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가 신라의 수도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오마이뉴스 김희태 기자]
역사를 돌아보면 여러 유형의 제왕들이 있는데, 태조 이성계(재위 1392~1398)처럼 나라를 개국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던 왕이 있는가 하면, 태종 이방원(재위 1400~1418)처럼 왕권 강화를 통해 위협의 싹을 잘라버리는 왕도 존재했다. 태조의 경우 장수로서의 능력은 출중했지만, 왕이 된 이후의 행적을 보면 그 능력이 살리지 못한 경우다.
반면 태종의 경우 왕으로서의 능력이 더 앞선 경우인데, 외척을 비롯한 공신 세력에 대한 숙청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 안정된 조선을 아들인 세종(재위 1418~1450)에게 물려줬다. 이러한 기반에서 세종 대에 조선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은 신라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삼국통일과 나당전쟁의 승리를 통해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는 점에서 '창업'에 해당하는 문무왕에 비해 신문왕은 신라를 안정화시키고 번영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수성'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오늘은 왕권 강화를 통해 신라 중대의 안정을 이룬 신문왕의 시대를 대해 조명해보고자 한다.
저평가된 신문왕, 신라 중대 번영의 초석을 놓다
문무왕(재위 661~681) 대에 진행된 삼국통일과 나당전쟁의 승리는 신라에 있어 새로운 시대에 접어드는 기폭제가 되었다. 하지만 긴 전쟁의 후유증과 함께 외척과 공신 세력의 힘이 강했기에, 왕위에 오른 신문왕(재위 681~692)은 이러한 세력의 숙청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신문왕은 귀족들의 힘을 제한하는 데 열심이었는데, 가장 대표적으로 '녹읍'의 폐지를 들 수 있다. 녹읍은 귀족들에게 지급된 토지의 수조권과 노동력을 징발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귀족들의 힘의 원천이 되었다.
이 밖에 전국을 9주 5소경으로 개편하고, 제도를 정비하는 등 신문왕의 시대는 신라 중대의 뼈대를 이룬 시기로 평가할 수 있다. 재미있는 점은 신문왕 때 수도를 서라벌에서 '달구벌(대구)'로 천도하는 계획을 세웠다는 점이다.
신문왕릉이 효소왕릉으로 비정되는 이유?
<삼국사기>는 신문왕릉이 낭산의 동쪽이 있다고 했다. 낭산은 현 선덕여왕릉이 위치한 곳으로, 현 신문왕릉은 낭산의 남쪽에 해당하고 있기 때문에 신문왕릉이 아니라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지금은 작고한 고 이근직 교수를 비롯해 강인구, 김용성 박사 등의 연구자들은 공통적으로 현 신문왕릉을 효소왕릉으로 비정하고 있다.
현재 망덕사지는 사천왕사지의 남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망덕사지의 동쪽에 해당하는 왕릉이 현 신문왕릉이다. 따라서 신문왕릉이 효소왕릉일 수 있다는 연구자들의 견해는 설득력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보통 창업보다 수성이 더 어렵다고 이야기 하는데, 이러한 범주에서 보면 신문왕은 신라 중대의 안정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고, 그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신문왕의 이러한 공이 있었기에, 신라는 이후 혜공왕(재위 765~780)까지 이어지는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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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본인의 저서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 신라왕릉답사 편>의 내용을 토대로 새롭게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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