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만 쉬어도 청춘은 '적자'..허투루 안쓰는데 뭘 더 아끼죠?

2018. 3. 19.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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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영수증 '벌벌 청춘'
① 제 영수증은 이렇습니다

알바 취준생·저임금 계약직 등
"일에 지쳐 배달음식으로 한끼 해결"
"넉달만에 이발, 얼마나 더 아끼죠"
"공연표 한장도 결제·취소 반복"
그렇게 아껴도 매달 '마이너스' 인생
주거 독립도, 결혼도 "나중, 나중에"
이 모든 원인엔 '절대적 저임금 구조'

[한겨레]

‘취업은 아직 멀었니?’ ‘넌 언제 독립할래?’ ‘결혼은 생각도 안 하니?’

‘헬조선’을 살아가는 한국 사회 청년들에겐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히는 질문들입니다. 일을 구하는 것이, 머물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또 평생의 배우자를 맞이하는 것이 왜 이렇게 힘들기만 할까요?

<한겨레>는 독립적 경제 주체로 이행하는 시기, 즉 ‘이행기’에 놓여 있는 청년들의 삶을 한 달치 영수증을 통해 살펴봤습니다. 누구보다 ‘노오력’하지만 빚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는 이들의 영수증에 대해 우리는 쉽게 ‘그뤠-잇’과 ‘스튜-핏’을 외칠 수 있을까요?

한 대학 교정을 뛰어가는 대학생의 발걸음 뒤로 길게 그림자가 이어져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1. 저녁 8시22분. 서울 종로의 한 스타트업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는 김소윤(27·가명)씨는 열흘간의 해외 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뒤 집에서 배달앱으로 떡볶이를 주문했다. 가격은 1만3천원. “출장 갔다가 집에 돌아오니 냉장고는 텅 비어 있고, 지쳐서 밥을 해 먹을 힘이 하나도 없더라고요. 외국 다녀오니 매운 음식이 먹고 싶어서….” 몇시간 뒤인 새벽 3시. 같은 배달앱을 통해 치킨 한 마리를 더 주문했다. 값은 1만7천원. “동거하는 남자친구가 일 마치고 새벽에 퇴근해서요. 집에 먹을 게 없어서 치킨 시켜줬어요.” 김씨의 12월 한 달 월급은 세후 124만5100원, 지출은 126만원이 나왔다. 1만4900원 적자다. 치킨이나 떡볶이를 사먹지 않았다면 적자를 면할 수 있지 않았을까? “가끔 배달음식을 먹게 되는데 음식이 아니라 정성과 시간을 돈으로 샀다고 생각해요. 밤에 야근하고 집에 가면 너무 허기진데, 직접 해 먹으려면 장 보고, 밥하고, 반찬 하고… 그걸 언제 다 해요.”

#2. 서울시 산하 한 공공기관에서 무기계약직으로 일하고 있는 임상현(35·가명)씨는 집 근처 미용실에서 머리를 잘랐다. 비용은 2만원. “부지런한 사람들은 보통 한 달에 한 번은 자르던데….” ‘꼭 필요한 곳에만 돈을 쓴다’는 임씨는 주로 한끼 2500원짜리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해결하고, “꾸미는 데에 둔감해” 옷도 거의 사지 않는다. 스트레스는 주로 “퇴근길에 편의점에서 햄버거를 사먹으면서 푼다”는 임씨의 12월 월급은 180만원이다. 지출은 은행대출 상환액 40만원을 더해 163만원이 나왔다. 4년간 만난 연인과 결혼을 앞두고 있지만, 결혼자금은커녕 당장 생활비도 빠듯하다. 임씨는 “지출을 줄일 수 있지 않으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어떻게 더 줄일까요. 4개월 만에 미용실 간 거거든요. 그것도 주변 사람들이 80년대 고시생 같다고 해서….”

#3. 승무원 취직을 준비 중인 한세진(26·가명)씨는 온라인에서 8만6천원에 구매한 공연 티켓을 결제 취소했다. “너무 보고 싶은 작품이었거든요. 근데 제 수입에 비교하면 가당치도 않은 금액이어서….” 결제를 무르고도 보름 동안 공연 티켓을 온라인 장바구니에만 담아뒀던 한씨는 보름 정도 지나 결국 티켓을 다시 구매했다. 공연은 기대했던 것만큼 재밌진 않았다고 한다. 취업 준비를 하며 틈틈이 피아노 레슨 등 아르바이트를 뛰고 있는 한씨의 지난해 12월 수입은 60만원, 지출은 77만5360원이다. 17만5360원 적자다. 적은 수입을 고려하면 공연을 포기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한 달 동안 결제와 취소를 반복하는데, 진짜 괴로웠어요. ‘취준생 주제에 무슨 공연이냐’랑 ‘그래도 너무 보고 싶다’는 마음이 오락가락했는데, 결국 ‘보고 싶다’는 마음이 이긴 거죠. 이것마저도 ‘시발비용’이라고 하면, 너무 슬플 것 같아요.”

출장 갔다 오니
밥 해먹을 힘이 없어서…
치킨·떡볶이 안 사먹었으면
적자 면했을까요?

‘시발비용’이란 비속어인 ‘시발’과 ‘비용’을 합친 단어로, 스트레스를 받아 지출하게 된 비용을 의미한다. 필요 없는 화장품이나 물품을 구입하고, 스트레스 탓에 집에서 치킨 등 배달음식을 시켜먹는 비용이 대표적이다. 보통 홧김에 쓴 비용인 탓에 쉽게 ‘줄일 수 있는’ 비용으로 해석되지만, 그렇다고 ‘시발비용’이 허망하게 소비되는 돈만은 아니다. 기약 없는 취직을 준비하는 취업준비생, 저임금을 받고 일하는 계약직 사원, 막연하기만 한 결혼을 준비하는 직장인. 독립된 경제주체로의 단계적 ‘이행기’를 지나고 있는 20~30대의 영수증에는 정해진 패턴대로 소비를 할 수밖에 없는 ‘사연’이 도드라진다.

서울시청년활동지원센터가 서울·경기 수도권에서 활동하는 만 20~34살 미혼 청년 136명의 생활경제 실태를 분석한 ‘이행기청년 금융지원 모형 개발 연구’ 보고서(이행기청년 보고서)를 보면, 학업에서 직장으로, 부모와의 동거에서 주거 독립으로 이행기를 겪는 청년의 경우 ‘고용 형태’와 ‘주거 상태’에 따라 한 달 지출과 이에 따른 삶의 질이 크게 달라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행기청년 보고서는 136명의 한 달 지출을 크게 고정비·기본생활비·기호소비·관계소비·비정기소비 등 5가지로 분류했다. ‘고정비’는 월세, 공과금 등 매달 고정적으로 들어가는 비용을, ‘기본생활비’는 식비, 교통비 등 수시로 발생하는 비용을 의미한다. 두 비용은 삶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비용으로, ‘고정비+기본생활비’(고정생활비)의 지출이 전체 지출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을수록 삶의 질이 떨어지는 것으로 해석된다. ‘기호소비’는 담배·술·문화생활 등 지금 당장 소비하지 않아도 되지만 쓰면 만족스러운 소비를, ‘관계소비’는 모임·후원 등 관계 행복과 관련된 비용을 의미한다. 두 비용은 모두 ‘행복’과 관련된 소비로, 지출 비중이 높을수록 삶의 질이 높아진다.

이행기청년 보고서를 보면, 월수입과 직업안정성이 높은 직군일수록 지출에 따른 삶의 질이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 직군 가운데 ‘고정생활비’ 평균 절대금액은 정규직이 78만8천원으로 가장 많았지만, 지출에서 이 비중이 가장 높은 직군은 아르바이트생(59.3%), 프리랜서(57.6%), 계약직(56.3%) 등 안정성이 취약한 직군인 것으로 나타났다.

기본생활비가 부족한 현실은 ‘일상생활’마저 뒤흔든다. 아르바이트와 취업 준비를 병행하고 있는 한세진씨는 온전히 ‘취업 준비’에만 올인하지 못하는 이유로 ‘생활비 부족’을 꼽았다. “한 달 60만원으로 생존하면서 취업 준비까지 하는건 거의 불가능해요. ‘내 인생이 지금 이 상태로 흘러가면 어떡하지…’ 이런 불안감에 항상 사로잡히거든요. 돈 문제, 취업에서 오는 스트레스 때문에 3년 동안 불면증 치료를 받고 있어요.”

반면 지출 금액이 높을수록 삶의 질도 높아지는 ‘기호+관계소비’(기호소비) 금액은 정규직(46만4천원), 계약직(38만2천원), 아르바이트(35만9천원), 취업준비생(33만5천원) 순으로 나타났다. 고용안정성과 소득이 낮을수록, 고정생활비의 비중은 높고 기호소비 절대금액은 적어 소비의 만족도와 삶의 질이 떨어진다는 뜻이다. 서울시청년활동지원센터의 하준태 기획실장은 “아르바이트 등 저임금 일자리의 경우 주거비와 식비, 교통비 등의 고정비용을 제외하면 저축은커녕 적자로 버티는 경우가 많았다”며 “적자로 지내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청년기부터 빚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2030 이행기 청년금융보고서
고용·주거 따라 ‘삶의 질’ 달라 월세·교통비 등 고정·생활비
비정규직들 수입의 60% 육박
학자금 대출은 또다른 덫으로 행복과 관련한 기호·관계 소비
정규직일수록↑ 비정규직일수록↓ 저임금 탓 쪼들린 삶 쳇바퀴
월세 줄이려 캥거루족 자처
“숨만 쉬면서 일해도 적자네요“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김소윤(27·가명)씨가 스스로 ‘삶의 질’이 낮다고 생각하는 이유도 바로 절대적인 임금(세후 124만원)이 적은 탓이다. 김씨는 지난해 12월22일 백화점에서 브랜드 화장품을 6만5천원 주고 샀다. “살면서 백화점에서 브랜드 화장품을 사본 게 처음이었어요. 나한테 선물하는 느낌이 들어서 정말 좋던데요. ‘아 이게 돈 버는 맛이구나…’이런 생각도 들고요.” 김씨가 12월 지출한 고정생활비는 주거비 30만원을 더한 86만7천원, 기호비용은 38만5천원이었다. 고정생활비는 평균치(69만6천원)보다 17만원 이상 높았던 반면, 기호비용은 평균치(38만9천원)보다 다소 낮았다. 김씨가 말했다. “한 달에 200만원 정도만 벌었으면 좋겠어요. 그럼 저금도 하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지출에 따른 삶의 질은 주거 형태에 따라서도 큰 차이를 보였다. 주거 형태(부모 동거·고시원·공동주거·전월세·전세·본인소유·기숙사)별로 소비패턴을 분류했을 때, 삶의 질이 가장 떨어지는 부류는 ‘고시원 거주’군으로 나타났다. 고시원 거주군은 고정생활비가 전체 지출의 69.0%를 차지해 전체 소비의 절대량을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부모 집에서 거주하는 경우 고정생활비 비중이 47.2%로 평균(53.8%)보다 낮았고, 기호비용 비중은 35.3%로 평균 이상이었다. 부모와 함께 거주하는 ‘캥거루족’일수록 삶의 질이 높다는 의미다.

서울의 한 비영리단체에서 일하는 최소원(28·가명)씨는 비자발적으로 ‘캥거루족’을 선택한 경우다. 정규직으로 일하는 최씨의 한 달 수입은 세전 150만원, 지출은 208만원이다(2017년 12월 기준). 최씨는 “독립이야 늘 하고 싶죠. 그런데 여유자금이 없으니 독립하고 싶단 마음은 너무 쉽게 ‘배부른 소리’가 되는 거죠”라고 말했다.

특히 청년들의 주거 문제는 ‘숨만 쉬어도 적자’인 이들의 재정 상태로 이어진다. 민간 연구기관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김서희(30)씨는 대학 입학 이후 10년간 서울에서 자취를 하다 지난해 10월 경기도 성남의 월세방으로 옮겼다. “대학 다니면서 월세랑 생활비를 충당하느라 과외를 다섯개씩 했던 적이 있었어요. 많이 벌면 한 달에 170만원까지 벌었는데, 그러면 내 생활도 없고, 학점도 못 챙기는 거죠.” 지금 살고 있는 자취방의 월세와 공과금을 합치면 한 달 40만원가량. 세후 180만원을 버는 김씨에게 결코 적지 않은 금액이지만, 김씨는 ‘그래도 ‘서울살이’를 하던 시절보다는 만족한다’고 했다. “전세만 돼도 좋겠는데 (모아둔 돈이 없어서) 그거까지 바라진 못하고요. 한 달에 40만원 정도씩만 저금하고 싶은데, 월 240만원 정도만 벌었으면 좋겠어요.”

이행기청년 보고서는 “고용·주거의 질과 소비의 질은 서로 인과관계가 있고, 고용·주거의 질이 떨어지면 삶의 질도 떨어진다”고 분석했다. 보고서는 “고용이 안정적인 정규직이나, 주거문제가 해결된 청년층만이 사회에 안정적으로 안착할 수 있는 청년 ‘이행기’의 구조를 봤을 때, 우리 사회가 청년들에게 부모의 희생을 요구하는 ‘등골 브레이커’나 ‘캥거루족’을 강요하고 있는 셈”이라고 짚었다.

황금비 최민영 기자 withb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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