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학자 정희진은 '욘사마 열풍'을 이렇게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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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혼자서 영화를 본다.
그래서 언젠가부턴 친구들에게 "영화 같이 볼까" 하는 소리를 안 한다.
동행이 있더라도 최대한 멀리 떨어져 혼자 영화를 볼 정도로 정희진은 영화를 사람만큼, 아니 사람보다 더 좋아한다.
탄수화물, 활자, 일과 더불어 영화는 정희진을 중독으로 내몰면서 그녀의 외로움을 해결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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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황보름 기자]
극장에 앉아 내가 영화를 보는 건지, 감정을 삭히는 건지 모르는 채로 한두 시간을 보냈다. 그날 본 영화가 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재미있게도 그날 이후로 나는 혼자 영화관을 찾는 사람이 됐다.
영화를 볼 땐 옆에 아무도 없었으면 좋겠다. 아니, 내가 아는 사람만 없으면 된다. 내가 의식하고 싶은 건 영화뿐이니까. 그래서 언젠가부턴 친구들에게 "영화 같이 볼까" 하는 소리를 안 한다.
대신 "그 영화 봐봐. 보고 전화해" 하고 말한다. 영화에 관해 이야기하는 건 좋지만, 영화 보는 순간을 함께 나누는 건 별로다. 그래서 정희진의 책 <혼자서 본 영화>는 제목부터가 내 이야기인 것만 같았다(물론, 혼자 영화 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다 나처럼 느낄 테다).
"영화를 보는 나만의 습관이 있다. 일단, 혼자 본다. 어두운 극장 안에서 대사를 메모하느라 대개는 두 번 본다. 극장에서 본다." - 11쪽
동행이 있더라도 최대한 멀리 떨어져 혼자 영화를 볼 정도로 정희진은 영화를 사람만큼, 아니 사람보다 더 좋아한다. 탄수화물, 활자, 일과 더불어 영화는 정희진을 중독으로 내몰면서 그녀의 외로움을 해결해준다.
"해야 할 일이 있는 시간 외엔, 거의 반사적으로 영화를 보"고, 영화를 볼 때면 꼭 메모를 한다. 영화 본 감상을 메모한 지는 꽤 됐지만 1997년 이후에 쓴 것만 남아 있다고 한다. 이 책에는 저자가 20년에 걸쳐 본 영화 가운데 '인생 영화' 28편이 소개돼 있다.
스스로를 '영화 오타쿠'라고 부르는 그녀는 그렇다면 영화를 왜 볼까. '알기 위해' 본다고 한다.
"안다는 것은 깨닫고, 반성하고, 다른 세계로 이동하고, 세상이 넓음을 알고, 그리고 타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과정을 뜻한다. 이것이 인생의 전부 아닐까."(19쪽)
책에는 저자가 영화를 통해 '알게 된 것'들이 그녀만의 해석을 거쳐 그녀만의 언어로 말 그대로 강렬하게 새겨져 있다. 저자는 서문에서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드러냈다"라고 말했는데, 책을 읽다 보면 왜 이렇게 말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책에 실린 모든 영화 리뷰는 정희진의 목소리를 타고 내 눈으로, 내 귀로 전해져 왔다. 영화를 알게 된 만큼, 정희진을 알게 됐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리뷰는 영화 <외출>(2005년, 허진호 작, 배용준, 손예진 주연) 편이었다. 정희진은 이 글에서 <겨울 연가>가 불러온 '욘사마 열풍'의 원인을 분석한다. 일본 여성들은 왜 그토록 강준상(배용준)에 열광했을까.
<겨울 연가>에서 강준상의 눈물을 본 일본 여성들은 "일본 드라마에서는 남자의 눈물을 본 적이 없어요" 하고 말했는데, 단지 눈물바람을 했기에 그토록 사랑받았던 걸까. 정희진은 강준상이라는 인물은 "남성 젠더를 파괴하는 전복적인 캐릭터"였다고 말한다.
"남자의 삶에서 여자와 소통하기 위해 자아를 조절하는 기간은 연애할 때 몇 개월이 유일하다(여성들은 거의 평생을 남성을 위해 자신을 조절한다). <겨울연가>의 강준상은 이 법칙을 깬다. 준상은 드라마가 방송된 20회 내내 여성을 이해하기 위해 자신을 버리며, 여성으로 인해 행복해하고 아파한다. 이제까지 여성들만 해 왔던 관계 유지에 필요한 노동을 기꺼이 분담하고 여성과 대화할 능력이 있는 새로운 남성이다!" - 86쪽
<겨울 연가> 속 강준상의 이미지는 영화 <외출> 속 인수(배용준)로까지 흘러들어 이 영화에서도 배용준은 "여성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따뜻한 남자"가 됐다는 것이다. 즉, 강준상이나 인수에게 푹 빠졌던 여성들은 단순히 '잘생긴 백마 탄 왕자에 넋이 나간 아줌마'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사랑을 주고 받고 싶다는 바람이었다.
사랑에 빠진 내(여자)가 너(남자)를 위해 나를 변화시키느라 노동할 때, 너 역시 나를 위해 변화하고 노동해달라는 말이었다. 사랑 앞에서도 권력을 놓지 못해 끝내 딱딱하게 구는 너(남자)를 내(여자)가 어디까지 사랑해줘야겠냐는 물음이었다.
그러니까, 욘사마 열풍은 제대로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랑할 능력이 없는 남성들에게 보내는 일본 여성들의 우회적인 일침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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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혼자서 본 영화>(정희진/ 교양인/ 2018년 02월 19일/ 236쪽/ 1만3천원) 브런치에 중복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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