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연인 머물던 자리, 자작나무 뻗다

오현주 2018. 3. 22.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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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동 '다시 봄봄봄' 전
따뜻하고 행복감 넘치는 소재들
조합·배치하며 '이상세계' 그려
26년전 노승진 노화랑 대표 만나
무명 딱지 떼고 '완판작가' 올라
11년만 회귀 노화랑서 65점 걸어
이수동의 ‘어서 오세요’(2017·위). 자작나무·구름·꽃·연인, 작가가 꾸린 행복추구조건에 드는 항목 중 낯설고 비딱한 것은 하나도 없다(사진=노화랑).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노랗고 둥글둥글, 탐스럽기 그지없는 큰 달이 화폭에 걸렸다. 뭔가 아련하고 드라마틱한 장면을 기대한 순간. 늘 그렇듯 현실은 뒤통수를 내리친다. 안다. 현실의 또 다른 말은 배신이 아니던가. 보름달 아래 길게 드리운 빨랫줄, 그 줄에 정겹게 매달린 6장의 ‘빤스’를 본 거다. 이름 하여 ‘달과 6빤스’(2011). 서머셋 몸의 소설 ‘달과 6펜스’를 패러디한 건 분명한데, 이런 유쾌한 사기극이 또 어디 있을까. 피식 웃음이 삐져나오는 순간 ‘6빤스’의 주인이 다가와 옆에 선다. 작가 이수동(59)이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 노화랑. 그는 이곳에서 개인전 ‘다시 봄봄봄’을 열고 있다. 바깥세상과는 온도가 다른 봄날을 펼쳐놓고.

약속도 없이 불현듯 들른 전시장에서 이 작가를 만난 건 순전히 그의 투철한 마케팅정신 덕이다. 전시기간 내내 그는 화랑으로 출근한다. “찾아오는 손님에게 작품 설명도 하고 팔기도 한다”는 거다. “끝까지 나를 화랑 직원으로 알고 돌아가는 이도 있다”며 웃는다. 이어 “한 해에 한 번씩 전시한다고 할 때 열한 달은 화가로, 한 달은 세일즈맨으로 산다”고까지 전한다. 스스럼없다. “화가가 근엄할 게 뭐가 있나. 예전에는 그림도 전시도 무거웠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친구와의 휴식같이 그리고, 전시한다.”

이수동의 ‘달과 6빤스’(2011). 작가의 수많은 작품 가운데 그나마 현실적인 축에 든다. 유쾌한 감각을 품고 이상세계서 내려와 현실세계로 발을 들였다(사진=노화랑).

그래서겠지. 꽃, 구름, 하늘, 달, 나무, 바다, 눈, 여행, 휴식, 길, 산책, 소파. 이 작가가 꾸린 행복추구조건에 드는 항목 중 낯설고 비딱한 것은 없다. 그는 그저 이들 조건을 붙이고 떼어내고 조합하고 배치해 이상세계를 그려내는 것이다. 물론 가끔 외도도 했다. 이상세계서 내려와 현실세계로 발을 들이는. ‘달과 6빤스’를 비롯해 ‘도전’(2016), ‘486번지’(2017) 등은 그가 그린 수많은 작품 중 현실적인 축에 든다.

△손톱만한 연인들이 펼친 ‘극단의 행복’

굳이 뽑아내자면 그림의 주인공은 한 쌍의 연인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상전을 차지한 경우는 거의 없다. 손톱만한 연인들이 꽃더미 안에서, 구름을 타고, 자작나무 숲을 부지런히 오갈 뿐이다. 특히 자작나무는 그의 오래된 아이템이라는데. 처음 자작나무를 만난 건 어느 은행로비였단다. 옛 소련을 소개한 관광가이드북에서였다. ‘딱 내 소재다’ 싶었다. “러시아에 전하는 얘기로 자작나무 껍질에 써서 날린 연서를 본 옛 연인이 다시 그 숲을 찾아온다고 하니.”

이수동의 ‘휘영청 달도 밝다’(2011). 자작나무는 작가의 오래된 아이템이다. 처음 자작나무를 만난 건 어느 은행로비. 옛 소련을 소개한 관광가이드북에서였다(사진=노화랑).

문제는 화면이 뿜어내는 감성이 보는 이를 ‘바보’로 만드는 거다. 지금 내가 어떤 처지인지를 잊게 만드는 무장해제. 소란스럽게 생색을 내지도 않는다. 작가 특유의 ‘극단적인 행복감’을 던질 뿐이다. 보는 이를 홀릴 만한 요소는 더 있다. 그림마다 친절하게 올려둔 작품명. 서양화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낙관과 사인, 그 언저리에 손글씨로 올린 그것이 참 묘한 시너지를 낸다. ‘어서 오세요’(2017), ‘오늘, 수고했어요’(2017), ‘사랑가’(2017), ‘휘영청 달도 밝다’(2011) 등.

이 손글씨는 요긴한 쓰임이 더 있다. 그림을 구입한 컬렉터에게 감사인사를 전할 때다. “고객관리 차원이냐?” 이 질문은 바로 우문이 됐다. “그림을 샀다기보다 이수동을 알았다는 게 더 중요하다는 생각에서다”란 대답을 들었으니.

작가 이수동이 서울 종로구 인사동 노화랑에 연 개인전에서 자신의 작품 ‘선심촌’(2009) 옆에 섰다. 뒤로는 ‘초대’(2017)가 보인다. 지금껏 그린 작품 수는 2000∼3000점쯤 될 거란다. “더 이상 세지 않는다. 한 해에 30∼50점 정도일 거다. 생각이 정해지면 10호 정도는 한 주쯤 걸린다. 천천히 오래 그린다”고 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무명작가’와 ‘완판작가’ 사이

2000년 드라마 ‘가을동화’에서 화가로 나온 주인공 윤준서(송승헌)의 작업실과 그림, 전시회 등을 제공한 실제작가로 알려지면서 세상은 그를 알아봤다. 하지만 생활고 해결은 어림도 없었다. 한 해에 한 차례씩 고집한 전시로 얻은 수익은 1500만원 남짓. 결국 ‘살자고’ 서울행을 결심한다. 2004년 서울, 아니 일산에 18평짜리 오피스텔을 마련하고 죽기살기로 그림만 그렸다.

그러다가 때를 만났다. 2006년 노화랑이 ‘한 집 한 그림 걸기’란 취지로 기획한 ‘작은 그림 큰마음’ 전이었다. 호당 25만원쯤 할 때 4호(33.4×24.2㎝)짜리로 출품한 50점이 개막 첫날 오전에 다 팔린 것이다. 열흘 동안 추가로 더 그린 25점을 포함해 75점을 ‘완판’(전시작을 전부 판매)했다. 몇 달 뒤 한국국제아트페어(KIAF)에 낸 42점도 완판. 그해와 이듬해는 한국미술계의 최대 호황기였다. 그 운까지 타고 그림값은 한 해 사이 2배로 뛰었다.

화업 40년. 처음부터 날아다니는 작가가 몇이나 되겠나. “앞의 20년은 떼고 40대부터 시작한 셈”이란 말처럼 이 작가는 뒤늦게 성공을 맛봤다. 요즘 작품가는 200만∼4000만원 선. 그중 500만∼1000만원 사이의 그림이 많이 팔린다고 귀띔한다.

이수동의 ‘사랑가’(2017). 자작나무·구름·꽃·연인, 작가가 꾸린 행복추구조건에 드는 항목 중 낯설고 비딱한 것은 하나도 없다(사진=노화랑).

△26년 전 인연 다시 찾아…노화랑서 11년만

대구의 무명작가를 서울의 미술시장으로 진출시킨 이는 따로 있다. 노승진(70) 노화랑 대표다. 불현듯 전화 한 통화로 대구까지 찾아온 노 대표는 뽑아내듯 그림 몇 점을 가져갔다. 불안했지만 다른 대안도 딱히 없던 때다. 그런데 얼마 뒤 믿기지 않는 소식이 들렸다. 그룹전에 걸었던 작품이 팔렸다고. 이 작가는 난생처음 그림을 팔아 목돈을 쥐어봤다. 980만원. 1992년 일이다.

26년을 거스른 두 사람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했다. 이후 ‘작가 이수동은 노화랑에서만 전시한다’는 불문율이 생겼다. 그러다가 거짓말처럼 그 줄이 뚝 끊겨버렸다. 2006년 완판신화를 쓰고, 2007년 또 한 차례 ‘완판전시’를 끝으로.

결국 노화랑으로 다시 돌아왔다. 마치 26년 전 그때처럼 노 대표가 그에게 전화를 했단다. “잘 지내시나. 얼굴 한번 보세”라며. 순간 모든 것이 정지했고, 이 작가는 그림을 챙겼다. 지난 3년여간 그린 100여점을 중심으로 노 대표가 고른 65점. 이번 전시에는 그것만 걸었다. “연어가 바다에 나갔다가 몸집이 커져 돌아온 거다”라며 옅게 웃었다. 11년 공백에서 두 사람 사이에 무엇이 있었는지는 차마 묻지 못했다.

작가 이수동이 서울 종로구 인사동 노화랑에 연 개인전에서 자신의 작품 ‘눈꽃 피다’(2017)과 ‘7월 그날’(2017) 사이에 섰다. 지금껏 그린 작품 수는 2000∼3000점쯤 될 거란다. “더 이상 세지 않는다. 한 해에 30∼50점 정도일 거다. 생각이 정해지면 10호 정도는 한 주쯤 걸린다. 천천히 오래 그린다”고 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그저 편하게 날아드는 행복이란 게 있던가. 그가 그린 수많은 ‘행복화’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인 것을. “진짜 행복하다”는 작가의 말이 허탈한 건 미덥지 않아서가 아니라 지난 세월이 먼저 보여서다. “손수건만큼만 울고 반갑게 날 맞아줘. 왜 이리 늦었냐고 그대 내게 물어오면 세월의 장난으로 이제서야 왔다고.” 나서는 길에 문득 작사가 박주연이 썼다는 ‘옛이야기’의 노랫말이 스친다. 뒤돌아보진 않았다. 그 세상을 등 뒤에 두고 현실로 내려서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전시는 30일까지.

오현주 (euanoh@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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