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15세 소년에게 당해..그도 처음엔 괴물 아니었다"

민경원 2018. 3. 20. 0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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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주 내한 '다크 챕터' 위니 리
대낮 관광지서 15세 소년에게 당해
'합의에 의한 것'이란 편견에 큰 충격
'우리'는 피해자·생존자 사이의 존재
가해자가 어긋난 원인 고쳐야 예방
아시아, 성폭력 피해 부끄럽게 여겨
피해자 잘못 아니고 회복도 가능해
━ “그도 처음엔 괴물 아니었다 … 폭로 계속 돼야 변화 생길 것”
지난해 6월 영국에서 첫 소설 『다크 챕터』를 발간한 대만계 미국인 작가 위니 리. 강연과 토론회 등 다양한 형태로 독자들을 만나고 있다. [유튜브 캡처]
두려움과 외로움. 지금 우리 사회 전방위로 번지고 있는 ‘미투(#MeToo) 운동’에서도 드러나듯, 성폭력 피해자들이 사건 이후 가장 힘들어하는 대표적인 부분이다. 분명 피해자임에도 “내가 잘못했기 때문”에 당한 것으로 치부될 가능성을 포함, 피해자들은 성폭력에 대한 숱한 고정관념에 맞서야 한다.
『다크 챕터』 표지.
대만계 미국인 작가 위니 리(40)도 지독한 두려움과 외로움을 겪었다. 이번 달 국내에 번역 출간된 자전적 소설 『다크 챕터』(한길사)는 2008년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 그가 겪은 일이 바탕이다. 서른 번째 생일이 지나지 않은 나이에 15세 유랑민 소년에게, 그것도 관광객이 흔히 오가는 하이킹 코스에서 대낮에 성폭행을 당한 그 역시 다양한 고정관념에 맞부딪쳤다.

e메일 인터뷰를 통해 위니 리는 “당시 현지 언론에서 나를 ‘어린 중국 관광객 소녀’라고 묘사하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밝혔다. 미국에서 나고 자란 그는 영국에서 영화 프로듀서로 일하며 출장차 현지를 방문한 상황이었다. 이후 재판 내내 합의에 의한 성관계였다는 둥, 여자가 먼저 원했다는 둥 뒤틀린 편견에 맞서 싸워야 했다. 소설은 놀랍게도 그 자신만이 아니라 가해자와 피해자 양쪽 모두의 시선을 오간다. 그의 첫 소설인 이 작품은 지난해 영국 가디언 독자가 뽑은 최고의 소설로 선정됐다.

Q : 9년 만에 소설로 출간했다. 경험을 글로 옮기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A : “프롤로그는 사건 몇 주 후에 바로 썼다. 6세 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기 때문에 내 인생에서 일어난 이렇게 중대한 일을 안 쓰는 것이 오히려 더 어려운 일이었다. 다만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고 이후의 삶을 재건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본격적인 집필은 2013년 가을부터 했다.”

Q : 에세이가 아닌 소설을 택한 이유라면.

A : “강간 경험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많이 나와 있다. 사건 직후 내게 큰 힘이 되어줬다. 하지만 내가 새로 더 할 수 있는 내용은 없었다. 피해자로서의 나의 경험에 가해자 부분을 창조해 덧붙인 것은 그래서다. 내 경우 가해자는 완전히 낯선 사람이었다. 흔히 가해자의 이야기는 간과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 소설에선 두 사람의 입장을 동등하게 다루고자 했다.”

Q : 그를 용서한 건가. 아니면 이해하는 건가.

A : “어찌 됐든 가해자도 사람이다. 그들도 태어날 때부터 괴물은 아니었다. 성장 과정에서 가정교육이나 훈육 방식 등 많은 요소가 영향을 미쳤다는 얘기다(소설의 남자 주인공, 즉 가해자는 ‘여자라면 누구나 남자의 키스를 받고 싶어 해’ ‘관광객 여자들은 원하는 대로 다 할 수 있는 골든 티켓’ 같은 얘길 들으며 자란다). 그중 이들의 행동을 유발한 요인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절대 성범죄를 예방하지 못할 것이다.”
2015년과 2017년에 영국 런던에서 열린 클리어 라인스 페스티벌을 기획한 위니 리(왼쪽에서 셋째).
위니 리는 ‘피해자(victim)’와 ‘생존자(survivor)’라는 단어를 구분해 사용했다. 이는 성폭력을 겪은 일을 고백한 작가들의 공통된 특징이기도 하다. 2014년 『나쁜 페미니스트』로 미국 내 페미니즘 열풍을 이끈 록산 게이는 “파괴의 현장에서 겨우 살아남았다”고 말한 바 있다. 위니 리 역시 소설 속에서 자문한다. “그런데 뭐가 고마운 거지? 성폭행하지 않고 여기까지 데려다줘서? 죽이지 않아줘서?”라며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Q : 피해자와 생존자는 어떻게 다른가.

A : “나는 ‘생존자’란 단어를 선호하긴 하지만 둘 다 적합한 단어는 아니다. 생존자는 너무 영웅처럼 보이고, 피해자는 평생 약자로 살게 하기 때문이다. 실제 현실에선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데 짧게는 몇 년, 길게는 수십 년이 걸리는데 말이다. 서문에 ‘모든 피해자와 생존자 그 사이에 존재하는 우리를 위해’라고 쓴 것도 이 때문이다.”

Q :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된 것이 있다면.

A : “나는 사건 직후 ‘강간’이란 단어를 입으로 내뱉었다. 친구에게 전화해 도움을 청해야 했기 때문이다. 소설에서처럼 실제 가까운 사람들에게 e메일을 보내기도 했다. 이미 지역 언론에 떠들썩하게 보도되는 바람에 아닌 척할 수가 없었다. 덕분에 그들로부터 많은 위로와 격려를 받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야기를 들어주고, 믿어주는 것이다.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을까’라고 물어봐 주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 위니 리가 2015년 영국 런던에서 ‘클리어 라인스 페스티벌’을 연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성폭행 피해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고 예술가·시민운동가 등 다양한 전문가들과 함께 토론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행사다. 그는 이를 통해 외로운 싸움을 좀 더 순조롭게 끝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는 “토론으로 성폭력을 근절할 순 없지만 사회적 경각심을 일깨우고 함께 해법을 찾아낼 순 있다”고 밝혔다. 행사를 지속해 달라는 여러 요청에 따라 지난해 12월 런던에서 두 번째 페스티벌을 열었다. 그는 페스티벌의 아트디렉터로서 행보를 이어 가고 있다.

문화예술계에서도 연일 새로운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름이 나오는 상황인데 과연 예술이 치유가 될 수 있을까. “문화예술계는 한국뿐 아니라 영미권에서도 문제가 많은 분야예요. 여성을 대상화하고 성적 아름다움을 전시하는 것이 익숙한 곳이니까요. 남성이 권력을 독점해 생긴 일이라면 이제 구조를 바꿔야죠. 성폭력 피해가 아시아 국가에서는 아직까지 부끄러운 오명으로 여겨짐에도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한 폭로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변화의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고백은 계속될 것이고, 점처럼 흩어져 있던 사람들을 연결해 연대와 지지의 힘을 보여줄 겁니다.” 위니 리는 25일 방한을 앞두고 아시아 지역 중 가장 먼저 이 소설이 번역된 한국 독자들에게 “성폭행을 당한 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닐뿐더러 회복이 가능하다”는 말로 인사를 전했다.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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