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고에서, 군대에서..남성발 미투 "남녀아닌 권력 문제"

백경서 2018. 3. 21.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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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열린 문화예술계 평등문화를 위한 연극인 궐기대회에서 참가자들이 손팻말을 들고 발언을 듣고 있다. 공연예술인노동조합은 이날 최근 공연계 '미투(me too, 나도 피해자다)'운동과 관련, 성폭력 재발방지와 피해자보호 및 치유를 위한 성명서를 발표했다.[뉴스1]
남성의 미투 고백이 서서히 등장하고 있다. 이들은 남고·군대 등에서 성폭력을 당했다고 털어놓으며 "성폭력은 남녀가 아닌 피해자와 가해자의 문제로 결국 권력에 의해 벌어진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전문가들은 폐쇄성이 짙은 군대, 경찰 등이 미투 운동의 사각지대라고 지적한다.

지난 10일 경북대학교 대나무 숲 페이스북에 "7년 전 고등학교에서 1년간 성추행을 당했다"는 글이 올라왔다. 24세 남성은 가해자 4명을 폭로했다. 그는 "남들보다 성장이 느려 작은 키와 허약한 몸이 그들에겐 좋은 먹잇감이 됐다"며 "2년간 정신과 치료를 받았지만 최근 미투 운동이 이어지면서 가슴 한편이 아려왔다"고 말했다.

경북대학교 대나무숲 페이스북에 올라온 남성발 미투. [사진 페이스북]
이 남성은 4명의 가해자를 A·B·C·D로 표현한 뒤 "A는 저를 운동기구 취급하면서 돌렸고 B는 수업시간에 자신의 성기를 꺼내고선 만져달라 했다, C는 심심하면 빰을 쳤다, D는 겨드랑이를 빨았으며 젖꼭지를 비틀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많은 남성 피해자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성폭력은 여성과 남성의 문제가 아니라 왕처럼 군림하는 소수들과 그들에게 복종해야 하는 다수들의 문제이고, 그들은 권력으로 성적결정권을 빼앗고 있다"고 주장했다.

남성발 미투. [사진 페이스북]
지난달 19일에는 연극계에 종사하는 한 남성이 2014년 동기와 함께 교수에게 성추행 당한 사실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털어놓기도 했다. 그는 "동기, 교수와 술자리를 가진 뒤 자취방에 이불을 펴고 교수를 중심으로 양옆에 누운 순간, 손이 내 속옷 안으로 들어왔다"며 "교수가 동기를 성추행하고, 동기에게 손으로 자신의 성기를 만지라고 강요했다"고 주장했다.
학교에 이 사실을 알리자 교수는 스스로 물러났고 동기와 자신에게 사과하러 왔다고 한다. 하지만 이상한 사과였다. 고개를 숙인 피해자들에게 교수는 분노 가득한 목소리로 형식적인 사과를 했다. 그는 "죄인은 당당했고, 피해자는 고개를 숙였다"고 했다.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3.8 여성의 날 민주노총 전국 여성노동자대회에서 주최 측이 참가자들과 시민들에게 나눠주기 위한 미투 배지가 진열돼 있다. [연합뉴스]
경찰발 미투도 있었다. 군 인권센터에 따르면 지난해 6월부터 9월 있었던 경북 성주 소성리 사드배치 반대 집회에서 소대장이 100명의 소대원에게 자신의 스마트폰과 USB를 활용해 음란 동영상을 강제 시청케 했다는 제보가 접수됐다. 버스에서 소대장은 “좋은 거 보여줄게, 다 너희 기분 좋아지라고 보여 주는 거다”며 30분~1시간짜리 영상을 틀었다. 군인권센터 측은 "시일이 지났음에도 이제 와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경찰 내부의 분위기에 대해 자성하고, 의무경찰 대원을 대상으로 심리치료를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 남성 성폭력 매년 꾸준히 발생…군대 내 성폭력 목격 24.7%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2017 성폭력ㆍ가정폭력 남성 피해자 지원현황 및 정책과제' 보고서에 따르면 강간·유사강간·강제추행 등 성폭력을 당한 남성은 2014년 1066명, 2015년 1243명, 2016년 1212명으로 집계됐다. 군대에서는 더 심각하다. 2004년 '군대 내 성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현역 군인과 제대 3년 이내 예비역 671명 중 남성간 성폭력 직접피해 경험 15.4%, 가해 경험 7.2%, 목격 경험 24.7%로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남성 집단에서 일어나는 성폭력이 전형적인 위계에 의한 성추행으로 남성이기에 더 고립되기 쉽다고 경고한다. 실제 군대 내 성폭력을 당한 이들 대부분이 신고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신고 및 처리절차에 대한 불신, 동성애자로 낙인 찍히는 데에 대한 두려움 등을 꼽았다.

미투를 상징하는 하얀 장미. [중앙포토]
고영상 법률사무소 대건 변호사는 "일주일에 한 번꼴로 군대 성폭력 문제 상담이 들어온다"며 "군대 내 성폭행의 경우 군법을 적용해 더 엄격하게 벌을 받는 데도 사건이 비일비재하다"고 말했다. 그는 "군대, 의경 등이 폐쇄적 성격으로 가해자가 선임병이나 장교이기에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기 어려운 분위기"라고 덧붙였다.

━ 남성 피해자 여성 성폭력 상담소서 상담…"상담 체계 마련 필요"

이에 남성 피해자를 지원하는 성폭력 상담소 등 구체적인 상담 체계 마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2017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보고서에는 해바라기 센터 등 성폭력 상담소에서 상담원의 72.6%가 남성 피해자를 상담한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하지만 남성 피해자의 지원이 충분했는가에 대해 응답자의 절반가량만 '그렇다'고 답했다. 남성 긴급 피난처 등 남성 피해자를 위한 성폭력 쉼터는 전무한 것으로 조사됐다.

윤김지영 몸문화연구소 교수는 "남성이 성폭력을 당했을 때 호소할 곳이 없어 '나도 저 위치에 오르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라는 생각에 그친다면 또 다른 성폭력이 재생산될 수 있다"며 "사각지대가 될 수 있는 남학교·군대·교도소 등에서 성폭력 근절을 위한 상담 체계 마련에 더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구=백경서 기자 baek.kyungse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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