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가에게 '女 꼬리표'를 왜 붙이나

조상인 기자 2018. 3. 21.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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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은님·이성자·김민정 등
외국서 먼저 뜬 여성 미술가
국내서도 재조명 움직임 활발
예술원 女회원 비중 10% 불과
성별 떼고 작품만으로 평가해야
노은님 ‘먹이 찾는 새’ /서울경제DB
[서울경제] #파독 간호사 출신의 재독화가 노은님(72)이 20년 가량 작업실을 두고 있는 남부 독일 미헬슈타트의 오덴발트미술관이 영구전시실로 ‘노은님의 방’을 만들기로 하고 내년 중 개관할 예정이다. 독일의 지방정부가 한국인 작가를 위해 연구 전시장을 마련한 첫 사례다. 현재 내부공사 중인 이곳 미술관은 현지 출신의 작고 작가 3명의 이름을 딴 별도 전시실을 각각 두고 있으며 국제적인 뮤지엄 관계자들의 추천을 받아 생존작가로는 유일하게 노은님을 위한 영구 전시실을 조성하기로 했다. 1970년에 독일로 간 작가는 함부르크 미술대학에서 공부한 후 함부르크조형예술대학에서 정교수로 후학을 가르쳤다. 1980년대에 초빙교수로 온 백남준이 “독일에 있는 노은님이라는 그림 잘 그리는 여자가 있다”고 소개한 것이 한국 화단에 알려진 계기가 됐다. 지난 2016년 서울여대가 노은님 작가를 석좌교수로 임용했다.
이성자 ‘지구 반대편으로 가는 길 1월 4, 90’, 진주시립이성자미술관 소장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프랑스 지방정부는 유럽에서 활동하다 타계한 미술가 이성자(1918~2009)가 1990년 설계해 말년까지 작업한 남부도시 투레트의 아틀리에 ‘은하수’를 문화유적지로 지정하고 훼손불가 시설로 조치했다. 오는 7월부터는 투레트시립미술관에서 2개월간 이성자 회고전이 열린다. 김환기보다 먼저 파리로 갔고 이응노, 남관 등과 함께 활동한 이성자의 탄생 100주년 기념전 ‘이성자:지구 반대편으로 가는 길’이 22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개막한다. 근대기 한국 화가들이 대부분 한국화를 기반으로 해 일본 화풍을 받아들이거나 일본 유학을 통해 서양화를 접한 것과 달리 이성자는 30대이던 1951년 프랑스로 간 것을 계기로 현지에서 처음 회화의 기초를 접했다. 한국에서 미술을 전공하지 않고 프랑스로 간 그를 두고 괄시한 동료도 있었으나 오히려 그의 예술관은 선입견에 휘둘리지 않았고 한국적 정신성과 동양적 감수성을 오롯이 투영했다.

근대기와 근대화 시기 한국화단에서 수적 열세와 좁은 입지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활동해 온 여성작가들을 외국이 먼저 알아보고 있다. 이와 발맞추듯 여성미술가에 대한 국내 미술계의 재평가도 급물살을 타고 있다. 이제는 ‘여성작가’ ‘여류화가’ 등의 구시대적 표현에서 탈피해 ‘여성’ 떼고 ‘작가’로 그 실력을 차별 없이 볼 때다.

이정진 ‘파고다 98-29’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은 지난해 말 개막해 오는 4월 1일까지 덕수궁관에서 전시하는 ‘신여성 도착하다’를 통해 근대기 여성 미술인들의 활약상과 더불어 여성을 보는 당대의 시선을 펼쳐 보였다. 이성자 전시가 열리는 과천관에서는 사진작가 이정진(56)의 대규모 개인전 ‘에코-바람으로부터’가 최근 개막해 7월1일까지 열린다. 국내서 공예를 전공했으나 20대 때 뉴욕으로 가 사진을 공부한 이정진은 한지에 인화하는 독특한 재료감각과 함께 한국의 탑, 자연 등을 소재로 택해 사색적이고 시적인 자신만의 이미지를 구축했다. 한지를 향불로 태우고 그을리며 작업하는 김민정(56)은 최근 세계 최정상급 화랑인 런던 화이트큐브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남성 중심의 ‘단색화’ 열풍 속에서 그의 작업이 품은 ‘비움과 채움’의 미학을 해외 미술계가 먼저 알아봤다. 이탈리아와 프랑스 등 유럽에서 활동해 온 그는 지난 2015년 OCI미술관 개인전이 26년 만의 국내 전시였다.

‘큰언니’들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미술계가 넘어야 할 ‘여성’의 벽은 아직 높다. 예술계 최고 권위의 기관인 대한민국예술원의 회원분포가 이를 반영한다. 미술분과의 경우 천경자·윤영자 등의 유고로 회원 17명(정원 25명) 중 여성회원은 섬유예술가 이신자와 서예가 이수덕 등 단 두 명에 불과하다. 남녀 성비가 9대1 수준이다. 강승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은 “작가를 여성·남성으로 나눌 필요 없는 일이지만 그간 여성작가를 개인전 형식으로 집중 조명할 기회나 비중이 적었던 터라 그간 덜 주목한 비서구 미술과 함께 여성미술가를 의식적으로 더 챙겨보게 됐다”며 “남성중심의 헤게모니가 미술관이라는 제도적 공간에까지 연장됐던 만큼 20세기 여성작가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 요구되고 현재의 관점으로 새롭게 해석할 부분이 있어 더 발굴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김민정 ‘거리(The Street)’ /사진제공=갤러리현대
올 봄 미술관 전시에서는 주목할 만한 젊은 여성작가들의 전시가 대거 눈길을 끈다. KH바텍이 운영하는 비영리 전시공간인 서초구 ‘페리지갤러리’에서는 구동희(44)의 전시가 막을 올렸다. 일상에서 모티브를 얻되 변하는 주변 상황에 맞춰 진화하듯 변화하는 작가 특유의 색깔이 반영된 신작을 선보였다. 일민미술관이 30~40대 작가들을 힘주어 조명하는 ‘IMA 픽스’에 선정된 김아영(39)은 2015년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에 참여했던 기대주로 자의와 타의가 혼재된 ‘이주’ 문제에 관심을 두고 작품으로 구현한다. 강남구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는 김민애(37) 작가가 ‘기러기’라는 제목의 전시를 통해 미술이란 무엇인가 되묻고 있다. 에르메스재단 미술상을 수상한 작가 정금형(37)은 ‘송은아트스페이스’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열고 신작을 선보였다.

아트컨설팅 회사를 이끌며 대림미술관,송은문화재단 등과 협업한 로렌시나 화란트-리 로렌스제프리스 대표는 “송은미술대상을 예로 들면 2011년 이후 여·남 비율이 6대4 정도로 여성작가의 두각이 수치로 나타난다”면서 “과거 전업작가로 남성이 많을 수밖에 없던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지만 이제는 역량있는 (여성)작가들이 20~30대의 활동 시작점에서부터 50~60대 이후까지 지속적으로 활발한 작업을 할 수 있도록 시스템적 뒷받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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