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물간 창극? 그가 만드니 관객이 줄을 섰다

이태훈 기자 2018. 3. 20.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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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창극단 6년 이끈 김성녀.. 두 번 연임 예술감독 임기 마쳐
그리스悲劇·스릴러 창극 등 실험, 올리는 공연마다 호평·매진 행렬

국립창극단 김성녀(68) 예술감독 사무실 벽에는 그간 올렸던 공연 포스터마다 노란 봉투들이 여럿 붙어 있다. 봉투마다 '만원사례(滿員謝禮)'라고 쓰여 있다. '변강쇠 점찍고 옹녀' 23장, '배비장전' 12장, '흥보씨' 6장, '소녀가' 5장…. 봉투 개수는 공연 매진 횟수다. "관객 꽉 찰 때마다 모든 배우·스태프에게 만원사례 봉투에 1000원씩 넣어 돌리는 게 창극단 전통이에요. 매진에서 몇 장 모자라 아쉬울 때도 많지만 한 번도 억지 만원사례를 만든 적은 없답니다." 표정에 자부심이 넘친다.

최근 두 번째 예술감독 임기를 마친 김 감독을 국립극장에서 만났다. 3년씩 연임해 6년간 그는 '창극을 망친다'는 원성도 들었고, 판소리에 애착을 가진 단원들을 다독이느라 위장병도 얻었다. 하지만 그 덕에 국립창극단은 환골탈태(換骨奪胎)했다. 창극은 새 작품마다 팬들이 줄을 서는 흥행 장르가 됐다.

국립창극단 김성녀 예술감독이 매진 횟수만큼 ‘만원사례(滿員謝禮)’ 봉투가 붙은 공연 포스터들 앞에 섰다. 최근 두 번째 임기를 마친 그는 “2010년 이해랑연극상을 받을 때 ‘계 탄 기분’이라고 했는데 지금도 그렇다. 눈물 뿌린 만큼 거두는 기분이고, 더 겸손하게 살자고 생각한다”고 했다. /박상훈 기자

김 감독은 "시대가 요구하는 창극을 해야 한다는 게 내 신념"이라고 했다. "창작 창극은 국내 최고 연출가에게 맡겼어요. 한태숙 연출이 스릴러 '장화홍련'을 올렸고, 차범석 원작 '산불'은 이성렬 연출(현 국립극단 예술감독)이 창극으로 만들었죠. 판소리 다섯 바탕은 해외 연출가에게 맡겨 재해석했어요. ​'안드레이 서반의 다른 춘향' '아힘 프라이어의 수궁가'는 그렇게 태어났습니다.

김 감독은 "창극의 매력은 관객 감정을 제곱으로 끌어올리는 우리 소리의 힘에서 나온다"고 했다. "그리스 비극을 창극으로 옮긴 '메디아'를 보면, 자식의 죽음 앞에서 곡(哭)을 해요. 어떤 대사보다 힘 있고, 절정에 다다른 드라마를 공중 점프시키는 효과를 내요. 짜릿하죠." 그가 있는 동안 창극은 수출도 됐다. 올해도 영국,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무대에 선다. "요즘은 유명한 연출가들에게 연출을 부탁하면 금세 수락해요. 새로워진 창극에 다들 매력을 느끼게 된 것도 큰 보람입니다."

평생 연극배우였지만, 많은 이가 그를 마당놀이 국악인으로 기억한다. 김 감독은 "살아남기 위해 멀티플레이어가 돼야 했다"고 회상했다. 그의 부친은 연극 연출가 김향(1999년 작고), 모친은 50년대 여성 국극 스타 박옥진(2004년 작고)이다. 아버지는 살림을 돌보지 않았고, 맏딸 김성녀는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무대에 섰다." 어머니 쓰러진 뒤엔 가족 부양하느라 대학도 포기하고 2년 꼬박 공장 뜨개질만 한 적도 있다. 연극판에 뛰어들었지만 연기를 배운 적도, 학연·인맥도 없었다. "어디서 굴러먹던 말뼉다귀냐"는 소리를 숱하게 들었다. 그는 "나를 담금질한 용광로 같은 세월이었다. 리더가 될 수 있었던 건 가난과 좌절을 겪어 봤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의 DNA가 빛을 본 건 연출가 남편 손진책을 만나면서부터. "엄마 덕에 '딴 사람 10년 걸릴 걸 3년이면 배운다'는 칭찬을 받으며 박귀희, 김소희, 성창순, 오정숙, 한농선 등 명창들께 소리를 배워 무대에 써먹었죠. 한국적 정서를 이해하고 표현하고, 그 덕에 이렇게 창극단 감독까지 하게 됐어요."

두 번째 임기는 지난 11일 끝났다. 하지만 국립극장이 내규까지 고쳐가며 '새 예술감독이 올 때까지 남아달라'고 한 요청을 받아들였다. 지금은 4월 말 올리는 '심청가'를 준비 중이다. 창극단 예술감독 재직 중엔 처음으로 남편에게 연출을 맡겼다. "인생 마무리는 제 뿌리인 배우로 멋지게 하려 했어요. 오랜만에 영화도 한 편 촬영 중이었고요. 퇴임하면 우리 산 100곳을 트레킹하고 영어도 배우려 했는데 좀 미뤄야겠네요." 그가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창극이 아직 그를 놓아주지 않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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