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고 속의 울분도 가라앉더라고요.”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는 다른 피해자들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아픔을 토닥인 것도 큰 힘이 됐다. 가장 열성적인 지지자는 아들이다. 올해 스물넷이 된 아들은 해마다 엄마가 성폭행을 당했던 무렵이 되면 여행을 가자고 제안한다. 아픈 기억 대신 즐거운 추억을 만들자는 의미다. 아들은 손씨의 성교육 대표 수강생이기도 하다. 그는 “여자와 남자의 몸과 마음은 어떻게 다른지 다 가르쳤어요. 공감능력이 키워질 수 있게요”라고 설명했다. 이런 노하우를 담아 ‘당황하지 않고 웃으면서 아들 성교육 하는 법’이라는 책도 펴냈다.

대학원에서 범죄학을 공부하고 있는 그에게 꿈을 물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손씨는 인터뷰가 끝나고 전화를 걸어왔다. “피해자들을 교육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저처럼 피해자가 직접 강의를 했을 때 오는 진실성과 호소력이 있어요. 미투와 말하기에 나섰던 분들이 먼저 교육을 받고 강사가 돼 다른 피해자들을 교육했으면 좋겠어요.”

고양=임주언 심우삼 기자 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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