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유라시아 제왕'이 목표..더 강해진 푸티니즘이 온다
오늘(18일) 열리는 러시아 대선의 당선자는 블라디미르 푸틴(66) 대통령이다. 투표함을 열지 않아도, 아니 투표가 시작되기 전부터 누구도 이 결과에 의심을 품지 않았다. 고작해야 투표율과 푸틴의 득표율이 각각 70%를 넘기느냐 정도가 관전 포인트다. 2000년 첫 당선 이후 대통령 세 차례, 총리 한 차례를 역임한 푸틴은 이로써 2024년까지 집권하게 된다. 옛 소련 시절 이오시프 스탈린(1922~53년)의 31년 독재 이후 최장 통치다.
선거를 눈앞에 두고 영국에서 발생한 러시아 출신 이중 스파이 독살 기도 사건으로 서방과 러시아 간에 험악한 외교 전쟁이 불붙었지만 푸틴은 눈썹 하나 꿈쩍 않았다. 오히려 지난 14일엔 2014년 러시아가 전격 합병한 크림반도를 방문해 서방의 제재를 아랑곳 않는 모습을 보였다. 이날 그는 크림 합병이 “역사적 정의를 바로 세운 것”이라며 자신의 통치 3기(2012~2018) 성과를 자축했다.
우연히도 이번 대선일인 3월 18일은 크림자치공화국의 러시아 연방 합류가 공식 선언된 지 꼭 4년이 된 날이다. 당시 푸틴은 합병 연설을 통해 “크림은 러시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일부”라면서 오랫동안 러시아 영토였던 크림반도가 소련 붕괴 당시 우크라이나에 귀속된 것이 “역사적인 불의”였다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우크라이나 내 친러ㆍ반러 대립이 격화하고 미국과 유럽 등의 경제제재가 4년 이상 계속되고 있지만 푸틴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반서방 러시아 민족주의’를 고취하며 자신의 지지율을 높이는 계기로 삼았다.
━ 외형상 민주주의…야당 탄압으로 ‘대안’ 부재
이는 푸틴 3기 동안 러시아 내에선 ‘주권민주주의(sovereign democracy)’와 국가자본주의를 두 바퀴로 삼아 속도를 내왔다. 주권민주주의란 서구식 자유민주주의와 대비되는 러시아식 민주주의다. 국립외교원 김태환 교수는 “외형상 자유민주선거를 하지만 선거관리가 편파적이며 야당 탄압과 언론 장악을 통해 반대파가 자라지 못하게 한다”고 설명했다. 민주주의에 반하는 성격이 다분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비민주적인 게 아니라 러시아 전통 가치 즉 민족(nation·국가), 가족, 기독교(특히 러시아정교회)에 맞는 특수성이라는 식으로 선전한다는 것이다. 이번 대선에 푸틴 외에도 7명의 후보가 출마했지만 푸틴 당선에 들러리 역할에 그친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이 같은 푸틴주의는 집권 4기에 더 공고해질 전망이다. ‘차르’ 푸틴은 남은 6년 간 ‘강대국 러시아’를 굳건히 함으로써 옛소련 시절의 국제적 위상을 회복하려 한다. 이를 위해 대규모의 군 개혁과 현대화를 진행하고 있다. 2007~2016년 간 러시아 국방비는 두배 가량 증가해 2016년엔 700억 달러로 국내총생산(GDP)의 5.3%에 달했다.
━ 시리아ㆍ이란ㆍ북핵 사태 등 쥐락펴락
러시아는 강화된 군사력을 기반으로 우크라이나 동부 등 주요 분쟁 지역에서 실질적인 ‘키 플레이어’로 활약하고 있다. 특히 시리아 내전에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의 휴전 결의와 별도로 독자적인 휴전안을 내기도 했다.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의 명줄을 쥐고 있는 푸틴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다. 푸틴은 시리아를 기반으로 한 친러 벨트를 중동에 구축하기 위해 이란과도 공조하고 있다.
주목할 것은 푸틴주의를 사상적으로 뒷받침하는 유라시아주의다. 김태환 교수는 “푸틴은 옛소련 국가들을 아우르는 유라시아적인 정체성이 있다고 주장하며 이를 유럽과 구분되는 독자적인 문명으로 본다”고 말했다. 군사ㆍ경제적 측면뿐 아니라 소프트파워까지 포괄하는 유라시아권을 설정하고 여기서 ‘대장’ 노릇을 하려 한다는 것이다.
━ 유라시아주의 강조…미국 영향력 확대에 맞서
푸틴은 이 권역 사수를 위해 동유럽에선 나토의 동진 정책에 맞서고 동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저지하려 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 이후 미ㆍ러 간에 밀월 가능성이 제기됐음에도 결국 두 나라가 신냉전 관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푸틴의 국익과 트럼프의 국익이 다방면에서 충돌하기 때문이다.
푸틴식 유라시아주의 강화는 러시아와 지역적으로 인접한 한반도에도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중국 역시 최근 시 주석의 종신집권을 가능케 하는 개헌안을 통과시키면서 중ㆍ러가 나란히 ‘스트롱맨’ 장기 집권체제를 갖추게 됐다. 각각 ‘강한 중국’과 ‘강한 러시아’를 부르짖는 이 스트롱맨들이 어떻게 국제 전략을 펼치느냐에 따라 한국의 대외 관계가 요동칠 수 있다.
국립외교원 고재남 교수는 “북ㆍ미 관계 정상화와 별도로 중국과 러시아는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이 강화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면서 “북한 비핵화 과정에서도 자국의 존재감과 위상이 훼손되지 않도록 다자회담으로 유도해 갈 것”이라고 말했다. 김태환 교수는 “푸틴 집권 기간은 물론 푸틴 이후에도 ‘강대국 러시아’는 하나의 국가 이념이 될 것”이라며 “우리로선 다자 질서에 대한 러시아의 열망을 역으로 활용함으로써 국익을 극대화해가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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