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제주 흙이 피에 절어 시커멨어, 처형장 가던 내 나이 9살

2018. 3. 20. 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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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 70주년 기획] 동백에 묻다
① 올레길에서 만난 4·3
② 4·3으로 섬을 떠난 사람들
③ 4·3, 또 하나의 냉전
④ 백비의 침묵
⑤ 4·3, 70년을 넘어 

[한겨레] 올해로 제주4·3이 70주년을 맞는다. 제주4.3특별법에는 제주4.3을 ‘1947년 3월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21일까지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무덤덤하게 정의한다. 하지만 당시 제주도 인구 10%에 이르는 2만5천~3만여명이 희생된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었다. 그 상처는 아직도 남아 있다. 70주년을 맞아 4·3의 현재적 의미를 5차례에 걸쳐 되짚어본다. 동백꽃은 4·3 때 붉은 피를 흘리며 차가운 땅 속으로 소리 없이 스러져간 제주도민을 상징한다.

여행객들이 제주올레 1코스에 있는 서귀포시 성산 일출봉 주변에 있는 4·3 당시 학살터였던 터진목을 지나고 있다.

제주올레와 유명 관광지를 찾으면 아름다운 자연에 뒤덮여 있는 제주4·3이 보인다. 제주올레 17코스(관덕정)에서는 4·3의 시작을, 1코스(터진목)와 6코스(정방폭포), 19코스(함덕해수욕장과 북촌리)에서는 학살을, 13코스(잃어버린마을 조수리 하동)에서는 사라진 마을을, 14코스(진아영할머니 삶터)에서는 개인의 비극을, 10코스(갱도진지와 섯알오름)에서는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시기 예비검속의 현장을 만난다. 제주의 비극적인 근현대사가 오롯이 길 위에 남아있다.

제주 서귀포시 성산 일출봉 주변 노랗게 핀 유채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주변은 4·3 당시 일상적인 학살터였다.

2살 때 잃은 엄마 꿈에 그리던 70대
작년 묘 이장 때 ‘유일한 유품’ 발견
터진목·정방폭포·북촌리…
올레 곳곳에 학살 흔적이 남아 있다

■ 69년 만에 찾은 어머니의 은반지 “어머니가 너무나 보고싶어 꿈속에서라도 한번 볼 수 있기를 간절하게 기도했어요. 30여년 전 어느날 꿈 속에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분이 버스를 탔는데 내 앞에 있다가 나를 바라보는거에요. 직감적으로 어머니라고 생각했어요. 신양리 쪽으로 가는데 나는 버스에서 내리고 그 분은 그 버스를 타고 그대로 갔어요.”

2살 때 어머니를 잃은 성산읍 신양리 상군해녀(물질을 가장 잘하는 해녀) 강숙자(72)씨가 ‘그 어머니’를 만난 건 지난해 7월이었다. 69년만에 이장하기 위해 어머니 묘를 열어보니 꿈 속에 봤던 모습 그대로 어머니(오계춘·당시 36)의 유해는 70년이 다 됐는데도 하얗게 고왔고, 치아도 가지런했다.

제주4·3 당시 터진목에서 어머니가 희생된 강숙자(72·성산읍 신양리)씨가 당시를 증언하고 있다.

지난 4일 만난 강씨의 왼손 약지에는 유난히 빛나는 은반지가 있었다. 강씨는 “69년 만에 어머니 묘 이장 작업을 하다가 은반지를 발견했다. 7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는데도 반지 색깔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였다”고 말했다.

“깜짝 놀랐어요. ‘어머니, 이 반지 내가 끼쿠다, 고맙수다’(끼겠어요. 고마워요)라고 했어요. 어머니도 두 살 배기밖에 안된 나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지, ‘이 아이를 놔두고 내가 죽어야 하나’라고 생각해서 내게 주려고 한게 아닌가, 아니면 나를 키워주지 못한 어머니가 유품이라도 내게 전해주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69년 만에 강씨에게 다가온 은반지는 어머니의 유일한 유품이 됐다.

지난해 7월 69년 만에 어머니의 묘를 이장하면서 발견된 강숙자씨 어머니의 은반지.

어머니 오씨는 35살에 귀한 딸 강씨를 얻었다. 어머니는 강씨가 2살 때이던 1948년 11월27일 터진목에서 학살됐다. 잘못이 없어 곧 돌아올 것으로 생각했던 어머니는 젖먹이 강씨를 등에 업고 집을 나섰다. ‘세루(서지) 치마, 세루 저고리’에 목수건을 한 채 터진목에 끌려온 어머니는 마침 지나가던 동네 이웃에게 옷과 목수건으로 강씨를 감아 안기고, 언니에게 맡겨달라고 부탁했다. 강씨와 어머니의 마지막 이별 순간이었다. 어머니가 터진목에서 희생되기 몇개월 전에는 아버지(강태형·당시 33)가 행방불명됐다.

부모를 모두 잃은 강씨는 어머니 언니(이모)의 손에 컸다. 자라면서 이모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돌아가실 때까지 ‘어머니’로 모셨다.

강씨에게 바다는 삶의 터전이었다. 4년 전 남편과 자녀들의 만류로 물질을 그만뒀지만, 최근에도 하루 물질을 해 99㎏의 소라를 채취할 정도의 실력 있는 상군 해녀다. 밭일을 하다가도, 보험외판을 하다가도 바다로 달려갔다. 밤에는 자녀들을 돌보고 집안 일을 하면서 하루 24시간이 모자라게 살았다. 15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물질을 한 강씨는 경북 포항 구룡포와 경남 거제도는 물론 일본 미에현의 섬 등에서 출가물질을 하면서 돈을 모았다.

강씨는 “국회라도 찾아가서 정치인들에게 ‘4·3을 겪은 사람들을 폭도라고 해서 기를 펴고 살게 해줬나. 보상이 필요하다고 보는데 당신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말하고 싶다”고도 했다.

“물질을 해서 번 돈으로 집도 사고, 밭도 샀어요. 바다가 없었으면 굶었을텐데 바다가 있어서 밥도 먹고, 자식들을 키울 수 있었어요. 자식을 의사까지 만들었으니 자랑할만 하지 않나요.” 눈물이 쏟아지던 강씨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지난 10일 오후 세계자연유산인 서귀포시 성산 일출봉으로 가는 길목인 터진목. 제주올레 1코스가 끝나는 지점이다. 잔잔하게 펼쳐진 바다와 파란 하늘이 성산 일출봉을 배경으로 한폭의 그림을 연출하고 있었다. 길가에는 렌터카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제주의 봄을 알리는 노랗게 피어난 유채꽃을 배경으로 여기저기서 관광객들이 셀카봉을 들고 기념사진을 찍으며 온 몸으로 ‘봄날’을 느끼고 있었다.

한쪽에는 ‘제주4·3 성산읍 지역 양민 집단학살터 표지석’이 있다. 강씨의 어머니처럼 성산읍 지역의 많은 주민이 이곳에서 희생됐다. 터진목은 당시 일상적인 학살터였다.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제주 최고의 절경으로 손꼽히는 이곳은 주민들이 말하듯 ‘한과 눈물의 땅’이다. 4·3의 초토화 시기이던 1948년 가을 서북청년단으로 구성된 특별중대가 이곳에 주둔하면서 이 절경지는 ‘죽음과 통곡의 소리’가 끊이지 않는 곳으로 변했다. 1948년 10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이곳에서 학살된 주민은 400여명 이상이다.

한달 일정으로 제주에 와 사흘째 제주올레를 걷고 있던 조재두(42·경기 안산시)씨가 집단학살터 표지석 앞에서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제주시에서 출발하는 18코스부터 걷고 있다는 조씨는 “이렇게 마음 아픈 역사가 있었는지 몰랐다. 올레를 걸으면서 4·3을 알게 됐다.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에서도 봤는데, 이곳에서도 보게 됐다. 이런 절경지가 70년전에 학살터였다는 것을 알게 돼 먹먹하다”고 말했다.

올레 19코스 북촌리에서 600여명 학살
처형 기다리다 목숨 건진 고완순씨
“어머니 등에 업혀 보채던 3살 동생
군인이 몽둥이로 머리 두번 내리쳐” 북촌초 학살 때 부모 잃은 세 친구들
“그날 운동장에서 있었던 일 어떻게 잊어”

■ 처형장에서 살아난 소녀 “북촌리 옴탕밭(옴팡팥)의 검붉은 빛이 돌던 흙이 피에 절어 시커맸어. 오후 4시가 넘어 해가 구름 사이로 언뜻언뜻 비칠 때마다 얼음에 빛이 반사되듯이 핏빛이 유리알처럼 반짝 거렸지. 얼굴은 눈물 범벅이 됐고, 추웠지만 춥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

1949년 1월17일 당시 9살이었던 북촌리 노인회장 고완순(78)씨는 너븐숭이 옴탕밭 처형 현장을 이렇게 묘사했다. 등 뒤에선 소총의 철거덕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3살짜리 남동생을 업은 고씨의 어머니는 한손에 언니(당시 16)의 손을, 또다른 손엔 고씨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옴탕밭으로 끌려간 고씨 가족은 처형 순간을 기다리다 극적으로 살아났다. 옴탕밭에는 바로 앞서 처형된 주민들의 주검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노인회장 고완순씨가 4·3 당시 처형장이었던 너븐숭이 옴탕밭으로 끌려가 학살 직전에 가까스로 살아나온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갑자기 군인이 탄 지프가 나타났고, 주민들은 곧이어 ‘중지, 중지’하는 소리를 들었다. 고씨의 가족은 이렇게 살아났다.

앞서 고씨 가족은 북촌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삶과 죽음의 문턱에서 헤멨다. 고씨가 밀려나가다 이미 숨져 있는 한 아주머니를 만졌고, 손에는 피가 묻었다. 고씨가 “아이고, 무서워”하자 어머니의 등에 업혀 있던 3살 남동생도 “집에 가자”며 보챘다. 몽둥이를 들었던 군인이 동생의 머리를 두번 내리치자 조용해졌다. 동생은 시름시름 앓다가 1952년에 숨졌다.

“북촌리 여자들은 물질하다가 조팟(조밭)에 가서 검질(김)메고 하면서 다리가 다 휘어졌어. 그래도 이 마을을 지켜온 사람들이 여자들이야.”

지난 2012년 11월 북촌리 너븐숭이 4·3기념관에서 당시 문재인 대통령 후보를 만난 적이 있는 고씨는 지난해 말 “우리 마을 북촌은 4·3의 한을 풀지 못하고 70년의 세월을 살았다. 4·3의 아픔을 해결해주실지 때론 기대 속에 살 맛이 난다. 제주에 오시면 너븐숭이 4·3기념관에서 다시 한번 꼭 만나고 싶다”는 손편지를 써서 보냈다. 그의 꿈은 이뤄질까.

지난 3일 제주올레 19코스에 있는 북촌리 너븐숭이. 광주에서 온 광주제일고 교사 김병섭(41)씨와 박종헌(50)씨가 북촌리 주민 이상언(56)씨와 4·3 너븐숭이 유적지를 둘러보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오는 28~30일 수학여행을 위해 사전 답사를 하고 있었다. 박씨는 “4·3을 자세히는 모르지만 5·18과 비교되기도 하고, 역사적으로 재조명되는 현장이어서 찾기로 했다. 이런 역사가 올레길에 있는 줄 몰랐다”고 했다. 김씨는 “이번 기회를 통해 학생들에게 4·3을 알릴 계획이다”고 말했다.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의 무대로 알려진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는 1949년 1월17일 무장대의 습격으로 군인 2명이 희생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2연대 3대대의 학살극으로 하루동안 북촌초등학교와 인근 밭 등에서 200여명이 넘는 주민이 학살된 곳이다. 학살극이 벌어진 이튿날 인근 함덕리 소개된 주민들은 또다시 ‘도피자 가족’이거나 ‘입산자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처형됐다. 이틀 동안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300여명의 주민이 학살됐다. 북촌리에서는 4·3 시기를 통틀어 600여명 이상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여전히 학살의 주체는 ‘2연대 3대대’라고만 알려졌을 뿐 자세한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다.

■ 58년 만에 만난 세 친구 “울고불고 했어요. 북촌사건 때 있었던 일들이 자연스럽게 화제에 올랐어요. 북촌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있었던 일을 어떻게 잊겠어요. 나이가 어려도 그때의 기억을 평생 갖고 있는데…”

58년만에 만난 친구들 이야기에 금세 눈물이 그렁했다. 지난해 4월 김현옥(75·제주시 동광로)씨는 서울 은평구의 한 식당에서 고향 후배 이춘애(74·서울)씨와 김용희(72·서울)씨를 만났다. 김씨와 이씨는 자주 만났지만, 10대 중반에 어머니를 따라 물질을 갔다가 강원도에 정착한 용희씨는 만나지 못했다. 우연한 기회에 연락이 이뤄지게 됐고, 1960년 헤어진 지 58년 만에 서울에서 만난 것이다. 친구들은 부둥켜 안고 눈물을 흘렸다.

58년 만인 지난해 4월 서울의 한 식당에서 만난 제주 북촌리 출신 이춘애 김현옥 김용희씨(왼쪽부터). 이씨가 김용희씨한테 북촌초등학교 역사가 담긴 책을 보여주며 4·3 당시 희생된 아버지 사진이 있으니까 찾아보라고 했으나, 김씨는 아버지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며 안타까워 하고 있다. 김현옥씨 가족 제공

북촌리 학살이 벌어진 1949년 1월17일, 이들은 모두 어머니나 아버지의 손을 잡고 북촌초등학교 운동장에 있었다. 김씨는 6살, 이씨는 5살, 용희씨는 3살이었다. 김씨는 아버지(김유신·당시 50)를, 이씨는 어머니, 용희씨는 아버지를 잃었다. 태어난 날은 모두 다르지만 같은 날 아버지나 어머니를 잃은 이들은 서로를 의지하며 친하게 지냈다.

김씨의 어머니(이차복)는 1남3녀의 자녀와 남겨졌다. 북촌사건 다음날, 8살 위 언니 김금택(83)씨는 어린 김씨를 업고 어머니와 함께 함덕 이모댁으로 갔다. 며칠 뒤 어머니는 고향으로 와서 장례식도 치르지 못한 채 아버지의 주검에 가마니를 덮어놨다가 밭에 묻었다. 여느 북촌사람들처럼 김씨 가족의 신산한 삶도 그때부터 시작됐다.

함덕으로 갔던 김씨 가족은 봄이 되자 다시 북촌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모두 타버린 마을은 폐허나 다름없었다.

“부모님이 북촌사건이 나기 전에 시국이 어떻게 될지 몰라서 조그만 단지에 약간의 돈을 넣어서 텃밭에 묻어뒀어요.” 불타버린 집 터에서 어머니는 텃밭에 묻었던 단지를 꺼냈다. 그것은 4·3 이후 김씨 가족의 생존 밑천이었다. 그 돈으로 ‘얼레기’(머리빗)를 사서 중산간 마을로 팔러 다녔다.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출신 김현옥(75)씨가 4·3 당시 부모님이 텃밭에 돈을 넣고 묻어뒀던 단지에 얽힌 이야기를 하고 있다.

김씨는 “집터에 둥그렇게 돌담을 쌓고 그 위를 막아 움막을 만들었다. 세가족이 같이 살았는데 우리 집은 다섯식구, 한 집은 세 식구, 또다른 집은 다섯식구 해서 모두 13명이 움막에 살았다”고 회고했다. 그릇이 없어 전복 껍데기를 사용했고, 먹을 것이 없어 톳이나 파래와 보리쌀을 섞은 톳밥, 파래밥, 물읏을 섞은 물읏밥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함덕에서 북촌으로 옮겨온 지 두어달이 지난 어느 날, 이번에는 3살 아래 동생이 영양실조로 숨졌다. 오빠 김철(79)씨는 당시 홍역으로 청력을 잃어 생활에 큰 불편을 느낀다. 전염병이 창궐하고 굶어죽는 이들이 속출하던 시기였다. 그해 6월에는 남동생 희준(69)씨가 유복자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동생을 출산한지 23일만에 핏덩이를 업고, 땔감을 사서 남의 마차를 빌려타고 시내에 나와 팔았다.

김씨는 “그 시절 얘기를 어떻게 다 하느냐. 나만 그런게 아니라 몇해 전 돌아가신 남편은 어머니가 총살되는 현장을 직접 목격했는데 그 심정이 오죽했겠느냐. 글만 쓸 수 있으면 소설을 써도 몇권은 쓰겠다”고 말했다.

“살아온 과정들이 다 마찬가집니다. 서로 얘기하지 않아도 서로를 알지요.” 김씨의 눈에는 금세 눈물이 맺혔다.

제주/글·사진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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