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의 안뜰] '그라민 뱅크' 600년 앞선 민초들의 신용조합

강구열 2018. 3. 17.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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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조선시대 호혜 문화의 코드 '社倉'
官주도 의창과 달리 민간서 자율로/주민이 곡식 출자하고 운영해 자립/中주자의 구상보다 더 진보한 NGO

2018 평창동계올림픽에서 컬링은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다. 안경 너머로 내뿜는 김은정 선수의 카리스마는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도 깊은 인상을 주었다. 선수들의 뛰어난 기량과 더불어 컬링 경기 중계방송을 보면서 깊은 감명을 받은 것이 있다. 심판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스코어 차이가 크게 벌어지면 패자가 기권을 하면서 승자에게 악수를 건네는 것도 놀라웠다. 한 치의 양보 없는 올림픽 경기에서 꽃핀 멋진 문화였다. 정글이라 불리는 무한경쟁의 시대에 컬링처럼 신선한 것은 없을까, 라는 생각을 하나 ‘호혜’(互惠)의 문화적 실천을 떠올렸다. 서로를 도와 이익을 도모한다는 의미의 호혜라는 말은 우리 시대에 어떤 희망의 빛을 주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갖게 하기 때문이다.

2012년 협동조합법이 통과되면서 호혜는 우리 사회에서 널리 쓰이고 단어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이 호혜의 현대적 실천을 서구에서나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호혜의 문화전통이 강한 ‘협동조합의 천국’ 이탈리아 볼로냐를 부러워한다. 한국의 많은 정치인, 시민운동가, 학생, 관료 등이 볼로냐 땅을 밟는다. 그런데 정작 볼로냐 주민들의 생각은 다르다. 볼로냐 대학교 정치학과에 방문교수로 있을 때 하숙집 주인은 볼로냐 사람들을 믿으면 안 된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오히려 한국인의 단결심을 높이 평가한다. 같은 현실을 보는 관점이 이렇게 다르다.

한국사의 안뜰에 호혜 문화는 어떻게 존재했을까. 흔히 계, 품앗이, 두레, 향약 등을 호혜 전통의 보기로 드는데, 나는 지금껏 한국사 연구에서 상대적으로 간과되어 온 사창(社倉)에 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가장 자율적이었던 조선의 사창

사창은 전국적으로 실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환곡, 의창, 상평창 등에 비해 잘 언급되지 않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의 문제 해결이라는 점에서 보면 사창은 흥미로운 점이 많다. 특히 호혜라는 키워드와 관련할 때 그렇다.

사창은 큰 마을이나 면 단위에 있는 민간 식량창고이다. 사창의 ‘사’(社)는 생활의 단위이고 행정단위로서 우리로 치면 큰 마을 내지 면을 의미한다. 동아시아에서 ‘사’라는 행정단위를 폭넓게 사용했고, 현재까지도 활용하고 있는 나라는 베트남이다. 베트남에서는 지금도 ‘싸’(Xa)를 농촌지역의 행정단위로 사용하고 있다. 중국이나 한국은 ‘사’를 행정단위로 별로 사용하지 않았는데, 사창은 베트남보다 더 많이 언급하고 활용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조선에서는 특정한 주장을 펼칠 때 그 근거로 공자나 주자의 사상이나 고례(古禮)를 근거로 제시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사창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주자의 사창을 실현해야 민생의 안정을 기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게 대표적이다. 그리고 주자가 구상했던 사창, 중국의 운영했던 사창보다 더 발전된 형태의 사창을 실현시켰다. 그것은, 요즘의 표현을 빌리자면, 훨씬 자치적이고 자율적이었으며, 참으로 비정부기구(NGO)적인 형태였다. 

◆민간이 주도하고, 백성 가까이에 있었던 사창

주자가 구상했던 사창은 설립 첫해에 필요한 곡식을 지방정부에서 빌렸다. 공적자금을 지원받아 밑천을 만드는 셈이다. ‘정부 곡식 출자로 사창 창립’→‘민간에 곡식 대여’→‘곡식 대여 시 2할 이자로 이자의 축적’→‘빌린 곡식을 정부에 완납’→‘사창의 자립’이 주자의 머릿속에 담긴 사창 운영의 큰 그림이었다. 중앙정부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사 단위에서 민간 식량창고를 자치적으로 운영하고자 했던 것이다. 안민(安民)정책을 중앙정부에 기대지 않고 지역 자치의 힘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정책이다. 다만 대부할 곡식을 정부로부터 빌려서 사창을 창립했다.

주자의 아이디어를 빌린 조선의 지식인들은 가히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 할 만한 경지를 사창 운영에 적용했다. 주자가 고안했던 그것보다 사창제도를 훨씬 더 발전시키고 현대화시켰기 때문이다.

조선 지식인들이 모범으로 생각한 사창 모델은 ‘지방의 민간 곡식 출자로 사창 창립’→‘민간에 곡식 대여’→‘이자 축적’→‘사창의 자립 발전’의 순서로 발전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사창을 상평창이나 환곡과 분명히 다른 것이라고 판단했다. 사창의 운영은 정부 주도가 아니라 민간 주도의 자립과 자치를 핵심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조선에서도 정부로부터 곡식을 빌려서 사창을 설립하는 주자의 모델도 있었고, 정부와 민간이 함께 출자하는 민관 협력 모델도 있었다.

그러나 이론적으로 실천적으로 자립·자치의 사창을 지향하였다는 점에서 조선 선비들의 혜안이 돋보인다. 다산 정약용은 ‘경세유표’(經世遺表)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 사람들은 늘 환자법은 주자가 만든 사창제도와 같은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 전 사창이 부락에 있었다면 환자미는 읍내에 있으며, 사창을 민간에서 주관하였다면 환자미는 간사한 아전들이 주관하고 있다.”

다산은 지방 관료가 관리하는 환곡의 거버넌스와 민간이 주도하는 사창의 거버넌스가 완전히 다르다는 점을 명시했다.

곡물창고의 위치도 다르다. 환곡은 주민들의 생활근거지에 떨어져 관청 소재지에 있고 사창은 주민들의 생활근거지인 사, 즉 마을에 있었다. 17세기 영남의 석학 정구는 성주의 사창 마을에서 10년을 살았고, 숙종 때 백의정승으로 일컬어졌던 유학자 명재 윤증도 때로 사창의 곡식을 꾸어 생계를 이으면서 자기 시대의 학술문화를 이끌었다. 이렇듯 사창은 사람, 특히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 가까운 곳에 있었다.

곡식 창고의 지리적 위치가 중요하다는 점을 다산은 명확히 지적했다. ‘읍창(邑倉)을 폐지하고 사창을 설치하면 폐단을 시정하는 방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밝힌 것이다. 17세기 조선의 국가운영론을 설파한 ‘홍범연의’(洪範衍義)의 저자 이현일도 곡식 창고가 관청 쪽에 있으면 깊은 산골에서는 교통문제로 굶어 죽을 지경이 되어도 쌀말을 구경하기 힘들 것이라고 지적했다. 복지의 사각지대를 없애기 위해 지역사회 복지를 강조하는 것과 다름없다.

반계 유형원은 ‘사창미를 거두어들이고 분산시키는 규정은 주자의 사창제도에 의할 것이나 그 제도는 변통해야 할 것도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지방의 실정을 참작하여 적당하게 규정을 세울 것이며 지금 부락에서 하는 계(契)의 규정과 같게 하라’고 추천했다. 아울러 향약과 결합하여 민간자치로 운영하라고 조언했다. 사창의 운영은 정부 관료가 아니라 민간 자치에 맡겨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행실이 미덥고 재간 있는 자를 가려 그 일을 맡기고 삶의 경험이 풍부한 마을의 원로(元老)들과 상의하여 공동으로 처리하라’고 하여 민주적 절차를 제시하였다. ‘본 고을’(지방정부)은 ‘다만 장려하고 협조해 줄 뿐이며 간섭하거나 강요하지 말라’고 한다. 특히 강제로 설치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한도현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소액 대출에서 사회자본 성장 도모까지

문용식의 연구에 의하면 조선 초기에 경상도 일부 지역에 시험적으로 시행되었고 전국적으로 시행되지는 못했지만 여러 곳에서 관료나 선비들이 사창을 실시했다. 대표적으로 이이, 송시열, 이유태, 이단하, 이현일, 곽지인, 신익황, 황익재, 안정복 등을 들 수 있다. 이이의 ‘사창계약속’은 하나의 교과서처럼 잘 짜여 있다. 물을 부어도 새지 않을 만큼 정치하다. 그의 사창론에서 흡사 실천적 사회과학자의 식견과 혜안을 엿볼 수 있다.

율곡의 사창계는 회원의 조직이다. 가입자격이 있고 회원들은 일정액의 회비를 출자해야 한다. 계의 출자원리를 활용하여 사창 운영에 필요한 종잣돈을 모은다. 이것은 자립·자조의 협동정신이고 신용조합의 원리이다. 멤버들은 신용만으로 소액의 곡물 대출을 받을 수 있다. 이자는 시중의 40%에 밑도는 저리였다. ‘조선형 사창’은 소액금융대출로 빈곤타파에 기여한 공로로 2006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무함마드 유누스의 그라민 뱅크를 앞선 모델이다. 그라민 뱅크는 회원 소유의 신용조합이 아니라 소액대출 은행일 뿐이다.

사창계는 단순히 소액 대출을 하는 회원 조합의 기능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조직 내의 4강목 실천을 강조함으로써 사회자본의 성장을 도모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회원들 간의 사회자본을 증진하기 위해 덕업상권·과실상규·예속상규·환난상휼이라는 사회적 원칙을 제시하였다. 신분제의 부정적 먼지를 털어낸다면 이러한 과감한 사회학적 제안은 오늘날의 ‘마을만들기’, ‘주민은행’, ‘공동체운동’에 적극 활용될 수 있다.

호혜라는 파랑새는 볼로냐가 아니라 조선의 문서 창고에 들어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는 이 점에 착안하여 ‘호혜와 협동의 계보학’이라는 장기 대형과제를 추진하고 있다. 조선 500년의 전통과 미래 한국을 호혜와 협동이라는 키워드로 연결시켜 보고 우리 안의 힘을 재발견하고자 한다.

한도현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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