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란 수도 부산 판잣집서도 예술혼은 피어올랐다

부산=변희원 기자 2018. 3. 20.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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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시립미술관 20주년 특별展]
이중섭·김환기·안도 요시시게 등 韓日 화가들이 그려낸 부산 풍경
전란 속 한국 미술의 중심지 역할

노란 벽에 초록색 판자를 얹은 건물에 크고 작은 창(窓)이 나 있다. 불빛이 없는지 검은색으로 칠한 창마다 이목구비 없는 사람들의 형상이 보인다. 서늘하고도 애처롭다. 6·25전쟁 때 부산으로 피란 간 김환기 화백이 그린 '판자집'(1951)이다.

부산을 주제로 한 대규모 전시가 열리고 있다. 부산시립미술관 개관 20주년 특별전이다. 부산에 서양화가 들어온 시기를 1928년으로 추정해 부산 미술사 9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이기도 하다. 전시는 식민지부터 피란 수도까지, 부산의 근현대 미술을 다루면서 이 도시가 얼마나 개방적이고 문화 수용력이 강한지 보여준다. 식민지 때는 일본 화가들로부터 서양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전쟁 땐 한국 현대미술을 이끈 작가들의 피란처이자 작업장이 됐다. 부산이란 도시의 특수성과 한국 근현대 미술을 촘촘히 엮었다.

◇일본 화가 눈에 비친 1930년 부산

항구 도시 부산은 여느 곳보다 20세기 초반부터 일본인과 근대 문화를 빨리 받아들였다. 1부 '모던·혼성: 1928~1938'은 근대 미술이 태동했던 일제강점기 부산 미술을 조명한다. 부산 출신 작가들의 그림과 이들이 일본 작가들과 교류한 흔적을 보면 예술과 근대화의 열망이 식민지 시대 문화의 중심지로 잘 알려진 '경성'에 못지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산 피란민 거처를 그린 김환기의 ‘판자집’(1951). 김환기는 부산에서 화가들의 작품 활동을 “험난한 현실과 맞붙어 싸우는 것”이라 표현했다. /부산시립미술관

전시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일본 화가 안도 요시시게는 1927년부터 1935년까지 부산에서 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부산 부두의 풍경과 조선인의 초상을 소박한 수채화로 그렸다.

◇고통의 세상을 살아내게 한 '창작 의지'

'피란민 행렬에 섞이어 무턱대고 부산으로 내려오기는 하였으나 의지가 없는 나는 도착하는 날부터 밤이면 40계단 밑에 있는 과일 도매시장 공지에서 북데기를 뒤집어쓰고 아무렇게나 쓰러져 자고, 마담의 눈치를 살펴가며 다방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있지 않으면 안 되는 신세였다.'

1952년 5월 8일 부산에 피란 온 젊은 화가 김훈이 쓴 글이다. 2부 '피란 수도 부산: 절망 속에 핀 꽃' 전시는 피란 수도였던 부산에 모인 화가들이 절망 속에서 꽃피운 예술 세계를 보여준다. 이중섭, 김환기, 장욱진, 박수근, 천경자 등과 부산 토박이 화가 김종식, 송혜수, 양달석 등 작가 26명의 작품을 선보인다. 이들이 모였던 광복동의 다방까지 재현해내며 한국 예술의 새 중심지가 됐던 부산을 보여준다.

장욱진의 ‘자갈치 시장’(1956). /부산시립미술관


도상봉의 '폐허'나 이철이의 '학살'처럼 피란 수도 부산의 참혹한 현실을 그린 작품도 있지만, 관람객 발길은 소를 풀어놓고 피리를 불며 평화로운 한때를 보내는 아이들을 그린 양달석의 '목동'에 멈춘다. 이중섭의 은지화도 걸렸다. 그가 '금강다방'이나 '밀다원'에서 못이나 송곳, 골필로 은박지에 그린 것이다.

종군 화가들의 작품도 볼 수 있다. 전쟁 기록화보다는 작가들의 전장에서 포착해낸 인간적인 모습이 더 많다. 임호가 그린 '진중의 제8사단장 이호준장'을 유심히 보던 관람객 김성덕(62)씨는 "참혹한 전쟁 속에서도 화가와 군인들 모두 인간답게 살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이 느껴져 뭉클하다"고 했다. 이호 준장이 위문편지를 읽는 그림이다. 7월 29일까지. (051)740-4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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